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오현단 부근 금강사 유배..이도1동 충암 김선생(김정)적려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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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오현단 부근 금강사 유배..이도1동 충암 김선생(김정)적려유허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4.0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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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金淨)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도1동 충암 김선생(김정)적려유허비
 

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1 오현단 안

이도1동_충암적려비뒷면
이도1동_충암적려비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金淨)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성종17년(1486) 충북 보은 태생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고봉(孤峯)이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으며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다.

사림파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했고, 왕도정치를 실현 및 치지주의(致知主義)를 실현하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削除) 등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이처럼 빠른 정치적 성장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중종15년(1520) 8월 제주도에 옮겨졌으며, 지금의 오현단 부근 금강사에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에 연루되어 생존자 6인과 함께 사약을 받고 사사될 때까지 거의 1년여 동안 적거하면서 제주향교 교수 김양필과 유생 문세걸 등 제주 유림들에게 학문과 제사의 예법을 가르쳐 주었고, 음사를 숭배하는 악풍을 교도하였다.

또한 「한라산 기우제문」과 「수정사 중수기」 등의 제문과 많은 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김정이 저술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당시의 제주 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시문에 능해 유배생활중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특히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자고 읊을 뿐 지방마다의 생활풍속은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인종1년(1545)에 복관(復官)되었고, 인조24년(1646)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보은의 상현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충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었으나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다음백과사전)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김정의 사후 3백여 년 뒤인 1852년에 세운 것으로, 제주에서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는 귤림서원 묘정비(1850)가 세워진 뒤이다.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비신이 동강나서 아래쪽은 유실된 상태이다. 이 때문에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전면의 너비가 73㎝, 두께가 23㎝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200㎝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각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지금은 비신마저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비명도 하부의 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전면에는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라고 쓰여 있고, 후면에는 유실된 글자가 많아 정확한 뜻을 해독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목사로 재직하던 백희수가 1852년 11월에 김정이 살았던 집터에 유허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글을 쓴 사람은 판관 임백연이다.

(城東南隅 嘉樂川之邊 有井曰判書井 卽(先生) 謫居之遺墟也 井則有碣 墟則無碑 歲月(玆久 廬)有遺躅之湮沒 命院儒姜埼奭幹事 伐石(而竪 連)閣而庇 以寓慕賢之意 噫 先生之名德(事實 畧) 載於萬曆[代]戊寅立廟[記] 今不贅擧云爾 上之三年壬子十一月日 牧使白希洙識 判官任百淵書)


적려유허비를 세운 경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79년 9월 26일 제주도에서 새로 세운 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비는 충암 선생이 적거했던 제주시 일도2동 가락천 동쪽에 세웠던 것으로, 그 후 비신 하부가 파손된 상태로 1백여 미터 거리인 이곳에 옮겼던 것을, 이번 선생의 16대 종손 김원식(金元植), 13대손 김병모(金秉模)와 김기봉(金基鳳) 등 여러 후손의 추진으로 다시 복원하여 세우게 된 것이다. 1979년 9월 26일, 제주도”


그가 배향된 건 선조11년(1578) 제주판관 조인후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선조 때라는 점이 주목된다. 서원은 사림이 처음 중앙정계에 진출하던 중종 때부터 건립되기 시작해서 그들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던 선조 때에 와서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현 중 첫 번째 인물인 김정의 사당이 만들어진 게 바로 그 때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영권)


원래 오현단은 충암(沖菴) 김정(金淨)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암묘(沖菴廟)를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조선조 선조 11년(1578) 임진(林晋) 목사 당시 제주 판관 조인후(趙仁後)는 김정(金淨)을 봉향하기 위해, 가락천(嘉樂泉) 동쪽에 충암묘를 세웠는데, 묘기(廟記)를 지은 사람은 임진(林晋) 목사의 아들인 조선조 시문(詩文)의 기재인 시객(詩客) 임제(林悌, 1549-1587, 호 白湖, 자 子順)였다. 임제는 선조 9년(1576)에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대과(大科)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을 했으나, 조정에서 격심한 당파 싸움을 일삼는 것을 보고 그만두어 귀향하고는, 바로 부친이 부임해 있는 제주로 내려와서 제주도를 두루 유람하고, 남명소승(南溟小乘)을 짓기도 했으며 제주를 소재로 한 많은 시편을 남겼는데, 제주는 그가 일생을 방황한 최초의 시발지였던 셈이다.

 

그 임제(林悌)가 지은 충암묘기(沖菴廟記)는 다음과 같다.


충암묘기(沖菴廟記)


「옛날에 사(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공(功)이 보답을 받을 만한 사(祠)와, 덕(德)이 세상에 경계할 만한 사(祠)이다.

그러한 사(祠)는 무릇 영원히 경모(敬慕)함을 일게 하고, 그 영령(英靈)의 깨끗하고 맑음을 천추토록 제사를 모심은 당연하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 살고 그 죽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선생은 중종(中宗) 때 이 주(州)에 유배왔다가 얼마 안되어 사사(賜死)되셨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59년, 바로상감께서 즉위하신 11년이다. 사문(斯文․주:조인 후의 號) 조후(趙候․주:侯는 고관의 뜻)가 이곳 판관이 되어 폐단을 고치고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내고 왕의 가르침을 크게 일으켰다.

