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정의현 출신 최초 급제.. 서홍동 오정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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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정의현 출신 최초 급제.. 서홍동 오정빈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7.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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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창수록이란 산지천 적거지에서 시를 주고받은 기록이라는 뜻

서홍동 오정빈묘

 

위치 ; 서귀포시 서홍동 125번지. 속칭 ‘종재기’(종지의 제주어) 동산 뒤편 ‘도로목’ 지경
유형 ; 묘
시대 ; 조선후기

서홍동_오정빈묘동자석左(제민일보김유정)

 

서홍동_오정빈묘


서홍사거리 SK주유소 옆 길로 북쪽을 향하여 300m 가면 서쪽으로 승용차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아주 좁은 농로가 있다. 이 농로로 200m 정도 끝까지 들어가면 남남서 방향으로 자리한 오정빈의 묘가 있다.


오정빈(吳廷賓, 1663~1711)은 현종4년(1663) 서귀포시 토평동 1245번지에서 벽사찰방 軍威吳씨 현(吳晛)과 제주고씨 사이의 5남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興淑, 호는 兆軒이다.

오정빈은 고홍진의 외손이다. 고홍진은 광해군에게 직언을 해서 미움을 사 제주에 유배온 간옹 이익(艮翁 李瀷)의 문하에서 배워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낸 사람이다.

이 때 고홍진과 동문수학한 사람 중에는 김진용이 유명하다. 고홍진은 특히 풍수에 밝았고 고전적이라 불리며 제주3절로 추앙받았다. 고홍진의 딸이 오정빈의 어머니이다.


오정빈은 13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대정에 유배온 신명규(申明奎)를 찾아갔다.

“제 아이가 13살이 되었는데 아는 것이 보잘것이 없어서 경사를 배우고자 합니다. 제주 섬 안은 견문이 좁아서 세상 물정에 어둡고 고집이 셉니다. 제자로 받아주셔서 인재를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제자로 맞았다. 후에 신명규의 아들 신임도 제주에 유배되었다.


오정빈은 총명하면서도 언행을 조심하였고 재능과 품행이 모두 우수한 학동으로 가정교육이 잘 된 아이였다. 육례(六藝)를 터득하여 5년만에 시문을 쓰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신명규는 오정빈에게 자못 기대를 걸면서 字와 호를 지어주었다.

오정빈은 18세에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신명규를 따라 한양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려운 한양생활을 참으며 성균관 유생으로 학업에 정진하기를 7년, 1687년 2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제주에 돌아와 부모를 기쁘게 하였다.

사마시란 소과라고도 하며 생원․진사시라고도 한다. 일종의 예비시험으로 정원은 100명이었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의 숙지 정도, 진사시는 문장능력을 주로 시험했다.

사마시는 예비시험이라서 입격을 해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지식인으로서 음직으로 나아가는 데 기본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경쟁은 치열했다.


고향에 왔던 오정빈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가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진사로 살았다.

김춘택은 후일 “오정빈이 다시 한양에 가서 공부를 했더라면 과거에 합격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찌 감히 제주에서 어사의 시험에 응시하길 바랐겠는가?”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오정빈은 나이든 어머니 때문에 복시를 보러 한양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오정빈의 두 번째 스승은 유배인 김진구였다. 김진구는 6년간 제주시 동천가에 살면서 오정빈을 가르쳤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자 제주에 온 김춘택을 만나 교유했다. 오정빈은 공부를 마치면 김춘택과 함께 가락천 골짜기와 청풍대의 꽃, 기이한 바위, 대나무, 풀 사이를 거닐며 놀았다.

때로는 들로 나가서 먼산을 보거나 높은 데 올라가 바다를 굽어보면서 흥이 나면 화답시를 지었다. 김진구의 다른 제자들인 고만첨, 양수영, 여러 학생들과는 물고기 안주에 술을 마시면서 농담하고 웃으면서 놀았다.

김춘택은 오정빈의 시를 보고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며, 또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부지런하고 훌륭한 선비라고 칭찬했다.


오정빈이 복시(覆試)를 본 것은 44세 되던 숙종32년(1706) 제주순무어사 이해조가 제주에 내도한 때였다.

