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바닷물에 잠기는 포구.. 수원리 조물캐(ᄌᆞ물캐)(포구)
상태바
[향토문화] 바닷물에 잠기는 포구.. 수원리 조물캐(ᄌᆞ물캐)(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8.18 0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구를 쌓을 때 애월 사람들이 와서 도와줬다는 말이 전해 온다.

수원리 조물캐(ᄌᆞ물캐)(포구)

 

위치 ; 한림읍 수원리 967-6번지의 서쪽. 수원리 구름드르에서 서쪽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 바닷가
유형 ; 어로시설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수원리_돈지개포구(서재철)
수원리_조물캐


수원리는 숙종46년(1720)에 한림읍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수원리 내동·전동·대수동에서 거주가 시작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제주군 구우면 지역으로 잠물개·잠을캐 또는 잠수포·수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수원리가 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ᄌᆞ물캐란 식수와 생활용수로 쓰던 용천수가 만조 시에는 전부 바닷물 속에 잠겨있다는 데서 또는 잠녀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한자로 표기하여 잠수포(潛水浦)라고 하였다.

고종19년(1882) 대림리에서 분리할 때 김흥욱 4대 경민장 재임 당시 ᄌᆞᆷ녀(潛女)들의 사망사고가 빈번함으로 인해 마을 유지들과 협의하여 수원리로 개명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라일보(160315) 양기훈 글에 의하면 수원(洙源)은 공자가 제자들을 훈육하던 곳의 지명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ᄌᆞ물캐는 바닷물에 잠기는 포구라는 뜻이다.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잠수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수원리의 옛 이름이 조물캐인데, 잠수포는 조물캐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조물다는 잠기다[潛]의 뜻을 지닌 제주어이다.

또한 포구 안 남쪽에는 돈짓물(시멘트 구조물 속에 있음)과 그 옆에 조그만 물(고망물)이라는 샘물(용천수)이 있는데, 만조 때에는 바닷물에 잠겨 버린다. 

조물캐는 조물이라는 우물을 거느리고 있는 포구라는 말로, 마을 이름인 조물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수원리에는 대수포구(서쪽)와 평수포구(동쪽) 그리고 동쪽으로 다소 멀리 떨어진 용운동에 용운포 이렇게 3개의 포구가 있다. 이 중에 평수포구가 ᄌᆞ물캐이다. 다음(daum) 지도에는 평수포구라고 표시되었다.

지금과 같은 포구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46년대이며, 당시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조근물 일대의 돌을 깨 포구를 축조하였다고 한다.

엉물깍코지와 숭애코지 사이의 후미진 곳에 있다. 포구는 조간대 상층에 걸쳐 있어 썰물에는 바닥이 말라 버린다. 잠수포로 배가 왕래하는 길목에 반막자리가 있다.

이곳이 바로 썰물 때 배를 매어두는 보조 포구이다. 이곳에 배를 붙여두었다가 밀물을 타고 포구 안으로 배를 들여 맨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2004년 경 방파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외형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포구(성창)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곳이다. 포구는 성담 모양으로 쌓아 만들어졌다.

대개 배가 드나들기 좋고 물때에도 매어둘 수 있는 곳에 포구를 뒀다. 이곳의 어선들은 주로 채낚이와 연승어선으로 차귀도, 관탈섬 등지에서 고기잡이에 나서고 있다.

수원리 거주 2007년 79세 김종권씨에 의하면 “언제부터 돈짓포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포구를 쌓을 때 애월 사람들이 와서 도와줬다는 말이 전해온다.

애월 포구를 만들 때는 수원리 사람들이 가서 도왔다”고 한다.(한라일보 070720) 포구가 열리는 들맥이에 <반막자리>라는 조물캐 보조포구 구실하는 작은 포구가 있었으니 이곳이 개맛 갯머리이다.(한승훈의 제주 이야기)

귀덕2리 현성일씨는 “태풍이나 파도에 자꾸 허물어지니까 마을에서 시멘트를 발라서 보수를 했다. 시멘트를 바르기 전에는 포구가 무너지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복구 작업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한라일보 070720) 포구 밑바닥에는 현무암 빌레이다. 포구의 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빌레를 볼 수 있다.

영등대왕 전설에 나오는 마을이 이곳 ᄌᆞ물캐이다. ᄌᆞ물캐 어부들이 고기 낚으러 나갔다가 풍파에 밀려 애꾸눈이섬에 도착하였다가 영등대왕이 몰래 도망치게 해 살려 주었는데 ‘관음보살’을 염송하면서 가라고 한 것을 거의 다 도착했다고 멈추었더니 다시 광풍이 불어 애꾸눈이섬으로 끌려갔고, 영등대왕은 다시 이들을 살려 주었는데 ‘나는 너희들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니 2월 초하루에 제주에 들러 2월 보름에 돌아오겠으니 내 공을 잊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애꾸눈이들은 좋은 반찬을 놓치게 했다고 영등대왕을 세 토막내어 죽였다고 하며 그 시체 토막이 제주로 밀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물캐 어부들이 영등당을 모시게 되었는데 2000년 경 폐당되었다고 한다.
《작성 120325, 보완 18011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