마침내 이 고장 노인에게 물어 선생의살았던 터가 성안 동남쪽 구석에 있다는 것을 알고, 관아 일을 마친 틈에 막대 짚고 짚신 신고 가서 보고는, 마음 아파 슬퍼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공자와 맹자를 쫓아 배워 화려한 훈작을 취소하려 뜻하다가, 뜬 구름이 태양을 가리므로 나그네가 되었다가 돌아가지도 못하고 변방의 고장에 뜻을 남기고 갑자기 절명하셨다.

그러나 색다른 풍속은 어리석기 그지없어 추모(追慕)할 줄도 모르고, 차귀당(遮歸堂․주: 한경면 고산리에 있던 서낭당), 광양당(廣壤堂․주: 제주시 이도동에 있던 서낭당) 같이 다만 음산한 귀신 사당이나 숭상하니,이는 다만 이곳 백성들의 불행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 도(道)의 불행인 것이다.

하물며 선생이 의(義)에 따른 인(仁)에 살아 덕(德)에 이르렀음에야 나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우둔한 사람을 살피게 했으니 공(功)도 또한 크다.

공(功)도 있고, 덕(德)이 있으니, 제사를 모실 만하다"고 하였다. 마침내 절제사(節制使․주: 林晉)와 의논하여 장인을 빌고 제목을 모아 묘(廟) 세 칸을 세우고 잠깐 몇 달이 지나가 붉은칠을 곱게 하고 담장을 두르니, 마치 바닷가에 서 있는 백마(白馬)를 방불케 하였다.

그 상이 후(侯)는 이후에 노(奴)한 사람을 묘지기로 삼고, 또한 주(州)의 향교에 곡식 약간을 두어 해마다 백성에게 이식을 받아 제사비용의 자금으로 쓰게 하여 봄, 가을에 제사향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후(侯)의 뜻이 부지런하다 하겠다. 아아 ! 기묘(己卯)의 참혹한 화를 차마 말을 하겠는가. 승냥이와 이리가 입을 뭉그리고, 도깨비들이 북을 치고 요란을 떨며 임금을 속였으니, 혈육과 같은 착한 무리는 쇠퇴하여져, 을사(乙巳)의 변에 이르러서는 사림(士林)이 전부 비어 버려, 거의 우리의 도(道)가 아주 막혀 버렸다.

하늘의 운세가 좋게 돌아와 작은 것은 가고 큰 것이 오고, 맑은 여론은 꺼지지 않아, 임금께서 도모하시기를 죽은 자나 산자를 가리지 않고 부월(斧鉞)을 가하셨다.

이 묘(廟)를 세우는 것은 참으로 늦출 수가 없다. 그러므로 후(侯)가 명성 있는 가르침을 외딴 고장에 심음은 더욱 중하게 여겨지니, 후(侯)가 하는 일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아 ! 선생의 몸이 한번 죽으니 도(道)가 한번에 불운해 버렸고, 선생의 묘(廟)가 한번 세워지매 도(道)가 한번에 태안해 지리니, 이것이 어찌 살고 죽음이 운명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후(侯)의 이름은 인후(仁後)여, 자는 유천(裕天․주: 호는 斯文)이니 평양 사람이다. 금성(錦城) 임제(林悌)는 절제사 영(營)에 아버님을 뵈러 왔다가 큰 역사를 보게 되어 후(侯)의 뜻을 기린다.

그리고 다시 후(侯)의 하명이 있었기에 이미 기(記)를 쓰고, 또한 노래를 불러 사당에 바친다. 때는 만력무인(萬曆戊寅․주: 선조 11년, 1578)이다.

노래에 말하되,


푸른 술과 노란 귤
산물과 산나물이라.


내 마음 깨끗이 멀리 바라보니
연파(烟波) 아득히 수심에 잠기네.


그대의 숭고함과 드높은 영혼.
푸른 교룡 끄는 구름수레 타셨네.


한껏 웃음 펴고 묘(廟)에 들으사
타는 향 연기 자욱히 퍼지네.


고향에 남긴 긴 이별의 말
나라를 떠나던 애끓은 유언


바람과 우레처럼 만리를 달리시니
번쩍하는 사이 한번에 가고 오시네.


남녘 바다 가라 앉혀 물길 안정시켜
배들 잘못되지 말레 하소서.


평생처럼 화기(和氣)를 일으키사
해마다 풍년들면 백성이 즐거우리.


영령께서 집에 계서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대대로 복을 주소서.


옥가지 꺾어 드리고자 함은
순(舜)임금 같은 이 가버렸음 애도함이라.


공(公)을 그리워함 이미 말로 다 못해
포구끝 바라보니 수심 띈 구름뿐이네.」(오현고등학교 홈페이지)

 


김정의 묘는 충남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 있었으나 1978년 대청댐 공사로 그곳이 수몰되면서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268-5번지로 옮겨졌으며 1991년 7월 10일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부인은진송씨정려문도 있는데 송씨부인은 진사 송여익의 딸로 남편이 사사되자 같이 세상을 떠나려 했으나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있어 자결하지 못하고 효도로 부모를 공양했다. 이후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8일 동안 음식을 전폐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현장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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