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한라호국신(漢拏護國神) 광양왕(廣壤王)의 사당 터.. 광양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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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한라호국신(漢拏護國神) 광양왕(廣壤王)의 사당 터.. 광양당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10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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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한라산 호국신을 광양왕으로 봉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도1동 광양당터
 

위치 ; 이도1동 1324-10. 새마을운동중앙회제주시지회 건물 자리.
유형 ; 민속신앙
시대 ; 미상(고려시대 추정)

 

이도1동_광양당터 표석

 

이도1동_광양당터


한라호국신(漢拏護國神) 광양왕(廣壤王)의 사당 터이다. 삼성혈에서 북쪽으로 가면 새마을운동중앙회제주시지회 건물(옛 적십자회관) 옆에 광양당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제주시의 옛터』에는 광양당 터가 이도1동 1689번지 남쪽 지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번지는 현 교보생명빌딩이다.)


표석에는 《한라산호국신으로 알려진 광양당 제사터.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송나라 호종단이 제주의 지맥을 누르고 떠날 때 노한 한라산신이 매로 변신하여 거센 파도를 일으켜 호종단의 배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한라산 호국신을 광양왕으로 봉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숙종28년(1702) 이형상 목사가 이를 철폐시켰으나 뒤에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1653년에 만들어진 이원진의 『탐라지』를 보면 주성(州城) 남쪽 3리에 한라호국신사인 광양당이 있다고 했다.

광양당(廣壤堂)은 제주(濟州)에서 가장 큰 신당이었다. 이 당은 유교제례가 일반화된 조선조(朝鮮朝)이전에는 탐라국(耽羅國)의 국당(國堂)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에서 나라의 제의가 치러졌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의 구전에 의하면 국당(國堂)의 하나로 금자광록태광성(金紫光祿太匡星), 고산태오(高山太烏), 시님제석도(師僧帝釋), 서역국대부인(西域國大夫人), 감찰지방관(監察地方官) 등 5위를 모셨던 신당이다.

또한 광양당신은 정의현의 서낭당신, 대정현의 광정당신과 한 형제로 옛날 삼형제가 활을 쏘아 각기 차지할 곳을 정했는데 맏형인 광양당신이 제주목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송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제주의 땅 맥을 누르고 떠날 때 노한 한라산신이 매로 변하여 거센 파도를 일으켜 호종단의 배를 침몰시켜 버렸다. 조정에서는 그 신령함을 칭찬하여 광양왕으로 봉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광양왕은 조선조에 와서도 본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1702년(숙종 28)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이를 철폐시켰으나 뒤에 다시 부활시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따르면 한라산신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는데, 고려 예종 때 송나라의 술사 호종조(胡宗朝: 일설 胡宗旦)가 그 나라의 왕명으로 고려에 거짓 귀화하여 고려 명산을 돌아다니며 혈을 자르고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혈까지 자르고 배를 타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신이 매(鷹)로 변해서 돛대 위를 날더니 금새 바람이 크게 불어서 호종단의 배를 쳐부수어 서쪽 지경 비양도 바위 사이로 몰아넣어 죽게 하였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그 신령스럽고 영특함을 표창하여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광양왕으로 봉하여 해마다 향과 폐백을 내리어 제를 지내게 되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고하건대 호종단이 와서 고려에 벼슬이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이르러 죽었으니, (제주에) 가서 땅을 압양(壓壤)하다가 배가 뒤집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라고 했다.


1786년(정조 10년) 제주목사 이명준이 임금에게 올리던 장계 속에는 삼성시조에 대해서 "당초에는 사당을 세우고 향사한 일이 없었으며 다만 광양당이 있어 무당들이 빌고 굿하는 장소였는데, 嘉靖5년(중종21년, 1526년)에 목사 이수동이 비로소 모흥혈 옆에 단을 쌓고 3을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매년 중동(仲冬)에 제향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즉, 삼성에 대한 제사는 중종21년(1526) 목사 이수동이 제단을 세워 춘추제를 지내게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이영권은 이 기록에 대하여 “적어도 1526년까지는 삼성시조도 광양당에서 무속적 제의로 모셔져왔음을 말해준다. 즉 본래 3을나신은 광양당신과 같은 당신이었으며 지금 삼성혈에 있는 사당도 애초에는 굿을 하는 당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던 것이 이수동 목사 이후에 유교식 제의로 바뀌게 되었다. 유교 이데올로기 보급을 통해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던 조선정부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다. 그에 따라 제주도의 토착세력은 점차 독자성을 잃어갔다. 중앙종속이 강화되면서 체제 내로 흡수되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의 『해상일사(海上逸史)』에는 남녀가 모여와 춤과 노래로써 신을 즐겁게 하던 <고부락 존상>이라는 굿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광양당은 제주 읍성 남쪽 3리 밖의 모흥혈 부근에 있다. 이곳은 삼신인(三神人)이 ‘놀던 곳’(娛樂之所)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심방들이 모여와 봄과 가을에 징과 북을 치며 <놀이굿>을 하였다. 이를 「고부락존상(高夫樂尊像)」이라 하는데, 고부락의 ‘樂’은 ‘량[梁]’의 잘못 전해진 음이다.”라는 것이다.


