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자질이라는 것은 모든 성공(善)의 근본"..서홍동 고만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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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자질이라는 것은 모든 성공(善)의 근본"..서홍동 고만첨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7.09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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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녀상의 얼굴 묘사는 제주 동자석 중 가장 표현이 정교하고 정확하다.

서홍동 고만첨묘

 

위치 ; 서홍동 745-1번지. 남성로 SGI 연수원 삼거리 남쪽
유형 ; 묘
시대 ; 조선후기

서홍동_고만첨묘 문인석 右앞.

 

서홍동_고만첨묘 전경

 


고만첨(高萬瞻)은 현종13년(1672)에 남원읍 의귀리에서 출생하여 영조6년(1730)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자는 사앙(士昻)이고, 초명은 만추(萬秋)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증조부는 고홍진(高弘進), 할아버지는 고상질(高尙質), 아버지는 고원(高瑗). 처부는 이인제(李仁濟)이다. 제주에 유배 온 만구와(晩求窩) 김진구(金鎭龜)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촉문(囑文)이라 불릴 정도로 글을 잘 지었으며, 숙종 또한 그의 글솜씨를 칭찬하였다.


김진구는 1689년부터 1694년까지 5년간 제주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교육에 힘써 이중발, 오정빈, 고만첨 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김진구의 제자이며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의 제자이기도 한 고만첨의 묘비는 김춘택을 보살피러 제주에 다녀간 동생 복택(金福澤)이 짓고 썼다.(제민일보 051122)


고만첨은 연달아 과거에 낙방하여 무척 괴로워하였는데, 그 이유는 스승(김진구)이 돌아가시기 전에 성공하지 못한 죄송한 마음 때문이었다. 후에 고만첨은 이름이 방록(榜錄, 과거 급제자 명단)에 올랐지만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미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고만첨은 숙종32년(1706) 제주어사(濟州御使) 이해조(李海朝)가 주관한 문과 초시 시험에서 정창선(鄭敞選)·오정빈(吳廷賓)과 함께 급제하였으며, 김춘택은 서울로 전시(殿試)를 보러 가는 고만첨을 격려했다.

“그대는 참으로 자질이 많다. 자질이라는 것은 모든 성공(善)의 근본이다. 자질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어찌 과거로 이름나는 것에 그치겠는가. 그대는 명예에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공의 열매를 맺는데 더욱 돈독히 하면, 나아가서는 왕조(王朝)에 쓰이게 되고, 물러나면 사대부와 더불어 노닐게 될 것이다. 어찌 가게 되면 그대가 성공하지 못하겠는가.”(제민일보 110610)

숙종34년(170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6위로 급제했다.
이후에도 제주에 유배 온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고, 숙종42년(1716) 제주별견어사(濟州別遣御史) 황구하(黃龜河)가 주관한 문과 회시 시험에 급제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는 특권을 받았다.(제민일보 110509)

고만첨은 어려운 과거에 세 번 급제했으니 그의 역량은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스승들 또한 명문 집안의 일가를 이룬 문인·학자였다.(제민일보 110527)


김춘택은 제주에 유배 온 시기에 그 전에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오정빈(吳廷賓), 고만첨(高萬瞻)이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 이해조(李海朝)의 시취(試取)에 급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아버지 문하생 사앙(士昻) 고만첨(高萬瞻:萬秋)을 제주에 보내며 아쉬운 마음을 담은 <고만추를 보내며(送高萬秋)>을 짓기도 했다.(제민일보 110509)


고만첨의 관직은 경직(京職)으로 성균관가주서(成均館假注書), 전적(典籍),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겸 춘추관(兼春秋館), 형조좌랑(刑曺佐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는 경상북도 풍기(豊基)의 창락찰방(昌樂察訪), 해남현감(海南縣監), 강원도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역임하였다.


만년에 경상북도 순흥(順興)에서 살다 영조6년(1730) 서울에서 갑자기 사망하였으며, 제주도로 반장(返葬)하였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고만첨 무덤은 부부 쌍묘로 조성되었고, 석물은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동자석은 각각 동남동녀(童男童女)상인데 특히 동녀상의 얼굴 묘사는 제주 동자석 중 가장 표현이 정교하고 정확하다.

동녀라는 판단은 머리에 쪽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여자 아이들도 7~8세가 되면 쪽을 쪘었다. 얼굴선과 목으로 흐르는 선이 유연하고 고운데 반해 손 표현에서는 과감히 단순한 좌우 직선으로 처리하여 추상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제민일보 100702)

동남형 동자석은 동녀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에 비해,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마저 간략한 선묘(線描)로만 그쳤다.(제민일보 110610)
《작성 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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