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토벌대에 의해 집단 처형된 양민 467명.. 성산리 터진목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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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토벌대에 의해 집단 처형된 양민 467명.. 성산리 터진목학살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5.2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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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이 대부분

성산리 터진목학살터

 

위치 ; 성산읍 성산리 399-102번지, 성산읍 고성리 224-1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4·3 당시 학살터

성산리_터진목학살터

 

성산리_터진목


제주4·3은 제주도 전역에서 많은 인명희생을 몰고 왔다. 특히 군부대가 주둔한 인근은 일상적인 학살터가 되기 일쑤였다. 성산읍에 위치한 속칭 터진목도 성산읍 관내 주민들이 많이 희생당한 희생터이다.

성산리는 원래 제주 본섬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 완전 고립된 것은 아니고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톱이 본섬을 이어줘서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런 모래톱을 육지와 간신히 이어져 있는 목이었다 하여 터진목이라 불렀다. 실제 1940년대 이전까지는 일출봉이 있는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행정 당국의 지원과 주민의 노력에 의하여 투석(投石)과 콘크리트로 고성리와 잇는 너비 50여m의 도로를 개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본섬과 완전히 이어지게 됐는데 지금도 이 일대를 터진목이라 한다. 번지상으로도 이곳이 성산리와 고성리의 경계 지점이다.

지금은 소나무로 가려져 길에서는 터진목을 볼 수 없으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소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터진목 해안을 훤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성산리는 1948년 4·3사건 발발 초기에 무장대가 한 차례 경찰지서를 습격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은 없었다. 지리적 여건이 무장대가 습격하고 퇴각하는 데 불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당시 성산초등학교(일제강점기의 성산동교)에는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편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바로 앞 주정공장 창고에는 갖가지 구실로 붙잡혀 온 주민들로 가득 찼다. 군인들은 끌려온 주민들에게 온갖 폭행과 고문을 가했고, 이들 대부분은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이 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이곳에서만 토벌대에 의해 집단 처형된 양민은 467명에 달하고 있다.

성산리에서는 터진목뿐만 아니라 성산일출봉 북쪽의 우뭇개 언덕과 옛 성산초등학교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로 이송되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자료 및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터진목 희생 상황은 아래와 같다.(『4·3은 말한다』5권 참조)


1948년 11월 17일 : 수산리 도피자 가족 13명 희생.
1948년 11월 28일, 18세 이상 80세 까지의 하도리 주민들을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명으로 감자창고에 감금 시켰다가 다음날인 29일 주민 20여명을 터진목에서 집단 총살하였다.(한라일보 070501)
1949년 1월 9일 : 고성2리 신양리 주민 4명 희생.
1949년 1월 13일 : 고성리 28명 희생.
1949년 2월 1일 : 난산리 현직심, 김문옥, 정춘갑, 김묘생, 한형식 처, 한형식 딸, 현정생, 고창송 등 희생.
1949년 2월 15일 : 김승하 부부, 오기은, 오병출, 김정유, 김정순, 깁정식, 김정자, 김정언, 김승하 딸, 김문옥 손자, 손녀 등 희생.


다음은 이곳에서 식구를 잃은 주민의 증언이다.(제주4·3희생자유족회 카페)


형을 잃은 고성리 주민 홍성기(남, 03년 76세) “그 때 형님이 희생됐는데, 그 때 우리 형님은 일본서 살다가 발동기를 하나 사가지고 마침 해방을 맞아서 왔는데. 불과 4개월 정도 살아가지고. 그 때는 서북청년들 사진을 가져와 가지고, 그 때는 서북청년한테 누구 협조도 안 해주니까 말이여. 게니까 사진, 대통령 이승만 사진을 해가지고 집에 돌아다니면서 사라고 해가지고. 우리 형님은 필요 없다. 그것뿐이 없는데…. 제일 억울한 것이, 총으로 한 번 해서 쓰러지면 그걸로 죽어서 말아불민 좋은데. 그 때는 의용대, 특공대 해 가지고 몇 사람씩 성산포 주둔했단 말이여. 그런데 죽은 놈 위에 매질한다고, 총 쏘아서 쓰러진 것을 대창, 철창으로 시험으로 하라고 막 찔러놨단 말이여. 그러니까 부모로서, 동생으로서 그걸 눈으로 볼 수 없단 말이여. 나도 직접 그 날 못 가서 뒷날 가 가지고서 형님 시신을 모시기도 했는데. 그 때는 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ᄆᆞᆯ구르마 끄성 가서 시신을 모셨는데. 이거는 사람을 잡아도 그렇게 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막 찔러노니까 상처 안 난 데가 한 군데도 없어.”


성산리 주민 이기선 씨 "또 말 들어보면, 터진목 가서 죽이는데 총알이 아깝다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했다는 그런 말을 들었어요. 순 그런 악질이었주."


4·3유족회 성산읍지회장 정순호씨(73·사진)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무장대가 번갈아가며 마을을 들쑤시니까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남아있으면 죽는다고 소문이 돌아서 아버지가 잠시 몸을 피했다. 그러자 특별중대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것은 무장대에 합류한 것이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까지 모두 데리고 가 터진목에서 총살했다.

당시 어머니가 나를 집에 두고 가면서 화를 피했지만 엄마 손을 잡고 함께 터진목으로 갔던 아이들도 많이 죽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4·3희생자 유족이라고 하면 빨갱이로 몰렸다. 공무원이 되기는 했지만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승진이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많은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평생을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왔으며, 무슨 일이 터진다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조사를 받는 것도 나였다.

당시 공무의 일환으로 일본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귀국하자마자 경찰로 불려가 누구를 만났는지 등을 조사받아야 했다. 지금에야 4·3이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진실규명도 이뤄졌지만 아직도 빨갱이라는 억울한 낙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제주신보 2018.07.22.)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1.5㎞쯤 가다 보면 우측에 조그만 소나무 군락 너머 모래밭에 암반이 드러난 속칭 광치기여 인근이 터진목이다. 특별한 형태를 띤 구조물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해안 모래밭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기 때문에 제주 4·3 사건 당시와 큰 변화는 없고 학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성산일출봉의 위용을 남동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다. 2010년 11월 5일 성산읍 4·3 희생자 유족회 주최로 추모위령제를 지내고 터진목 초입에 제주4·3성산읍희생자위령비를 세웠다.(향토문화전자대전)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467위의 이름을 마을별로 새겨놓았다. 2019년 11월 5일에도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비에 새겨진 추모글은 다음과 같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 저들이 쏘아대는 총탄을 몸으로 막아내며 늙은 어머니를 구해내던 어느 이웃집 아들의 죽음도, 젖먹이 자식만은 품에 꼭꼭 껴안고 처절히 숨져가던 어느 젊은 어미의 한 맺힌 죽음도,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피 토하듯 부르다가 눈을 감던 모습도 코흘리개 어린 우리는 기어이 그 모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서럽도록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치도록 울었습니다.〉
《작성 2011-09-06, 보완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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