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기능 잃었던 염전 복원..동일리 날외소금밭 터(1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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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기능 잃었던 염전 복원..동일리 날외소금밭 터(1구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19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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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은 대체로 강우일수가 적고 사빈이 발달하며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 입지한다.

동일리 날외소금밭 터(1구역)

 

위치 ; 대정읍 동일리 대정서초등학교 앞쪽
시대 ; 조선~대한민국
유형 ; 소금밭

 

동일리_날외소금밭터(한라일보)

 

동일리_날외소금밭복원(한라일보)



우리나라 소금 생산은 일찍이 해수를 이용한 해염이 주를 이뤘다. 해수를 가마솥에 넣어 화력을 이용하거나 염전에서 일광에 의한 해수의 증발 과정을 통해 소금을 얻는 방법이다.

염전은 대체로 강우일수가 적고 사빈이 발달하며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 입지한다.

제주섬은 다른 지역과 달리 염전 형성이 불리한 지형으로 분류한다. 제주는 비오는 날이 많고 다량의 모래를 공급받는 전형적인 사질해안이 발달하지 못해 염전형성이 불리한 것으로 분석된다.

옛 문헌을 들여다보면 염전이 드물고 소금이 귀했던 제주섬의 형편을 말해주는 기록이 나온다. 김정의 '제주풍토록'(1520)에는 "서해처럼 전염을 만들자고 해도 만들 땅이 없고, 동해처럼 해염을 굽자고 하나 물이 싱거워서 백배나 공을 들여도 소득이 적다"고 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해안가는 모두가 암초와 여로 소금밭을 만들 만한 해변의 땅이 매우 적다. 또한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적어 소금이 매우 귀하다"고 썼다.

이런 배경에서 김상헌의 '남사록'(1602)은 제주에 언제부터 염전이 생겨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별방에서 정의까지 사이에 염전이 몇 군데 있다. 일찍이 충암록에 "땅이 큰 바다로 둘러 싸였으나 소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기에 여러 지방민에게 물어보았다. 무오년부터 강려가 목사가 됐을 때, 해변의 소금 나는 땅을 보아 잘 아는 사람을 가르쳐 육지 연해에서 바다소금 만드는 것처럼 시험해보았다. 한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 겨우 4~5두였는데 맛이 매우 썼다. 지금은 온 섬에서 일곱 군데 소금가마가 있어 충분히 관가의 주찬을 이어 댈 만하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것을 쓸 수 없으며, 모두 육지에서 사와야 한다고 했다."


늦어도 16세기 이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지역 염전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한국수산지'를 통해 구체적 수치가 드러난다. 조선총독부농상공부 편찬 '한국수산지'3집(1910)엔 그 무렵의 제주지역 염전 면적과 제염총액이 상세하다.

제주군, 대정군, 정의군으로 나눠 실린 염전수는 23군데에 이른다. 이들 염전 면적은 모두 합쳐 5만3059평(약 17만5402㎡)에 달하고 연간 생산량은 35만4326근(약 213톤)으로 집계된다.

염전평수만 따지면 종달리가 1만4357평(4만7461㎡)으로 가장 넓다. 종달염전은 연간 소금생산량도 8만9052근(53톤)으로 가장 많다.

'한국수산지' 역시 제주가 소금을 만드는 데 불리한 지형적 조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암석 사이에 다소의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래판이나 진흙땅을 가릴 것 없이 이를 개간해 염전으로 만들고 있는데, 심한 경우는 불과 1평 남짓의 공지에 염전을 만들어 '어린애 장난'같은 제염을 하는 곳도 있다고 적었다.

조사단은 "매년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론 도민 수요의 절반을 채우기에 부족하다"며 주로 진도 부근에서 소금을 들여온다고 소개됐다. 제주지역 소금 생산은 1950년대를 전후로 소멸에 이르렀다.(한라일보 2010년 6월 11일)

동일리는 일과리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일과리의 옛 이름은 ‘날외’나 ‘날래’로 불렸는데, 흔히 그곳의 염전을 지칭하는 이름 역시 ‘날외소금밭’이다. 동일리에서 만난 주민들은 동일리 소금밭도 그렇게 불렀다.

