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동종교배는 멸종의 길? 개암나무꽃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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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동종교배는 멸종의 길? 개암나무꽃을 보며..
  • 박대문(우리꽃 자생지 탐사 사진가)
  • 승인 2021.03.2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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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의 주요 조직 인사가 동종집단으로 채워지다 보니 다양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동종교배는 멸종의 길? 개암나무꽃을 보며.

개암나무 (자작나무과) 학명 Corylus heterophylla Fisch. ex Trautv. var. heterophylla

 

시절이 춘삼월이라 여기저기 봄소식이 전해 오지만 산과 들에 푸른 빛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는 앙상한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숭숭 드러나고 넓은 벌판은 황량하고 골프장의 필드도 아직은 갈색빛입니다.

흔히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황량한 흉노(匈奴) 땅에서 고향의 봄꽃을 그리는 왕소군(王昭君)의 간절함 만큼이나 꽃을 그리는 꽃쟁이들은 이른 봄꽃을 찾아 나서지만, 아직도 밖에 나서기에는 차가운 계절입니다.

긴 겨울 동안 꽃에 눈이 고픈 꽃쟁이들은 일찌감치 발밑에서 움트는 조그마한 봄꽃들, 복수초, 노루귀, 바람꽃, 제비꽃 등을 찾아 나섭니다. 이토록 발밑의 작은 꽃까지 세심하게 살피는 꽃쟁이들조차 무심코 지나치는 꽃들이 있습니다.

이른 봄에 피는 아주 작고 꽃 같아 보이지 않는 나무꽃들이 그러합니다. 꽃이라 하면 으레 색깔이 곱고, 화려하고 모양이 크고 멋진 것으로만 인식의 틀이 고정된 눈으로는 지나치기에 십상인 꽃 중의 하나가 바로 개암나무꽃입니다.

개암나무꽃은 이른 3월에 잎보다 먼저 가지에 꽃이 핍니다.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달리지만 모양과 색깔은 사뭇 다릅니다. 수꽃은 꼬리 모양으로 꽃이 피어도 노란 꽃가루가 나올 뿐 갈색빛 나뭇가지 같은 모습은 그대로인 채 아래로 처집니다.

암꽃은 작은 겨울눈{冬牙}처럼 달리고 꽃이 피면 말미잘 촉수를 닮은 붉은 자줏빛 암술이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따라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으며 보았다 한들 꽃이라 여길 만큼의 모양도 아닙니다.

언뜻 보기에는 보잘것없지만 알고 나서 세심하게 암꽃을 살펴보면 붉은 자줏빛의 고운 모습이 보입니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암꽃과 수꽃의 위치와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에 경이로울 정도로 신비한 개암나무꽃의 생존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물론 개암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부류의 많은 식물에도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같은 가지에 피는 개암나무꽃은 수꽃이 먼저 핍니다, 수꽃은 꼬리처럼 아래로 처지고 암꽃은 가지 끝이나 수꽃의 위쪽이나 다소 떨어진 곳에 핍니다. 수꽃이 완전히 성숙하여 노란 꽃가루가 터져 나갈 때쯤에 암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자가불화합성(self-incompatibility), 즉 한 꽃에서 나온 꽃가루가 그 꽃이나 같은 가지의 다른 꽃 암술머리에 수정하는 것을 막기 위한 동종교배 방지의 메커니즘 때문입니다. 자신의 꽃가루를 받아들여 자가합성을 하면 에너지를 절약하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형질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한 가지 형태로만 번식하게 되어 극한 환경에 닥쳤을 때 다양한 유전인자를 가지지 못하여 전멸당하는 위험이 뒤따릅니다.