이해조는 과거를 치루고 시험지를 가지고 이듬해 상경하여 예문제학 최석항이 심사하니 정창선(鄭敞選), 고만첨(高萬瞻), 오정빈 3인이 급제하여 전시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전시에 나간 오정빈은 임금 앞에서 부(賦)를 지어 합격하고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의현 출신으로 최초 급제라고 한다. 정의현에서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정빈의 이름이 연방록(蓮榜錄)에 오르자 사람들이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성균관 학유(學諭,정9품), 학정(學正,정8품), 저작(著作,정8품), 박사(博士,정7품), 양현직장(養賢直長, 종7품),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主書)를 지냈는데 규모가 있고 민첩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어서 전적(典籍,정6품), 승의랑(承義郞), 예조좌랑(禮曺佐郞,정6품) 등을 거쳤다. 좌랑 때에는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정6품)을 겸했다. 숙종36년(1710) 만경현령(萬頃縣令,정5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즈음 북헌은 만경과 가까운 전북 옥구군 임피면으로 이배되었다. 오정빈은 임피로 유배된 북헌을 세 번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김춘택이 굶주리지 않도록 음식을 가지고 갔다. 그 해 연말이 되자 갑자기 오정빈에게서 연락이 끊긴 것을 이상하게 여긴 김춘택은 마음이 심히 불안했다.

오정빈은 겨울에 병을 얻어 재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이듬해인 숙종37년(1711) 1월 관사에서 사망하니 오정빈의 나이 49세였다. 김춘택은 이를 듣고 놀라 울부짖었고 흐르는 눈물이 옷을 적셨다. 유배죄인으로서 자유롭지 못한 김춘택은 유생 이세영에게 제문(祭吳興淑文)을 지어 보내어 만경현령 오정빈의 영위에 조문하였다.


봄이 되자 부음을 듣고 바다를 건너온 동생 오정신이 상례를 갖추었고, 관리들이 영구를 호송하여 제주 정의현 서홍동 속칭‘도로목’에 장사를 지냈다. 묘비명은 당시 제주에 유배왔던 이성휘(李聖煇)가 짓고, 김진구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성균관 학유 고만첨이 글씨를 썼다. 고만첨은 후에 평해군수를 역임했다.


오정빈은 산남의 출중한 선비다. 같은 시기에 고만첨 역시 출중한 선비였다. 이들은 유배인 김진구(金鎭龜) 밑에서 같이 배웠고 1706년 제주순무어사 이해조(李海朝)가 내도하여 과거를 치렀을 때도 같이 급제했다.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金春澤)은 이들이 전시를 보러 서울로 떠날 때 똑 같이 용기를 북돋워주는 격려의 글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또 나이 차이는 나지만 두 선비 모두 객지에서 사망하여 제주에 들어와 묻혔으며(返葬), 무덤에 세운 석물의 숫자와 모양도 비슷하고, 정실부인에게서 후사가 없어서 양자를 들인 것도 같다.


유배인 김진구는 제주섬의 유생 오정빈을 훌륭한 선비로 여겨 무척 아꼈다. 오정빈을 만날 때마다 시를 가르치면서 화답했고, 오정빈은 그것을 소중히 기록하고 보관하여 《동천창수록,東川昌酬錄》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니고 다녔다. 동천창수록이란 산지천 적거지에서 시를 주고받은 기록이라는 뜻인데 그 책의 서문을 김진구의 아들 북헌 김춘택이 숙종17년(1691) 제주에 유배왔을 때 썼다.


오정빈의 묘역은 넓은 편이다. 일명 ‘도로목’ 묘역에서 보는 풍경도 아름답다. 무덤의 배경으로 둥그스름한 한라산 머리가 주산(主山) 역할을 하고 있고 남쪽 서귀포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한가롭다. 무덤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묘비에는 ‘승훈랑행예조좌랑오공 의인강씨지묘(承訓郞行禮曺佐郞吳公 宜人姜氏之墓)라고 기록하였다. 부인은 대정현 진주강씨 강두환의 딸이다.


무덤의 앞면 옆에 부인 강씨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는데 유학 고득태(高得泰)가 강씨의 절의와 여성다움을 칭송하고 있다. 강씨는 공이 사망후 34년을 더 살다가 1744년9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정빈 무덤의 석상은 봉분쪽에서부터 동자석 2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를 배치하였다. 동자석은 비교적 큰 편이다. 좌측 동자석은 댕기머리에 홀을 들었고 키가 84㎝, 우측 동녀석은 쪽진 머리에 홀을 들었고 키가 77㎝이다.

