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고득종이 살았던 터라고 전해지는..이도1동 귤림서원(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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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고득종이 살았던 터라고 전해지는..이도1동 귤림서원(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4.0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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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림서원은 제사기능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된 서원이다

이도1동 귤림서원(복원)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
시대 ; 조선(1667)
유형 ; 교육시설

이도1동_귤림서원
이도1동_귤림서원복원

 


귤림서원은 제사기능을 가진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을 가진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이중신(李重信)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으로 재임 중인 최진남(崔鎭南)이 현종6년(1665) 6월에 가락천 동쪽에 있는 충암 선생의 묘(沖菴廟)를 찾아 참배하였는데 이 때 동우가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또 그 장소가 협소한 데다가 향교의 신문 밖에 위치해 있어 서원을 세워 장수하는 곳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1667년 8월에 장수당(藏修堂) 남쪽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원래 이곳은 고득종이 살았던 터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을 역사에 동원하기가 어렵게 되자 내왕하는 상선에 양식을 지급하여 주변 도서에서 재목을 벌채하여 바다로 띄워 오게 하였고, 역군은 영(營)·목(牧)에 번을 서는 자 가운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 지내는 사람을 뽑아 양식을 지급하고 고용하였다.

이는 재물을 모아 실업자를 구제하는 일거양득의 처사였다. 이리하여 건물은 공역(工役)을 시작한 지 한 달만에 완성되었는데 이 때에 그 현판을 내걸어서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하였다. 현재 최진남이 지은 「충암묘 이건기(沖菴廟移建記)」가 전해진다.


이리하여 명실공히 사(祠)와 재(齋)의 2기능을 갖춘 서원이 처음으로 제주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임원은 원장 1인, 유사 2인, 묘지기 14명 정도였으며, 서원에 입학한 유생은 따로 원적(院籍)에 기록하고 이들로 하여금 학업에 열중하게 하였다.

『탐라지초본』제주목 학교조에는 훈장 1인, 장의 1인, 유사 2인, 부름접생 20인이라고 되어 있다.(1999년 제주교육사) 인원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 때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현액하였는데 귤림서원의 액호를 선포하는 과정 즉 사액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숙종1년(1675) 9월25일 조에


〈부호군 이선(李選)이 제주도를 순무하고 돌아와 섬 안의 폐막 40조를 올리며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문간공 김정(金淨), 문정공 김상헌(金尙憲), 문간공 정온(鄭蘊)은 혹은 편배(編配=流配)로 혹은 봉사(奉使=牧使)로 전후하여 제주도에 들어왔는데 김정은 예전에 사묘가 있었고, 그 뒤에 김상헌과 정온을 여기에 추향하였다.

그런데 목사 이인(李璌)이 그의 조부 이약동을 사림들과 의논도 없이 3현의 위에 배향하여 3현을 욕되게 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세 신하의 서원도 액호를 선포하도록 하십시오’하니, 왕이 비변사에 내렸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사액은 중한 일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고 이인이 그의 조부를 세 신하 위에 둔 것은 사사로운 정분에 따라 망령되게 한 자취가 없지 않으니 위판을 철거하도록 하십시오’ 하므로, 왕이 이를 윤허하였다.〉


고 한 기록이 있으며, 이어서 조선왕조실록 숙종8년(1662) 6월23일 조에는


〈제주 유생이 문간공 김정과 참판 정온은 일찍이 이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고 문간공 송인수는 본주의 목사를 지냈으며 문정공 김상헌은 순무어사로 섬에 들어왔었다는 이유로 네 신하의 서원을 창건하고 상소하여 사액을 청하니, 당해 관청에서는 중첩하여 설치했다는 이유로 전례를 들어 방계(防啓)하였다. 이에 김석주(金錫冑)는 ‘네 신하 모두 문학과 명절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 밖에 사는 사람들이 가상하게도 존경하고 사모할 줄 아는 것이므로 육지 근방에 부산하게 중첩으로 설치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사액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숙종21년(1695) 2월 11일에는 제주 유학 김성우(金聖雨)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을 귤림사에 합향(合享)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당해 관청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현을 모두 모시게 된 것은 숙종21년(1695)이므로 약 120년에 걸쳐서 결정된 것이다.(1999년 濟州敎育史,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그 뒤 철종1년(1850) 장인식 목사는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고종8년(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귤림서원이 철폐되면서 여기에 배향되었던 오현에 대한 제사도 일시 중지되었다. 귤림서원이 철폐되자 여기에 속했던 폐장과 채전 등이 모두 영진고(營賑庫)로 이관되었으며, 학생들은 향교의 계성사로 옮겼다.


그러나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하여 고종29년(1892)에 오현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마련되면서 오현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귤림서원이 자리했던 곳이 제주도민들에게 귤림서원 터로서보다는 오현단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1999년 濟州敎育史,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탐라기년》에 따르면 귤림서원 터에는 고종12년(1875) 봄에 이희충 목사 때에 이조현(李朝鉉) 판관에 의해 경신재(敬信齋)가 세워졌다. 그리고 다음해 11월에는 경신재를 운영할 재원으로 〈삼소폐장획급절목(三所廢場劃給節目)〉을 만들어 주었다.

