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바람을 관측하는 곳..조천리 조천관터(김태호, 김시용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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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바람을 관측하는 곳..조천리 조천관터(김태호, 김시용 고택)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4.2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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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용은 김문준·강창보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순국한 항일공산주의자 제주가 낳은 3걸이라 할 만하다.

조천리 조천관터(김태호, 김시용 고택)

 

위치 ; 조천읍 조천리 2664번지(조함해안로18-2) 김세혁씨 집
시대 ; 조선
유형 ; 관아터

김시용(독립운동_조천리)
조천리_조천관터



과거 내륙을 왕래하는 제주의 관문은 산지포, 조천포구와 화북포구가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중앙이나 지방 관리들이 공무로 출장을 다닐 때 머물며 숙식하던 관아 건물이 있었다.

특히 조천은 육지를 오가는 배가 출항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 조천관이 세워졌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조천관을 세웠다는 것이 가장 오랜 기록이다.

아마도 왜구가 창궐하여 이들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중창기에 의하면, “조천관은 바다 어귀에 있는데,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바람을 관측하는 곳이다.  조천(朝天)이라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이 부임한 다음해 경인년(庚寅年)에 막부(幕府)의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두게 된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은 사신들이 왕래하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해서야 되겠는가, 어찌 농사를 짓는 틈틈이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휘하에 명을 내리니, 전 부장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여러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월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 고 하였다.

이 기록은 조천관을 주어로 썼으나. 이곳 조천관 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조천진에 관한 기록이다.


현장의 안내판에는 조천관은 〈육지를 왕래하는 명사나 귀빈들이 머무르거나, 제주산 마필 등 조공품 또는 생활필수품을 육지로 보낼 때 공무를 보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부산·인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관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제주의 세 고을에서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조천관에서 바람을 기다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에는 고려 중엽 전국에 인천관, 부산관, 제주에 조천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부의 표해록을 보면 그가 제주에 도착할 때 1488년 11월 12일 조천관으로 들어왔다.(표해록) 1577년 11월 9일 임제가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만나러 올 때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조천관을 소재로 한 김상헌의 칠언율시, 정온의 칠언율시가 전한다.


이 집은 1920년 제주도해녀조합 창설의 일등공헌자인 조천면장 김태호의 집이다. 김태호의 아들 김시용은 항일야학운동, 소비조합운동을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직전 옥사하였다. 조천관 처소이면서 김태호·김시용의 항일정신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은 일제 강점기 제주에 거주하고 있던 해녀, 사공을 조합원으로 하여 제주도 일원을 대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던 수산 단체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 연안에 살고 있던 부녀자의 대부분은 연안 어장에서 어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들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으로까지 출어하면서 제주도의 경제 발전 및 어민 생활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해녀의 모집 및 감독 업무를 담당하는 객주에 의한 피해 사례들이 속출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김태호를 비롯한 제주도 내 유력 인사들이 1917년에 제주도 해녀 어업 조합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고 1920년 4월 16일에 조합의 설립 인가를 받았다.

제주도 내에 살고 있는 해녀는 물론 출가한 해녀의 구제와 보호, 복리 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36년 12월에 추자도 어업 조합을 제외한 제주도 내 어업 조합과 해녀 어업 조합을 통폐합한 제주도 어업 조합이 조직되면서 제주도 해녀 어업 조합은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당시 제주도 해녀 어업 조합이 시행한 주요사업으로는 조합원의 어획물을 도내와 도외로 구분하여 판매하는 공동 판매 사업, 조합원 또는 그 가족이 조난을 당하였을 경우 조합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난 구휼 사업 등이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 출신자 중 타지방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보조해 주는 학자금 보조 사업 등을 펼쳤다. 이외에도 점차 조합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의약의 보급, 순회 진료, 우수 해녀의 포상, 장학금의 보조 등 조합원을 위한 사업들이 점차 확대되었다.


