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곡성현감․제주향교 교수를 지낸 문신..동명리 문영후(문곡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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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곡성현감․제주향교 교수를 지낸 문신..동명리 문영후(문곡성)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6.0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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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 고홍진, 의원 진국태와 더불어 耽羅三絶(또는 濟州三絶)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동명리 문영후(문곡성)묘

 

文怜後(文谷城)墓
위치 ; 한림읍 동명리 1272번지. 명월진성 남쪽(명월리교차로)에서 남쪽으로 가다 100m 채 못 가서 동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300여m에서 남쪽으로 400m쯤 되는 곳 길 서쪽 경작지 안. 주변보다 지형이 높은 동산 위.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 농로에서 밭 하나를 넘어야 하나 길에서 가까이 보인다.
시대 ; 조선

문영후묘 상석비석
문영후묘


문영후(文怜後, 왕조실록에는 文榮後. 1629~1684)는 곡성현감․제주향교교수를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남평. 아버지는 문재박(文在樸). 字는 인경(仁卿)이다.

애월읍 어음리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곡성현감을 지냈으므로 ‘문곡성’으로 널리 알려졌다.

현종5년(1664) 8월에 조정에서 정언 윤심(尹深)을 제주시재어사로 보내어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을 때 문과에 문영후․문징후(文徵後, 1632~?, 문영후의 從弟)․고홍진(高弘進, 1602~1682) 등 3명을, 무과에는 문창업(文昌業) 등 4명을 합격시켰다.

이 때 문영후가 수석합격했다.
합격자에게는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르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이른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주었다. 현종7년(1666)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라도 남원의 오수찰방과 곡성현감을 지냈다.

숙종1년(1675) 8월 곡성현감 재임 때 어떤 여성과의 불륜 관계 때문에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해 조정에서 심문을 받고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도민의 생활을 걱정하고 많이 돌보았다. 숙종7년(1681) 좌수 오상현(吳尙賢)과 함께 도민의 부역이 공정하지 못하고, 또한 이름 없는 세금이 많아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는 것을 진언하니 제주목사 임홍망(任弘望, 1635~1715)은 상정법을 제정하여 줄 것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그는 이러한 부역의 균등 배분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여 무명지세를 혁파하니 백성들의 삶이 편해졌다.

숙종10년(1684) 제주향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구례도목(舊例都目)에 의하면 서열로는 교수가 판관보다 상위 직급이므로 간혹 서열을 다투는 경우가 있었다.

문영후는 교수로서 공식 석상에서 판관 아래에 앉고 그 밑으로 정의현과 대정현 현감의 윗자리에 앉으니 자리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이때의 사람들이 그를 체통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우러러보았다.

시문과 글씨 등 문필에 능하고 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복서(卜筮)를 잘하며 미래의 일을 예언, 적중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이런 비범한 능력으로 인하여 지관 고홍진, 의원 진국태와 더불어 耽羅三絶(또는 濟州三絶)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제주사절을 말할 때에는 풍채와 용력에 양유성을 더한다.


묘는 일반 묘보다 상당히 큰 편이고 비석도 큼직하게 세워져 있으나 비석의 글씨는 매우 작고 약간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지만 대체로 〔通訓大夫行谷城縣監兼(?)□原鎭管京馬御□都尉文公之墓〕라고 읽을 수 있다.

뒷면의 비문은 거의 알 수 없다. 현무암으로 된 상석은 넓으나 얇고 네 귀에 육면체의 받침돌을 받쳤다. 산담에는 송악이 뒤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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