이 절목(시행 세칙)에는 순조11년(1811)에 ‘조정철이 고을에 부임했을 때 7소 폐장을 떼어 붙인 뒤 헌종15년(1849)에 장인식 목사가 다시 3소 폐장의 15섬지기의 땅으로 바꿔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원래는 7소 폐장을 떼어주었던 것을 3소 폐장으로 바꾸어 주어 경신재의 재원으로 떼어준 것인데 3소폐장은 원래 귤림서원에 떼어 주었던 것이다. (1999년 濟州敎育史)


1892년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5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이후 133년 만인 2004년 10월에 복원됐다. 그러나 작은 한옥 한 채에 바짝 붙여 두른 울타리, 장수당이라는 건물뿐이다. 적어도 ‘서원’을 복원한다면 ‘서원’에 맞는 규모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충암묘(沖菴廟) ;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뒤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선조11년(1578) 임진(林晋)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후가 가락천(嘉樂川) 동쪽에 지은 사당이다. 충암묘(沖菴廟)는 귤림서원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장수(藏修) ;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배움에 있어 생각하고, 익히고, 쉬고, 논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遊焉.〕”라고 하였다.


※부름접생 : 부름이란 관부에서 공급하는 양식이란 뜻이고 접생(居接生)은 학생이란 뜻이므로 부름접생은 제주목에서 경비를 조달하는 학생(기숙사형 생도)이다. 동기생들을 同接, 대표자를 接長이라 불렀음.


※선정(先正)은 돌아간 유현(儒賢)으로 문묘에 배향된 사람을 말하며, 임금 앞에서 선정을 이를 때는 선정신(先正臣)이라고 한다.


※이약동은 뒤에 영혜사에 봉안되었다.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


※회계(回啓)=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일.
※방계(防啓) = 남이 세우는 의견을 막아 아룀


※숙종즉위년(1674) 2차 예송(禮訟) 때 남인과 제휴하여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 산당(山黨)을 축출하였으며, 그 후 각 조 판서와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지냈다. 외척(外戚)의 중심 세력으로 왕의 측근에서 정치를 행하면서 사실상 숙종 전반기에 정국을 주도하였다.


※영진고(營賑庫) = 진휼곡을 보관하는 관아의 창고. 진휼창(賑恤倉)·영진창(營賑倉)·영진청(營賑廳)이라고도 불렸다.


※계성사(啓聖祠)는 5성(聖)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제향된 위패는 공자(孔子)의 아버지 제국공 공숙량흘(齊國公孔叔樑紇), 안자(顔子)의 아버지인 곡부후 안무유(曲阜侯顔無繇), 증자(曾子)의 아버지 내무후 증점(萊蕪侯曾點), 자사(子思)의 아버지 사수후 공리(泗水侯孔鯉), 맹자(孟子)의 아버지 주국공 맹격(邾國公孟激)이다.

제주향교의 계성사는 처음에 김몽신·김영업·신상흠 등이 몇 차례 상소하여 계성사의 건립을 요청하였었는데 1854년 가을에 이르러 또 유생 고사징(高泗澄)이 요청하자 당시 영의정 김좌근이 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얻어 세우게 되었다.


※이조현(李朝鉉)은 조선 고종 때의 제주판관이다. 고종11년(1874) 5월, 김기홍(金基洪)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876년 7월에 좌천되었다. 당시 제주목사는 이복희(李宓熙)와 이희충(李熙忠)이다. 재임 중 1875년 봄에 경신재(敬信齋)를 장수당(藏修堂)의 옛터에 건립, 자제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마련하였다.(제주도청/제주의 역사인물)


※조정철 :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정조1년(1777) 강용휘(姜龍輝) 등이 정조를 시해하고 그의 이복동생을 옹립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우의정 조태채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정조5년(1781)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던 소론의 김시구(金蓍耉)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조정철을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죄목을 캐기 위해 염탐하던 중, 귀양지에 홍윤애(洪允愛)가 출입하는 것을 알고 그녀를 잡아다가 음모 여부를 문초하였다.

그러나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고 끝내 죽음으로 조정철을 변호하였다. 조정철은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무혐의가 밝혀졌고, 정조6년(1782)에 정의현 김윤재, 김응귀의 집으로 귀양지를 옮겼으며 정조12년(1788) 나주로 유배지를 옮겼다.

정조14년(1790) 9월 추자도로 이배되어 13년을 보냈으며 순조5년(1805) 유배가 풀렸다. 순조9년(1809) 관직에 다시 기용되어 정언·동래부사 등을 거쳐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좌참찬·대사헌·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순조11년(1811) 제주목사에 부임하자, 자신을 위해 죽은 홍윤애를 기리고 홍윤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만났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110622, 보완 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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