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일본군 기갑부대 주둔..산양리 새신오름갱도진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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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일본군 기갑부대 주둔..산양리 새신오름갱도진지①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8.10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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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오름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이 오름에 새가 많이 날아와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자는 조소악(鳥巢岳)

산양리 새신오름갱도진지①

 

위치 ; 한경면 산양리 새신오름 산책로로 들어서서 30여m 오른쪽에 있다.
유형 ; 방어유적(갱도진지)
시대 ; 일제강점기

새신오름갱도진지1 맞은편입구안

 

산양리_새신오름갱도진지

 


새신오름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이 오름에 새가 많이 날아와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한자 표기로는 조소악(鳥巢岳)이다. 또 신서악(新西岳)으로 불리기도 하나 이름의 유래를 알지 못한다.

오름 자체가 낮은데다(표고 141.5m․비고 40m 정도) 둥글 넓적하게 생겨 보기에는 오름다운 느낌을 별로 못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 곳 일대에 일본군 기갑부대가 주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신오름은 비교적 낮은 오름이지만 서남부 해안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해안가인 한경면 고산리까지 거리는 6km쯤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최정예인 제111사단 예하 243연대는 가마오름․새신오름 일대에 주둔했다.

새신오름에는 기갑부대가, 후방인 원물오름․당오름에는 제111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사령부주둔지 맞은편 도너리오름에는 포병부대가 포진한 형태다.(한라일보 060504)


오름사면에 나 있는 갱도 출․입구만도 30여 곳이나 된다. 갱도 입구는 대부분 큼직한 돌 등으로 막혀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이 방목중인 소가 자주 지하갱도에 떨어져 죽는 바람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막아버린 것이다.


제58군배비개견도와 제주도병력기초배치요도 등에 따르면 새신오름 일대는 일본군 제243연대 주둔지이다. 즉 가마오름과 새신오름, 굽은오름 일대에서 일본군은 대규모 지하갱도를 만들고 주저항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주저항진지’는 주력을 다하여 방어해야 하는 진지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새신오름 역시 일본군의 강력한 지하요새로서의 기능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마을 주민 김원욱씨도 "새신오름 북쪽에 탱크부대가 있었고 기마병과 의무병도 함께 주둔했다"고 말해 많은 일본군이 이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일대에 주둔했던 탱크부대는 1945년 6, 7월쯤 협재에서 기뢰공격을 받아 일본함대가 침몰할 때 출동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새신오름은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서남부 일대 일본군 주둔의 주요 거점중 하나이다. 또한 당시 일본군의 진지구축 실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곳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새신오름 일대의 갱도는 1944년쯤에 일본군들이 와서 파기 시작했지. 일본군들은 오자마자 오름 앞에 천막을 치고 굴(갱도)만 파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1년쯤 뒤에 해방을 맞았어."


당시 11세였다는 김원욱씨(1935년생․산양리 거주)는 "일본군들은 순전히 곡괭이 등 수작업으로 굴을 팠는데 깊이 들어간 곳은 '도르레’로 흙을 밖으로 내쳤다"며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어릴 때 장남삼아 굴파는 데 구경가서 놀기도 하고 감자 찐 것 하고 일본군 빨랫비누 같은 생필품을 바꾸기도 했다는 김씨는 또 새신오름 북쪽에는 탱크부대가 있었다며 일본군 주둔상황을 설명했다.

"탱크는 오름 한쪽 면을 정리해서 탱크를 들이밀고 위장을 했어. 탱크는 나무 풀로 덮고 위장망을 씌우고 했는데, 기마병도 탱크병과 같이 있었지."


김씨는 가마오름 절터 연대본부 주둔지에 연대장인 대령이 살았고 가마오름과 새신오름 등을 총지휘했다고 말했다.

"연대장은 머리가 허영한 '백하르방’인데 그 하르방이 나왔다 하면 가마오름에서 산양리까지, 또 그 앞쪽으로도 그만한 정도의 경호부대가 따라 붙었어. 위관장교들도 말을 타서 경호를 하고…. 그 하르방이 시찰을 나오면 일본군들은 통제를 했는데 주민들은 구경을 할 수 있지만 움직이질 못했어."라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후 일본군들은 패전 뒤 피복이나 통조림 등 물품은 전부 소각했고 군마도 개인참호 같은 데 세워놓고서는 주사를 주입시켜 죽였다고 말했다. 군수물자를 운반했던 '구루마’는 아는 집에 놔두고 갔는데 그때부터 주민들이 '구루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한라일보 060427)


이 갱도는 입구가 철망으로 가려져 있다. 입구 경사가 급하여 소가 들어가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막은 것이다. 곧게 반대편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북쪽으로 난 입구는 빛은 들어오지만 좁아서 통행은 할 수 없다.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다가 막힌다.
《작성 1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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