동자석과 문인석들은 현무암의 특성 때문에 선이 굵고 투박하게 만들어졌지만 사실성을 가미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큰 선으로 처리하는 과감한 솜씨는 제주 지역 동자석의 풍토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무덤에 동자석과 동녀석을 배치하는 것은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동녀석은 동자석에 흔히 보이는 쪽진머리인데 얼굴을 여성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약간 하늘을 향하듯 머리를 쳐든 모습이며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치마 입은 동녀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석상은 동녀인가 아니면 계례(笄禮)를 치른 성숙한 여성인가?


예로부터 양반 계급 집안에서는 여자가 15세가 되면 으레 계례를 행하였다. 머리에 쪽을 지르고 그 위에 족두리를 얹고 용잠을 꽂는다. 옷은 녹색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입었다. 이로부터 동녀에서 벗어나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정빈 묘의 동녀석이 성숙한 여인은 아니다. 이 석상을 만들던 시기의 제주 풍습으로는 어린 아니도 쪽을 지었다.

“제주 여인들은 비록 7,8세가 된 아이라도 모두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 쪽을 지었다”는 옛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이것은 바람 많은 제주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혹은 가채의 장식을 위한 착취의 일환으로 동녀들에게도 긴 머리를 강요했을 수도 있다. 남환박물 土産 조에 ‘땋은 머리 - 사람의 머리털은 매우 길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말갈기, 나전, 양태, 모자와 같이 긴 머리를 육지로 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인석은 동자석을 만든 석공의 솜씨와 같다. 왼쪽은 키 130㎝에 복두, 복대, 손에는 홀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은 키 121㎝에 복두, 복대, 홀은 마찬가지이지만 여성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망주석은 원래 무덤의 장소를 알리는 표시물이다. 망두석, 망주석표, 석망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규정대로라면 꼭대기에 금방 피기 전의 연꽃 모양을 새겨야 한다. 왕릉의 망주석은 머리에 연꽃을 새기고 기둥에는 세호를 새긴다.

제주의 망주석들은 표현 솜씨가 부족하여 꼭대기 모양을 종, 남성성기 등 왜곡된 모양이 대부분이다. 오정빈 묘의 망주석은 좌측 180㎝, 우측 171㎝나 되는데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제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이다. 거친 돌을 연마하여 만들었다. 좌대는 아주 투박하게 다듬은 사각형이고, 좌대 측면에는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양각 볼륨을 준 2개의 띠를 표현했다. 바로 이웃하여 1958년 표선면 가시리에서 이장해 온 오정빈의 할아버지 오덕립 부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김유정, 제주 풍토와 무덤)

비문은 다음과 같다.(이하 『연외천의 원류를 찾아서』 그대로 옮김)


承訓郞 行禮曹佐郞 吳公 宜人姜氏 之墓
公諱廷賓字興叔 系出軍威 學生 諱德立之孫 學生諱晛之子 榮將諱碩賢之八代孫也 而 典籍高弘進卽其外祖也 學生公氣英魁偉有出○頴特之志 喜公有奇異 自學語時 出○○○○ 其有成中 留守銋之留島也 挾往請敎 則留守感其殷勤獎與之以誠 文才果蔚然夙成 丁卯以詩中司馬 丙戌以賦參丙科錄成均 以堂后 累入前席昵侍天顔遠近榮之 坒拜南宮員外 旋受萬頃縣令 其爲政之淸謹 吏民之愛戴 雖在千載之下 可見其口碑矣 噫 此豈非公之頴達 而亦豈非學生公之出人勸誨也耶 公有至行事親盡孝友愛岳 其在稚少 與弟廷臣 離家同學弟或呼飢 公必與之共泣 己巳遭外艱 葬祭稱禮 孤露之感 久而益新 及至登科榮歸之日 涕泗交頤 見者感動 榮貴之後 常以離遠庭闈 不樂仕宦決欲趂春投紱解歸 宿計未遂 朝(露)先晞 痛矣 以公之孝悌雅行 遽至於此耶 公生於癸卯終於辛卯 葬於先○○○之原 乃同年三月二十四日也 噫 公間世而傑出于島中 天之所以賦(異)○○○○ 何○○○○○○○○○悲夫聞公之喪 行路莫不惜其無年 哀其有親也 嗟乎情之所在死生(無)間 公○(沒)而○○○○○○(必)不一日而忘大夫人 夫以大夫人之鍾愛(參) 何忍以死而傷生 以重潛九原之心乎吾(請)以(斯)語寬慰大夫人 而且以慰吾公焉 公娶晋州姜斗煥之女 無子 以廷臣子命夔爲後 而娶士人梁巘之女 生一女一男皆幼(余)方以(謫)(民)爲世擯斥 顧何敢擬於立之墓道 以吾知公之最 故公弟之請甚切終不忍辭也 李聖煇記
崇禎後甲申八年辛卯 外從姪 從仕郞行成均館學諭 高萬瞻泣(書)


공은 휘 정빈, 자 흥숙, 본관은 군위이다. 학생 휘 덕립의 손자이고, 학생 휘 현의 아들이며, 영장 휘 석현의 8대손이다. 그리고 전적 고홍진은 그의 외조부이다.