썰물이면 소라, 성게 등 바다 생물이 훤하게 드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맨 손으로 잡는다는 그곳에 염전이 있다. 마을의 노인들이 수십년간 기능을 잃었던 염전을 복원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농상공부편찬의 《한국수산지 제3집》(1910) 제주도편에 따르면 서일과·동일과의 염전 면적이 제주 지역 중에서 꽤 넓은 편인데다 연간 생산량도 평균치를 훨씬 웃돈다.

서일과의 경우 100여년 전쯤 연 12톤을 생산해냈고, 동일과는 16톤을 거둬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수산지》에 기록된 23곳의 염전 중 두 지역보다 연간 생산량이 많은 지역은 구엄, 두모, 종달, 시흥, 지금의 남원읍에 속하는 보한 등 몇몇 마을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는 제주지역 염전을 조사하면서 “전도 가는 곳마다 다소의 염전이 없는 곳이 없으며 그중 가장 넓고 완전한 곳은 종달리며 이에 버금가는 것이 시흥, 두모, 일과, 귀덕 등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해놓았다.


일과리와 동일1리 두 마을에 걸쳐 있는 날뤠소곰밧은 뻘밭형 소곰밧으로 제주도의 서부지역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고 소금 생산량도 많았다.

날뤠소곰밧은 위치상 서일과(日果)1리 염전과 동일과(東日)1리 염전으로 구성되었다. 1910년을 전후한 염전면적과 소금 생산량을 보면 서일과는 3,418평에 20,450근, 동일과는 4,428평에 26,750근으로 이를 합산하며 총면적 7,836평에 47,250근이 된다(정광중·강만익, 「제주도 염전의 성립 과정과 소금 생산의 전개」『탐라문화』18).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날뤠소곰’이라 일컬어졌으며 그 품질을 인정받아 주로 대정, 안덕, 서귀 지역으로 팔려 나갔다. 당시는 화폐보다는 물물교환이던 때라 거개가 소금 한 되에 좁쌀이나 보리쌀 두 되를 받았다.(제주의소리 110517 김순이 글)


동일1리는 2007년 서귀포시 자립형 마을육성 사업 중 한 곳으로 선정되면서 소금밭 복원을 추진했다. ‘소금밭체험관광마을’로 지역주민 스스로 소득을 끌어내보자는 취지였다. 염전에 얽힌 경험이 있는 마을 노인들이 사업을 맡았다.


이 지역의 노인들은 2008년부터 농한기를 이용해 가마솥에서 소금을 만들던 소금막을 짓고, 염수를 저장할 수 있는 물통을 제작했다. 허벅, 산태(긴 채 두 개 사이에 가운데만 가로장을 띄엄띄엄 박아 들것처럼 만든 도구), 당그네(고무래) 등 소금 생산에 필요한 각종 민구류도 수집하고 사들였다. 버려졌던 염전터를 정돈해 실제 소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600㎡ 가량의 소금밭을 복원하기도 했다.


동일리에선 모래에 바닷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어왔다. 복원된 소금밭은 염전터에 진흙을 깐 뒤 그 위에 모래를 덮었다. 모래위에 바닷물을 뿌리고 말리기를 반복하면 하얀 소금기가 생겨난다.

그것을 거둬들여 바닷물로 씻어내는 방식으로 염수를 뽑아낸다. 염수의 불순물이 가라앉은 뒤 가마솥에 넣어 5~6시간 불을 때고 졸이면 소금알갱이가 나온다.


대정서초등학교 부근엔 무성한 갈대밭이 있다. 문공일 노인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그곳도 염전이었다.(한라일보 2010년 6월 25일)


지금은 ᄀᆞᆫ물 보관통에는 풀이 자라고 ᄀᆞᆫ물을 끓이던 사각형 철솥은 녹슨 채 버려져 있다.
《작성 110505, 수정보완 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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