식물은 종에 따라 에너지 절약을 위해 손쉬운 자가합성도 하지만, 다양한 유전자 형태로 번식을 함으로써 극한상황에서의 멸종 위험을 분산하고자 합니다. 손쉬운 번식을 위한 자가합성, 멸종을 피하기 위한 자가불화합성으로 근친교배와 이종교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동종교배에 장벽을 쌓고 이종교배를 강화하여 탄탄한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만들기 위한 전략입니다. 인간이 근친교배를 막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 있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 고집이 결국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이어져 왕가가 멸망한 역사적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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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나는 개암나무 암꽃과 꽃가루가 이미 날아간 수꽃, 튼실하게 잘 맺힌 개암나무 열매

 

개암나무는 보통 사람의 키만큼 한 높이로 자라는 자작나무과(科)의 관목으로 전국의 산야에서 야생합니다. 어느 산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열매는 작은 도토리 모양으로 10월에 갈색으로 익으며 포에 싸인 열매를 ‘개암’이라 하여 날로 먹기도 합니다.

향긋한 커피와 초콜릿에도 잘 어울리는 헤이즐넛 또한 개암의 한 종류입니다. 옛날 산골 총각이 밤중에 길을 잃고 빈집에서 잠시 쉬는 동안 도깨비 무리가 나타나자 숨어 있다가 배가 고파 낮에 산에서 주운 호주머니의 개암 열매를 꺼내 깨무는 ‘딱!’ 소리에 도깨비들이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 속의 ‘개암’이 바로 개암나무 열매입니다.

이처럼 어느 산에서든 흔히 만날 수 있고 전설에도 등장하는 친근한 개암나무인데도 그 꽃을 보았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꽃으로는 관심 밖의 나무인 셈입니다. 이 나무가 자가불화합성이라는 동종교배 방지의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난 이후부터 개암나무꽃을 경이(驚異)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같은 꽃 또는 같은 가지에 달린 꽃이지만 멸종의 길을 피하고 후대의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동종교배의 열성화를 방지하기 위한 식물의 노력은 신비할 만큼 다양합니다.

수술과 암술이 시차를 두고 성숙하거나 수술과 암술머리의 길이가 서로 다르거나 꽃이 피는 위치가 서로 다릅니다. 이뿐만 아니라 꽃의 배치, 색상, 크기, 모양, 향기의 차별화가 모두 번식을 위한 매개 곤충의 유인과 이종교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동종교배의 종말적 비극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직 등에도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경우로는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멸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식물의 경우는 우리 주변의 개나리가 그 예라 하겠습니다.

개나리는 동종교배를 방지하기 위해 암술머리와 수술머리의 높이가 서로 다릅니다. 즉 자웅이위(herkogamy)입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집단으로 심어진 개나리는 사람에 의해서 같은 나무를 대량으로 삽목해서 번식한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유전자가 동일한 종들입니다. 유전자가 동일한 종 사이에는 수분(受粉)이 되어도 수정관(pollentube)을 내지 않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변의 개나리가 봄이 되면 무더기로 꽃을 피우지만 대부분 씨를 맺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튼튼한 후세를 이어가고 멸종을 방지하기 위한 개암나무꽃을 보며 우리 사회를 생각해봅니다. 흔히 정치는 ‘움직이는 생물’이라 합니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한 사회 변화에 신속히 대처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생물이 복잡한 구조 가운데 다양한 유전자를 지님으로써 극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듯이 다양한 생각과 집단이 있어야 사회 조직도 위기 상황에서 종말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 정치는 지나치게 이념과 성향이 편향적인 동종 패거리로 뭉쳐 있습니다.

정치, 사회의 주요 조직의 인사가 동종집단으로 채워지다 보니 다양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보입니다. 중차대하고 긴박한 상황에 대처해야만 하는 주요 인사가 바뀌어도 한결같이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물론 같은 집단의 입장에서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쉽고 편리한 방법이겠지요.

그러나 한쪽으로만 치우친 자가(自家)중심의 사고로 다양하게 급변하는 제반 상황을 어찌 대처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볼품없어 보이는 쪼매한 개암나무꽃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급변하는 세상사의 흐름에 생존할 우리의 대처 방안이 어설퍼 보이기만 하니 안타깝습니다.

(2021. 3월 개암나무꽃을 보며)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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