문무병은 이를 ‘사냥을 하던 삼신인 고부량의 전상굿’으로 풀이했다. 사냥을 하던 고부량 삼신인이 사냥의 수확물을 신에게 희생으로 바치며 굿을 하던 것이 ‘산신놀이’이며, 이 굿 터가 광양당이라는 것이다.

후대의 심방들이 이러한 신들의 행위를 찬양하며 벌이는 굿놀이가 봄․가을에 하던 「고부량전상」이라 한다면, 이 굿놀이가 조선시대에 와서 봄․가을에 하는 삼성대제라는 형식으로 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제민일보 2000년 2월 19일)


고대경도 『신들의 고향』에서 “옛 문헌과 사적으로 보아 광양당(廣壤堂)과 삼성혈(三姓穴)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朝鮮)의 유교정책으로 당(堂)은 삼성사(三姓祠)로 변했으며 제의도 유교식으로 바뀌어 옛 왕족인 고(高)․양(梁)․부(夫) 세 성씨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광양당이 삼성사로 변했다면 광양당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수동 목사가 1526년에 삼성사를 만들도록 했고 이형상 목사가 1702년에 광양당을 철폐했으니 그 동안은 삼성사와 광양당이 둘 다 존속되어 온 것이다.


숙종38년(1712) 10월부터 1715년 5월까지 제주통판으로 재임하면서 큰 흉년으로 도탄에 빠진 도민을 구제한 우암(寓菴) 남구명(南九明)이 撰한 『寓菴先生文集』「耽羅時紀事誌」〈人妖條〉에 “島俗自三姓以來專尙鬼神 城南廣壤堂爲朝宗 三邑大小村各有祠 每歲時節目 嗚錚鼓備酒食旄甲馬 極其威儀以娛神 故海無風魚之災 民有富庶之盛一 自打破燒盡之後于今十年 水旱風霜 無歲不災至去年極矣 大屹里有女巫最靈異 與天神相問答雜鬼 無不聽命卽者 廣壤神降其神曰 今年若不祀我將大雷雨以風 盡殲島民乃已……女巫進曰 老身初不業巫事去年三月間精神忽眩仆 廣壤神率鬼 卒捽余頭以喝之曰 此州人全不飮食我 我輩飢且甚余速語州民以饗我 不者我將訴上帝 七月且大風 老身不忍困 迫乞曰惟命願赦 我良久然後乃解 遂出入閭閻 播傳神語則村人老少皆曰信矣耿耿哉 相議設舊祠以饗神 特畏官府政令不敢發…”

(제주도의 풍속은 삼성의 탐라개국 이래로 오로지 귀신을 숭상한다. 읍성 남쪽에 있는 광양당을 조종으로 삼고, 삼읍의 크고작은 마을에는 당이 있다. 해마다 당제일에는 징과 북을 울리며 술과 음식 일만 제기를 준비하여 지극히 정성을 다하여 신을 모셔 당굿을 치르므로 바다에는 풍랑의 재난이 없고 백성들은 풍요를 누려왔다.

미신을 타파하고 신당을 불사른 지 10년이 지난 지금 수해 한발 폭풍 혹한 등 재앙이 따르지 않은 해가 없었고 지난해에 더욱 심했다. 대흘리에 여심방이 있었는데 가장 영험이 있어 천신과 잡귀와 더불어 문답하였고 신명을 듣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광양신이 그의 몸에 내려 이르기를 금년에 만약 굿을 하지 않으면 나는 장차 폭풍우를 내려 도민을 모두 쓸어버리고 말리라. …… 여심방은 나아가 말하기를 저는 처음부터 심방질을 하지는 않았으나 지난 3월에 정신이 아찔하여 쓰러졌는데 광양신이 귀졸들을 데리고 와서 내 머리를 흔들며 호통치기를 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마시고 먹게 해 주지 않으니 우리들은 배고픔이 매우 심하다.

네가 빨리 주민들에게 나를 위해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게 하라. 시키는 대로 듣지 않으면 나는 옥황상제께 상소하여 7월에 태풍을 내리겠다. 하니, 저는 난처한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여 애걸하며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했고, 오래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침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신의 말을 전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노소 할 것 없이 다 반신반의했습니다. 옛당터에 제물을 차려 굿을 할 것을 서로 논의했으나 특히 관명이 두려워 감히 시작하지 못했습니다.…)라 하였다.(이도2동誌 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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