[향토문화] 삼도수군의 참모본부.. 운주당터(김윤식 적거, 백양사 포교당, 고수선 집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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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삼도수군의 참모본부.. 운주당터(김윤식 적거, 백양사 포교당, 고수선 집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0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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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은 조선시대의 운주당 건물 터는 아니고 고수선 여사가 지었던 집 터만 발굴된 것

일도1동 운주당터(김윤식 적거, 백양사 포교당, 고수선 집 터)

 

위치 ; 제주시 일도1동 1108-20, 1109번지. 동문파출소 남쪽 150여m 지점 건물 없는 땅.
시대 ; 조선~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관아~포교당~보육원 터

일도2동_운주당터

 

일도1동_운주당터

 

원래 운주당이란 말은 통제사가 작전계획을 구상하던 삼도수군의 참모본부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인조 23년(1645) 이완 통제사가 아사를 옮겨 세우면서 그 서쪽 편에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세병관 동쪽 법원 자리에 있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운주는 사기(史記)의 운주유악지중(運籌唯幄之中)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운주라는 명칭은 군영에서 많이 사용되었는데 같은 명칭을 사용한 예는 충청도 병영, 충청도 수군절도영, 평안도 병영, 평안도 안주, 황해도 병영, 옹진에 모두 운주헌이라는 공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 본영의 처소는 항상 이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다음 문화원형) 籌는 투호살이라는 뜻이다.

제주에서는 명종10년(1555) 6월에 왜선 40여 척이 침입하여 제주성 동쪽 높은 능선에 결집하여 제주성을 공격하니, 이를 방어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김수문(金秀文) 목사는 비장한 각오로 7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진으로 돌격시켜 적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명종20년(1565) 郭屹 목사가 부임하여 을묘년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선조1년(1568) 봄에 東城을 능선까지 확장하니, 李元鎭의 <탐라지>에 의하면 둘레 5,489척, 높이 11척에 격대 27개, 타첩 404개가 마련되고, 동·서·남문이 갖추어졌으며, 동쪽의 산지천에 남·북으로 수구문을 설치하고 동성 위에서 將臺인 運籌堂을 세우고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제액을 게시하였다.(디제문)

운주당의 위치는 제주읍성 안팎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곽흘 목사가 임기를 마치고 제주도를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명환(名宦)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한다.(한국매일뉴스 160203)

이순신이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세운 운주당보다 무려 24년 전이었다.(제이누리 150104)

목사 신경윤(愼景尹)이 성의 동남 구석의 돈(墩, 평지에 흙을 쌓아 놓은 곳) 위에 막(幕)을 설치했다. 돈에서 굽어 내려다보니 성안이 마치 손바닥 보듯 훤하고 비(埤, 성 위의 돌담)를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大將의 형명(形名, 깃발과 북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을 볼 수 있어 성안을 빙 둘러가며 節度에 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수에게 합당한 壇이 될 만한 것으로 짝이 될 게 없었다. 하물며 밤이 깊어도 將과 士가 이슬 내리는 데 서 있으면 막을 수가 없으니 행여나 비를 맞아 젖는 것을 면할 수 없고 비람과 이슬 내리는 가운데 사람이 거의 지탱할 수가 없자 장리(將吏)가 나아와 말하기를 “옛날 곽공 흘이 주절로 안무할 때 이곳에 당을 지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진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됩니다” 하였다.

나(신경윤)는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성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성이 있다면야 지켜야 되고 지키려면 반드시 장단(將壇)이 있어야 삼군을 지휘할 수가 있다. 위에 지붕이 있어야 비바람을 막고 게다가 무를 시찰할 수 있다” 하였다.

이익태 목사가 1694년에 유사시 제주목사가 제주성 방어를 총 지휘하였던 운주당(運籌堂)을 중창하였다.(디제문) 그의 저서 지영록(智瀛錄)에 운주당 중창기가 있다.(제민일보 2009년 10월 5일)

공사가 비록 크고 그 해에 흉년이 들었지만 재목을 운반해다 놓으며 서두르다 보니 날은 지나갔다. 기타 공역의 비용은 관이 스스로 해낼 수 있기에 일을 맡아 계해(숙종9년=1683) 4월 13일에 시작하여 6월 10일에 공사를 마치고 묵은 편액을 걸었는데 그대로 옛날의 운주당이었다.

