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한남리 의귀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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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한남리 의귀원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5.14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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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동원, 서원, 의귀원, 중문원, 하원, 동제원 등 여러 곳에 있었다.

한남리 의귀원터

 

義貴院址
위치 ; 남원읍 한남리 2-3번지. 의귀리사무소 앞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서 왼쪽에 놓인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계속 가면 길 가운데에 팽나무가 서 있다. 그 팽나무에서 50여m 가면 길 오른쪽으로 굴렁진(길보다 낮은) 귤밭. 지번은 한남리이지만 마을로 보면 의귀리에서 가깝다.
유형 ; 관청 터
시대 ; 조선

의귀리_의귀원터

 


원은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나, 주로 조선 세조 때부터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하여 역과 역 사이의 중요한 곳에 설치한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으로서 처음에는 관원만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일반 나그네도 이용하였다.

각 원에 원주를 두고 원주전도 따로 나누어 주었으며, 스님을 원주로 삼은 곳이 많았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에 1310개소에 원이 있었다고 하며, 제주에는 동원, 서원, 의귀원, 중문원, 하원, 동제원 등 여러 곳에 있었다.


이원조의 탐라지초본 정의건치연혁 山川조 및 도로 院 站附조에 〈수망천은 정의현청에서 西로 30리에 있다 하였고, 같은 거리상에 義貴가 있고 그곳에 院站 ‘義貴院’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읍(城邑)에서 의귀원(衣貴院), 위미리 대성동과 예촌을 거쳐 서귀포시 중산간의 영천관(靈泉館)에서 남하하여 서귀포 포구까지의 길을 ‘원님도로’라고 부른다. 이 길이 아마 70리가 될 것이다.


2002년 4월 13일 한남리 거주 故오영욱(吳永旭. 1913年生)씨 증언에 의하면 이 밭에 원집이 있었다고 한다.

의귀원에 대한 옛기록으로는 김성구의 남천록(南遷錄)이 있다. 김성구는 숙종5년(1679) 6월에 허목의 대차사건에 연루되어 정의현감으로 좌천되고 난 후 3월 12일부터 1679년 1월까지 현감으로 있으면서 군사, 진상, 형승 등에 대한 것을 기록했다.


午飯于衣貴院 東月而還 自官至衣貴三十里 自衣貴至西歸四十里 而路皆海無險 處所經七十里之間 除衣歸牛屯兩村外 絶無人烟 荒茅遍野 極望無際 北側漢岳撑空 南側大海接天 時見牛馬成屯 或至數 百匹 擇水草豊茂處往來飮 若雲錦離披


(점심을 의귀원에서 먹고 나서 달이 뜬 뒤에 정의현청으로 되돌아 왔다.

현에서 의귀까지는 30리이며 의귀에서 서귀포까지는 40리가 된다. 도로는 바닷가로 뚫려 있어서 험하지 않았으나 70리 길을 지나오는 동안에 의귀와 우둔(牛屯/지금의 효돈)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없고 거친 새들만 들판 가득 끝이 없어 보였다.

북으로는 한라산이 남으로는 바다가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어 가끔씩 수백 마리의 소와 말 떼가 풀을 뜯으며 지나가니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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