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요드가루, 알콜에 풀면 옥도정기 돼..옹포리 감태공장(우에무라제약회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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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요드가루, 알콜에 풀면 옥도정기 돼..옹포리 감태공장(우에무라제약회사)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8.01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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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류인 감태로 군수용 염산가리와 옥도를 제조생산하던 곳이다.

옹포리 감태공장(우에무라제약회사)터

 

위치 ; 한림읍 옹포리 386번지 일대. 옹포리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해안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꺾이기 직전 넓은 터.
유형 ; 생산기술유적
시대 ; 일제강점기

옹포리_감태공장터 판자벽.
옹포리_감태공장터

 


일제강점기 옹포리의 감태공장은 성산포 제1감태공장과 더불어 유명하다.

감태공장에서는 해방 후 10년 1955년까지 옥도정기(요드) 원료와 염화가리를 빼어 일본으로 수출했다.

우선 해녀들은 감태를 작업해서 말리고 불에 태운 재를 공장으로 가져오면, 그 재를 물에 담가서 원액을 뺀 후 다시 끓인다. 계속 끓이면 물이 누렇게 된다.

이 물에는 소금, 염화가리, 요드가 들어있어서 처음에는 소금 염화가리가 나오고, 계속해서 한 이틀 정도 끓이면 요드가 나온다.

이 요드가루를 알콜에 풀면 옥도정기가 되는데, 일본이나 제약회사에 판매를 한다.

요드를 추출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일이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면서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질 않았다.

그 이후 김치공장을 하기도 했고, 소라․전복 통조림 공장을 하기도 했다. 통조림 공장을 1975년까지 지속하다가 소라가 너무 비싸고 수출길도 막혀 다른 사람에게 인계했다.


일제강점기 감태공장의 공장장은 한군중씨였으며 광복 후 적산공장으로 불하받아 그의 아들 한익수(2007년 72세. 옹포리 거주)씨가 물려받아 운영했다.

한익수옹은 “예전에는 생활비 벌이는 될 정도로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었다. 당시 잠녀들이 직접 감태를 캐다 말려 재로 만든 후 공장으로 가져왔다. 남자 종업원도 25명이나 됐다”고 한다. 1959년 태풍 ‘사라’에 건물이 무너진 적이 있다고 한다.(제민일보 070114)


현재는 화물용 컨테이너를 보관하고 있고, 스레트지붕으로 된 건물 3동이 남아 있는데 그 중 2동은 나무판자를 층층으로 붙인 벽이다.


현장에 세워진 안내표석에는


〈이 옹포리 39-86번지 주변은 일본인이 1942년 태평양전쟁 때에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해조류인 감태로 군수용 염산가리와 옥도를 제조생산하던 곳이다.

1952년 5월 6일 한림공업고등학원 토건과와 기계과가 각각 3학급으로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한림중학교장 이기휴(李基休)가 학원장을 겸직, 한림초등학교 음악실에서 운영하였다.

이어 한림읍장 김창우(金昶宇)를 기성회장으로 초대하여 1953년 4월 7일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동년 4월 19일 이 터전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초대교장은 한림중학교장 강석용(康錫用)이 겸직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우에무라(植村)제약회사의 공장부지 2,240평과 공장 건물 72평, 또 제1창고 24평, 제2팡고 22평, 주택 36평의 일부를 수선하여 관리실과 교실로 이용하였다.

이듬해 현 한림공고 부지로 옮겨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감태공장 터가 한림공업고등학교 발상지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공장도 계속 가동하면서 한편에서는 학교를 설립했다는 말이 된다.
《작성 1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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