학생공(부친 晛을 지칭함)은 기색이 빼어나고 체격이 장대하고 훤칠하였으며 뛰어난 뜻이 있었는데 공에게 기이함이 있어 말을 배울 때부터 ○함을 기뻐하였다. 공이 자라는 가운데 유수 신임이 섬(제주)에 와서 머물렀는데 (공을) 데리고 가서 가르침을 청하니 유수가 그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에 감동하여 정성으로 장려하며 가르쳤다.


글재주가 과연 성대하게 일찍 이루어졌으니 정묘년에 시로써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술년에는 부로써 병과 과거시험을 보아 성균관에 들어가고 승정원 주서로 여러 번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가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이어서 예조돠랑을 정원 외로 제수받고, 곧 이어 만경현령에 제주되었다. 그 정사가 청렴하고 조심스러웠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떠받드는 것이 천년이 지날지라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이 어찌 공이 빼어나고 통달한 때문이 아니며, 또한 어찌 학생공이 출중하게 권면하고 깨우친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은 지극한 행실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했고, 형제간이 우애가 심히 돈독하였으니 어렸을 적에 동생 정신과 집을 떠나 함께 공부할 때 동생이 혹 배고프다고 말하면 공은 반드시 동생과 더불어 함께 울었다.


기사년에 아버지의 상을 다해서는 장례와 제사를 예의에 맞게 하고 아버지를 여읜 외로운 감정을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롭게 하였다. 과거에 급제해서 영광을 어버이에게 돌리는 날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양 뺨에 흘러내리니 보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지체가 높고 귀하게 된 후에는 항상 부모님과 떨어져 잇었기에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봄이 되면 인끈을 던져 벼슬을 그만두고돌아가려 결심했었지만 묵혀 두었던 계획이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침 이슬이 마르듯이 먼저 돌아가 버렸으니 애통하다 공의 효도와 우애, 고아한 행동 때문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가! 공은 계묘년에 태어나서 신묘년에 돌아가 ○○○에 장사지내니 곧 같은 해 3월24일이다. 아! 공은 섬 안에서 아주 드물게 태어나는 걸출한 인물로 하늘이 준 ○○○○ 슬프다. 공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길 가던 사람들은 그의 짧은 수명을 아까워하며 그 남겨진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다.


아! 정이 있는 곳은 삶과 죽음에 차이가 없는 것이니 ○…○ 하루라도 대부인을 잊지 않을 것이다. 대부인이 아들을 심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찌 차마 죽음으로써 생명을 상하게 하여 저승에 있는 이의 마음을 거듭 슬프게 할 것인가! 내가 이 말을 청하여 대부인을 널리 위로하고 또한 우리 공을 위로한다.
공은 진주 강두환의 딸에게 장가들었지만 아들이 없어 정신의 아들 명기로 후를 삼았다. 그리고 사인 양헌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1남을 낳으니 모두 어리다.


나는 유배온 백성으로 세상에서 내침을 당했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감히 입언군자에 헤아려져 공의 묘도를 꾸밀 수 있겠는가? 내가 공을 앎이 최고라 하여 공의 아우의 요청이 간절하였으므로 끝내 차마 사양하지 못하였다. 원산 이상휘가 기록하다. 숭정후 갑신8년 신묘(1711) 외종질 종사랑행성균관학유 고만첨이 울며 쓰다.

※김진구 : 호 만구와(晩求窩), 아버지는 김만기. 숙종의 첫부인 仁敬王后와는 남매간. 감산리에 유배되었던 서재 임징하의 장인. 서포 김만중은 김진구의 숙부


※이성휘의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나, 숙종실록25년(1609) 12월22일조에 과거시험에서의 부정행위로 동의금(同義禁) 신후명(申厚命)이 이성휘에 대한 옥사를 극론(極論)하여 올린 상소문 기사가 있다.

《작성 120116, 보완 1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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