…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히 운주(運籌, 미리 대비하여 둠)에 적중하고 있으니 당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렇다 하나 내가 당을 짓기는 하지만 나중에 운주는 뒷사람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목사겸절제사 신경윤.(김익수 譯 知瀛錄 57~59쪽) 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중에 제주조점(濟州操點) 그림에도 도성(都城)의 남동쪽 구석에 운주당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장수의 깃발을 거는 깃대가 함께 그려져 있다.

그 후 안경운 목사가 1743년에 중수, 김몽규 목사가 영조29년(1753) 운주당(運籌堂)과 관덕정(觀德亭)을 중창하였으며, 이규원 목사가 고종29년(1892) 여름에 실화로 소실된 운주당(運籌堂)을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근대에 비교적 새 건물로 거듭난 이 운주당을 사용한 사람은 구한말의 정치거물이던 김윤식(1835-1922)이다. 그는 1897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1901년 5월까지 5년의 유배중 이곳을 적거지로 썼다.

그 후 30년 넘게 이 건물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 길이 없다가 1934년에 건물을 헐어 목재를 팔기로 함에 따라 봉개동 주민들(구장 임원명)이 향회를 열어 학교를 짓기 위하여 이 목재를 사갔다.(봉개동 고한구님 증언)

부지는 이일선(1895-1950)이 백양사 포교당으로 썼다고 한다. 1930년대에 농촌계몽 운동을 하다 성철, 서암, 서옹 같은 고승을 배출해낸 만암의 지시로 1937년 제주에 내려와 불교정화 운동을 펼쳤다.

1947년 남북분단을 반대하는 단체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제주 4·3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쟁 중인 1950년 예비검속으로 잡혀 산지포구에 수장당했다. 이일선 이후에는 운주당이 해체되거나 타버린 것 같다.(제이누리 150104)

1945년 조선불교혁신회가 구성되며 혁신회를 중심으로 불교계의 새로운 출발을 기하기 위한 전국 승려대회가 추진됐다. 이후 전국 각 지역의 불교계도 이에 호응해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건국정신을 진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제주지역에서도 제주도 불교청년단 결성대회와 맞물려 승려대회가 지방에서는 최초로 개최됐다. 당시 이 승려대회를 주도한 이가 바로 이일선 스님(1895∼1950)이다.

이일선 스님은 1895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선운사로 출가, 백양사에서 공부했다. 스님은 개화이후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당시 백양사에는 일제의 사찰정책에 항거했던 박한영·백학명·송종헌 스님 등이 활동했다. 이일선 스님은 당시 백양사서 강의를 했던 박한영 스님의 영향을 받아 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시작한다.

스님은 1921년 불교유학생 유학회 지방 순강단(巡講團) 활동, 1922년 재경 불교유학생 학우회 등 활발한 운동가로서의 청년기를 살았다. 그 후에도 백양사로 내려가 식민통치 이후 피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한 사회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불교를 지키는 것이 곧 조국을 지키는 것이라는 민족의식으로 활동했던 20대 청년 이일선 스님은 그러나 30년대 우리나라 다수 지식인들의 좌절과 마찬가지로 한때 일제정책에 동조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도 활동을 시작한 이일선 스님은 서귀포포교소(정방사), 제주포교소(삼양 원당사), 제주중앙포교당(제주시 운주당), 정광사(옛 칠성통)에 주석했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의 포교부장으로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하며 제주불교를 활성화 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일선 스님 등의 주도로 열린 제주승려대회는 대처식육과 내연화주 동거를 절대금지하고, 사찰 내 제반 수입은 화주 및 주지 주관의 단독적 처리를 절대 엄금하자는 의견을 내놓아 만장일치로 가결시키는 등 전통불교사상을 정립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4·3으로 인해 이러한 제주불교계의 정화노력은 열매가 채 맺기도 전에 사라지게 된다. 좌·우익이 대립하는 혼란한 사회상에 적극 참여한 스님은 1947년 3·1절기념투쟁제주도위원회의 선전동원부 활동, 3·1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반외세를 통한 자주국가 건설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시기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정치활동에 앞장서기도 한 스님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몸살을 앓는 사회변화의 중심에서 불교계의 대표로 참석해 불교의 발전은 곧 사회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에 근거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보여주었다.

