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애월 출신 위미초 초대교장..위미1리 이관석교장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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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애월 출신 위미초 초대교장..위미1리 이관석교장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5.10 0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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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었던 것을 꺼내어 다시 세운 것은 1973년이다.

위미1리 이관석교장기념비

 

南湖先生李琯石記念碑

위치 ; 남원읍 위미1리 3235번지 위미초등학교 운동장 동쪽
유형 ; 비석(기념비)
시대 ; 1946년

위미1리_이관석교장기념비 전경.
위미1리_이관석교장기념비


비문은 다음과 같다.


本校成績 南州屈指 본교에서 이룬 업적은 남주에서 손에 꼽는다.
增築延長 高想特異 (건물)증축하고 (운동장)연장하니 높은 생각이 특별하고 남다르다.
莫重工事 有終如始 막중한 공사를 처음 (마음)같이 끝맺음을 두니
三里同心 萬人仰視 삼리(위미, 신례, 하례)가 같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네.
是誰之功 是誰之智 이것이 누구의 공이며 이것이 누구의 지혜인가!
永所難忘 先生德義 영원히 잊기 어려운 바가 있으니 선생의 덕과 의로움이라.

(해석 ; 삼성여고 교사 김태국)

좌측면에는 檀紀四二七九年丙戌春 爲美 新禮 下禮 一同라고 하여 건립날짜와 건립주체를 밝혔다.

1910년대 신교육이 제주에 보급돼 전통적인 서당교육이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다. 재래식 서당교육과 구별되는 개량서당이 속속 등장해 근대학교 태동의 근간이 됐다.

개량서당은 신교육을 받은 교사와 근대 교육 교과를 도입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 교육의 장 역할을 했다. 개량서당이 증가하자 일제는 1918년 '서당규칙'을 제정해 통제에 나섰다.

1929년에는 개량서당 설립을 도지사 인가제로 개정해 설립을 어렵게 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위미리에 개량서당인 인명사숙이 설립된 것은 1925년이다. 신식교육기관인 인명사숙은 1938년 문들 닫을 때까지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등의 학생들에게 신교육을 전파했다.


개량서당 인명사숙이 문을 닫자 위미리 학생들은 일제의 1면 1교제에 의해 1924년 남원에 설립·개교된 서중공립보통학교(현 남원초등학교)에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먼 거리의 보통학교에 2세를 보내야 했던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3개 마을 주민과 유지들은 기성회를 조직해 자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 운동에 나섰다.


마을 유지들은 제주도청을 찾아 서중공립보통학교 야아베 교장, 도사(현 도지사, 당시는 일본인) 등이 참석한 한 가운데 학교 부지를 마련한 후 학교시설을 마련하면 학교 설립을 승인하겠다는 조건부 승낙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3개 마을은 합동 회의를 열어 학교 부지는 위미리가 책임을 부담하고 학교 건물 건축과 이에 따른 예산과 인력은 3개 마을이 함께 충당하기로 함으로써 결국 학교 설립의 꿈을 이뤄냈다.


마을지인 '위미리지'를 보면 "교사부지와 운동장 정리 및 축장 조성에 부역을 제공했는데 당시 장비는 재래식 도구인 지게, 따비, 골채 등이었다. 150여일간의 건축에 동원된 연인원도 1만5000여명에 이르는 각고의 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미공립심상소학교(현 위미초등학교)는 1939년 5월 1일 설립 인가돼 이해 6월 1일 초대 교장에 이관석을 임명해 개교했다.(제민일보 110627)


1998년 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개교 60년 성장의 보람탑'에는 "우리 학교는 일제 말기 공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2세들을 위하여 위미, 신례, 하례 3개 마을 주민과 유지들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9년 5월 1일 위미공립심상소학교로 인가를 받아 1939년 6월 1일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 남호 이관석 선생과 김상옥 기성회장을 비롯한 3개 마을 유지와 1100세대 주민들이 학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뜻을 모아 113일간 연인원 124,000명의 노력봉사로 비탈진 땅을 정리하여 교실을 신축함으로써 오늘의 아름다운 학교로 성장시킨 초석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관석은 애월리 출신으로 1939년 6월 1일 위미초등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여 1945년 11월 29일까지 근무하였다. 황무지와 같았던 부지를 닦고 건물을 세워서 이 지역의 교육에 기여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공로를 인정하여 1946년에 기념비(공로비)를 세웠다.


그런데 4.3 발발 후인 1948년 10월 31일 제주중학교 제2대 교장으로 재직중이던 이관석은 경찰에 의해 제주읍 사라봉 인근에서 즉결처형되었다. 위미리 지역 주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학교에 세웠던 이관석 기념비를 땅 속에 묻어 버렸다.

이관석 선생은 처음 초대 교장으로 와서 환경도 아주 조건이 좋지 않았는데 무척 고생하면서 부지를 다듬어 좋게 학교를 지었어요. 그 공으로 마을에서 위미, 신례, 하례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서 공로비를 세웠는데 제주시 학무과장 지금의 교육감 수준인데 그 사상관계가 있다고 해서 안 좋게 죽으니 그 비석도 영향을 받아서, 왜 그런 사람 비석을 세웠냐고 하면 할 말이 없으니, 묻었다가 다시 꺼내서 그것을 그대로 세웠어요.(위미리 현봉협 2004년 80세) 묻었던 것을 꺼내어 다시 세운 것은 1973년이다.(제주4․3유적Ⅱ 290~291쪽)


잘 다듬은 돌로 기단을 쌓았는데 기단 가운데에 위아래로 길쭉하게 글을 새겼던 흔적이 있다. 어떤 내용을 훼손해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이관석 교장은 제주동초등학교의 제3대 교장으로도 재직(1946.01-1946.12)하였다.
《작성 110815, 보완 121206, 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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