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기녀 수월이가 기부하여 조성된 못..안성리 수월이못(봉천수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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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기녀 수월이가 기부하여 조성된 못..안성리 수월이못(봉천수연못)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8.21 0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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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평생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이 못을 만들도록 희사했다.

안성리 수월이못(봉천수연못)

 

위치 ; 안성리 추사적거지 옆 대정성 동쪽 시멘트길로 700여m 가면 좌측에 물이 있다.
유형 ; 수리시설
시대 ; 조선
담수 면적 1,500 여평.
만수 수심 1.5 ~ 2m.
평균 수심 1m 내외.
갈수기 50Cm ~ 1m.

 

안성리_수월이못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인데 수월이물이라 부른다. 기녀였던 수월이가 기부하여 조성된 못이어서 붙은 명칭이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평생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이 못을 만들도록 희사했다.

인성리에 사는 김창성 옹(81)에 의하면 수월이못 동북쪽에는 원래 오씨와 원씨, 기생 수월이가 살았는데 수월이가 집 가까이에 있는 불모지의 밭(현재의 수월이못)을 사서 우마급수장으로 쓰도록 마을에 기증했다고 한다.

동성리 마을 사람들은 물이 잘 고이는 그 밭에 물통을 파서 큰못을 만들었고, 마을의 강훈장에게 못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물으니, 강훈장은 "비록 천한 기생이나 마을에 이로운 일을 했으니 그 이름을 따서 수월이못이라 부르라"고 하여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한다고 했다.(제민일보 140303)

제주 여성이 하는 가사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물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해안 마을에서는 솟아나는 시원한 물을 썰물 때에 맞추어 길어오기만 하면 되었다. 중산간마을인 경우 우물이 없었다. 대신 빗물을 받아 고이게 하는 물통(봉천수)이 있었고, 올챙이나 장구애비가 헤엄쳐 다니는 그 물을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수월이는 젊은 시절에는 관아에서 수청을 드는 기녀였으나 나이가 들자 마을 끝에 작은 집을 지어 살았다.(지금도 수월이물 동북쪽에는 수월이, 해주오씨 입도3대조 독검, 원씨 등이 살았다는 집터가 있다.) 조선시대 기녀의 주된 임무는 관리의 수청을 드는 일이었다. 그밖에 병을 치료하는 의기(醫妓), 의복수발을 담당하는 침기(針妓) 등은 존중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 밖에 나가 살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기도 했다.

수월이는 며칠에 한 번 말을 타고 관아에 오갔다는 것으로 보아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침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복이 완성되면 관아에 가져다 바치고 다시 일감을 받아 가지고 와서 바느질을 했을 것이다.

그녀가 말타기를 즐겼다는 점은 또 다른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제주목에는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고도의 기마술을 구사하던 기녀집단이 있었다. 어쩌면 수월이는 젊은 날 이름을 날리는 기마술의 달인이었고 그 공로로 나이가 들자 은퇴하여 밖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수월이는 물 긷는 고통을 아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은퇴하게 되자 돈을 내어 습지를 구입하여 목마름의 절망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구제한 것이다. 그야말로 보살이고 천사이다.

수월이물은 면적이 3500㎡나 되는 비교적 큰 못이고 수량도 풍부하다. 큰 연못의 북쪽으로 작은 연못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남성용과 여성용이다.(블로그 올레여행 김순이님 글) 본래 작은 웅덩이는 3개였다. 1990년대초 마을 이장이 한 군데를 메우고 그 자리에 팽나무를 심었다. 작은 연못들은 1960년까지 마을 사람들의 주 식수원이었다.

“수월이란 기생이 이 마을에 살았는데, 외모가 워낙 뛰어나서 관리들이 여색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하더군.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뒤에 그 자리를 깊게 팠고 이후에 못이 됐다 하지.”(송응률·76·안성리)

“아니야, 자네. 이 못 근처에는 양귀비만큼 예뻤던 수월이란 기생이 살긴 살았는데, 그녀를 사모한 대정 원님이 당시 이 고장에 물이 없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연못을 파줬다고 들었어.”(임군철·76·안성리)

‘수월이못’을 둘러싸고 마을 주민들이 옥신각신 그 유래를 전한다. 이야기 결에는 물이 귀했던 시대적인 상황과 마을 사람들의 척박한 삶이 조심스레 묻어나온다. 그 덕에 사람들도, 철새, 풀들도 이 물에 기대어산다. 11월말, 늦가을에 만난 이곳은 여전히 뭇생명들의 안식처였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게 되면 이곳 물은 깨끗하게 자연정화되고는 했지. 복원력이 빼어난 셈이지. 고여 있는 물인 것 같아도 아직도 냄새없이 깨끗해.”(2008년 73세 조이전 할아버지) 조씨의 말을 빌리면, 이곳 물은 구억리 ‘다리논’에서 흘러들어와 ‘여못창’, ‘정태훌’로 건너간다.

이 수월이못은 과거 식수처로도 이용되었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였다. 식물로는 여뀌, 마름, 좀나팔꽃, 한련초가 자라고 수련, 네가래, 마름, 개구리밥이 둥둥 떠 있다.

연못의 가장자리와 중앙부에는 네가래가 우점하고 가래, 마름 등이 듬성듬성 분포하고 있고, 수심이 40∼50cm 정도되는 지역에는 드물게 송이고랭이, 큰고랭이, 애기부들 등이 나타나고 있다.

잉어, 붕어, 미꾸라지들이 서식해 날마다 백로류를 비롯한 조류들이 찾아온다. 수량이 풍부한 곳에 물매암이, 소금쟁이, 물달팽이, 참개구리, 황소개구리 등의 동물들도 관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로, 청둥오리들이 날아들고 각종 물새들이 수월이못을 보금자리 삼아 알을 낳고 서식할 정도로 먹이가 끊이지 않는 등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잘 보전되었었다. 새들의 먹이가 되는 잉어, 붕어, 미꾸라지가 풍부해 동네 아이들의 낚시와 투망질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생태계의 포식자 황소개구리의 출현으로 이곳의 생태계는 급속도로 파괴되어 잉어, 붕어, 미꾸라지가 몇 년 새 자취를 감추고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조차 황소개구리에게 잡혀 먹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슬기와 곤충류들이 아직도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어 여름과 겨울이면 수십 마리의 백로와 작은 물새들이 이곳에서 먹이를 찾고 목을 축이고 간다.

아직은 물고기가 남았는지 2012년3월 답사 때에 낚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서귀포시가 수월이못 정비사업을 하면서 추사 선생의 시들을 돌에 새겨 전시했다.
《작성 120331, 보완 1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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