※김태호(金泰鎬 1880∼1942)는 제주해녀조합 창립자, 교육사업가, 조선해조주식회사 창설자이다. 호는 사전(舍田). 본관은 김해.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인 고유흠은 항일운동가 고순흠의 누님이다. 융희4년(1910) 나라를 잃게 되자 교육입국을 주장하여 조천리에 신명사숙을 개설(이 때 친족인 金思鎬가 교지를 희사함)하여 이 지역 개화인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또 이로 인해 1919년 조천공립보통학교의 개설 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리어 조천리민이 세운 김태호와 김사호의 창교기념비가 조천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1920년에는 제주해녀조합 설립 발기인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는 경상남도에 출가중인 제주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부산의 해조물 무역상들이 조선해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주 해녀의 생산물을 착취하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출가 해녀들이 경상남도 지역민들과의 충돌이 빈번하여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합원은 8000명에 이르고 1년만에 40,000엔을 은행에서 기채하여 조합원에게 대부하는 등 사업 장려에 힘을 쏟은 결과 매년 다른 지방으로 출가하는 해녀가 3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23년에는 제주노동공제회 이사로 불우하고 빈곤한 계층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조천면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아들의 항일활동으로 1926년 5월 자진사퇴하였다. 1929년 조천교 학무위원으로 비역 발전과 교육 후원에 앞장서는 등 언제나 주민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하여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42년 그가 타계하자 조천리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어 연북정 앞 비석거리에 〈사전거사김공태호기념비〉를 세웠다.


※김시용(金時容 1906∼1945)은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본관은 김해. 아버지 김태호(金泰鎬), 어머니 고유흠(高柔欽)의 큰아들로 조천리 2666번지에서 태어났다. 외숙부는 제주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 사상가 고순흠(高順欽)이다.

1925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하여 김시균(金時均)·김성온(金成溫) 등과 함께 오일회(五一會)를 조직하고 노동 야학을 운영하였다. 이 해에 제주도의 첫 사상단체인 〈신인회(新人會)〉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부친이 설립한 조천의 신명의숙(新明義塾)을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 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재일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일본부에 입당하였다. 1928년 7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강연대에 동참하여 경상남도 일대를 순회, 강연하였다.

건강 악화로 귀국한 후에는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재일조선청년동맹 기관지《조선청년》에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을 논박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가 같은 해 8월 18일 도쿄구 재판소에서 소위 신문지법 위반으로 벌금 100원을 선고받았다.

1930년 12월 부산으로 들어와 국제적색노동조합 조선협의회 부산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공장사를 조직하였다. 이는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한 지역 차원의 혁명적 노조이다. 1931년 5월 부산에서 조선방직 외 여러 공장의 메이데이 총파업을 주도하였고, 부산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이로 인해 1931년 11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제주로 귀향하여 아버지가 경영하는 비료상 및 해운업에 종사하면서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7년 8월에는 혁명적 제주도 농민조합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순국한 부생종(夫生鍾)의 공적을 기리어 추모비 건립에 앞장섰으며, 조천공립보통학교 학생 70여 명에 대한 의식계몽강습회를 계획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제가 각종 부담금을 부가하고 군수 물자의 공출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며 반전(反戰)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9월에는 일제의 경방단(警防團)에 반대하여 조선 청소년을 대상으로 거부 운동을 펼쳤다. 1938년 중일전쟁의 전황에 대하여 일본에 유리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중국군의 유격전과 장기전 전략에 따라 계속하여 일본이 패퇴할 것이라는 내용의 주장을 펼쳐 독립의식을 고취시켜 나아갔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 326번지에서 목재 제재업을 하던 곳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육군 및 해군 형법 위반으로 금고 1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7월 23일 18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형무소에서 옥중순국하였다. 유해는 목포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가 1945년 11월 조천면 11개리 공동 주최인 조천면민장(面民葬)으로 치러졌다.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시용은 김문준·강창보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순국한 항일공산주의자로서 제주가 낳은 3걸이라고 할 만하다. 아들은 중등교장 김세혁이다.(제주투데이 110227, 제민일보 110425, 제주의소리 161004 김관후 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인물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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