이일선 스님은 이러한 진보적인 성향으로 인해 국민보도연맹에 소속돼 관리됐고, 범죄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불법적으로 감금됐었으며, 끝내는 1950년 예비검속되어 수장됐다.(제주불교 050414)

현대에 이르러서는 1951년 이후 고수선 여사가 기거하면서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곳으로 그의 자취가 가장 뚜렷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사 출신 고수선(1898-1989)이 교육과 보육기관을 새로 지어 썼다. 고수선은 3.1운동 참가를 시작으로 항일운동, 정치활동, 각종 사회사업을 벌였는데, 운주당터에서는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강습소, 제주모자원, 제주국악원, 인당무용학원, 인당민속무용예술단, 홍익보육원, 선덕어린이집, 경로당 등을 운영했다. 고수선은 제1회 만덕봉사상을 받았고, 사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제이누리 150104)

원래 운주당(運籌堂)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제주성의 작전참모부, 즉 무기를 보관하던 청상고(淸箱庫)가 있던 자리다. 고수선의 아들 김률근씨(64)에 따르면 “어머니가 집(운주당) 지을 당시 ‘청상고(淸箱庫)’는 불에 타 아무런 흔적이 없었고 단지 주춧돌만 남아 있더라”고 회고했다.

김씨에 따르면 운주당은 제주여고 1회 졸업생들의 교육 산실이요, 제주학자 김홍석(金洪錫)에 의해 전라도에 귀속된 제주섬을 제주도(濟州道)로 승격됐던 역사의 현장 등 고수선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의미를 지닌 곳이라고 한다.

고수선 여사는 1898년 5월 4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현)에서 고석조(고영조)씨와 오영원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았고, 그 이후는 모슬포로 이사가 살았다. 특히 어머니 오영원씨는 교육열이 높아 고수선 여사의 서울과 일본 유학시절을 모두 따라다니며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는 데 목말라했던 고수선은 4km가 떨어진 야학을 몰래 다니려 했으나 아버지에게 들켜 포기했다가 후에 정식 허락을 받아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친다. 1916년 서울로 유학을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이무렵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한 여성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셋 뿐이었다. 이 시절 일화 중 고수선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역사와 미술을 가르치는 일본인 시바다 교사가 이순신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자, 그 자리에서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또한 일장기를 그리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몰래 태극기를 그린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고수선은 학교에서 불령(不逞) 학생으로 낙인찍힌다.

고종황제가 승하하던 해인 1919년 고수선은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그해 3월 1일, 교직원들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수업을 중단한 채 학교 문을 잠그고 교무회의를 열었다. 이 사이 고수선은 도끼로 문을 부순 후 파고다공원으로 뛰어가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친다.

후에 사범과를 졸업하고 충청남도에서 교사활동을 하다 1922년 독립자금 모금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고수선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갖은 고문 끝에 풀려난 고수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했다. 의사면허 취득 후 귀향, 인당(忍堂) 김태민과 결혼하였다.

지금의 조천을 비롯해 한림과 서귀포, 고산 등을 돌아다니며 ‘장춘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의료활동을 펼치던 두 사람은 1944년 충청남도 강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6.25가 발발하면서 오랜 피난생활을 하였다.

1.4후퇴 때 다시 귀향한 두 사람은 의사생활을 청산하고, 김태민은 독서와 서예로 만년을 보냈으며 고수선은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운주당이 고수선 여사의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한 무대가 되었다. 또한 10여년 동안 대한노인회 제주도 연합회장을 역임하면서 노인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집안 일을 돌보는 가사보다는 독립운동, 여권신장과 정치, 사회활동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고수선 여사는 1989년 8월 11일 자택에서 9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제이티뉴스 050520)

방치되어 있던 운주당 터는 원도심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의 일환으로 2015년 4월에 〈제주성 운주당 유적 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 면적은 2047㎡이며, (재)제주고고학연구소가 맡았는데 성격은 긴급수습발굴이었다.(위 사진 참고) 발굴 현장을 보면 조선시대의 운주당 건물 터는 아니고 고수선 여사가 지었던 집 터만 발굴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일보(160908)에 따르면 운주당은 공신정과 함께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한다.
《작성 110412, 보완 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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