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목축유적.. 교래리 2소장상잣(잣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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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목축유적.. 교래리 2소장상잣(잣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9.0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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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제주도 출신 관료 高得宗은 목장을 해안지대에서 중산간 지대로의 移設 건의를 하였다.

교래리 2소장상잣(잣담)

위치 ; 교래리 속칭 ‘조린납’(助仁納) 지경. 교래 4거리에서 남서쪽 방향 걸어서 20분 거리
시대 ; 조선후기
유형 ; 목축유적

교래리_2소장상잣
교래리_조린납상잣

 


잣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목축유적이다.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에서 목장이 태동한 배경은 첫째, 방목하던 말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해안지역에서 목초부족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삼림지에서의 방목 필요성 때문이다. 즉, 삼림지 방목의 경우, 목초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피서에 유리한 지역이므로 중산간의 삼림지역에도 방목하자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산간 지역을 개간제한지로 묶어 목장지역으로 지정한 다음, 이 지역에서 주민들의 농경지 개간을 금지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목축지를 확보하려는 정책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429년에 제주도 출신의 관료였던 高得宗은 목장을 해안지대에서 중산간 지대로의 移設을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하였다.


「한라산 변두리 사면 약 4息(120리) 되는 땅에 목장을 축조하여 公私의 말을 가리지 않고 들여보내 방목하게 하고, 장내(목장 안)에 들어가게 되는 居民 60 여 호는 모두 장외로 옮기게 하여 소원하는 대로 땅을 떼어 주십시오.」


이러한 제안이 수용된 뒤, 1430년경부터 중산간 지역에 165리 규모의 잣이 축조되면서 한라산목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목장의 넓이는 제주도 전체 면적의 반을 차지했는데, 가축 중에서 말 사육 두수가 가장 많아 소장마다 10,000~20,000 마리를 방목했다고 한다.(馬의 理解 24쪽, 제주 지역 생활문화사와 향토사 교육 ‘제주민과 말’ 188쪽)


15세기말에 한라산목장은 10개의 所場으로 분할되었다. 한라산목장이란 해발 200m~600m 범위에 설치되었던 목장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목장명칭이며, 주로 十所場(10개의 소장)을 말한다.

여기서 所場이란 중산간 지역에 형성된 大牧場 또는 馬政區劃으로서 그 안에는 字牧場이 있었다. 따라서 한라산목장의 개념에는 소장과 자목장이 모두 포함된다.

제주도의 목장은 10개의 소장 외에 해안목장(우목장), 산간목장(산마장), 도서목장(우도장과 가파도 별둔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字牧場이란 屯馬를 천자문의 글자로 烙印한 후 편성하여 만든 소규모 목장으로, 所場에 포함되었다. 둔마란 25필 규모로 무리를 지어 방목되는 말을 의미한다.

1개의 자목장은 암말 100필과 숫말 11필로 구성되었으며, 군두 1명과 군부 2명, 목자 4명이 자목장[群]을 관리하였다.

조선후기에 제주도에는 李衡祥․李元鎭의 지적처럼 58~64개 목장이 존재하였다. 이 때 목장은 자목장과 동일개념에 해당된다.

山馬場이란 해발 400m 이상에서 설치된 목장으로, 제주도 동부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영정조대에 針場, 上場, 鹿山場으로 분화되었다.


17세기 중반에 중산간 지역에는 11개 소장에 58개 자목장이 분포하였다. 이것은 『耽羅志』(1653년)에 제주목 7개 소장에 38개 자목장, 정의현 3개 소장에 17개 자목장, 대정현 1개 소장에 3개 자목장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8세기로 들어오면서 목장 수는 5~6개 증설되었으며, 목장의 위치가 고지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李衡祥의 『南宦博物』(1703년)에는 제주도에는 63개의 자목장이 분포한 것으로 나타나 목장이 지역적으로 세분화되어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04년에는 방만한 목장운영에 따른 부실화로 인해 중산간 지역의 목장에 대한 재정비 정책이 실시된다.

당시 중산간 목장에 행해진 정비정책은 명칭의 통합과 공간의 재편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관리가 부실하여 마필 사육이 불량한 자목장은 버리고, 규모가 작은 자목장은 큰 자목장으로 통합하는 재정비 정책에 따라 제주도의 삼읍 지역에 분산되었던 자목장들이 십소장(十所場)으로 통폐합됨으로써 중산간 목장운영의 효율을 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주도의 중산간 지역에 재편되어 형성된 10개 소장의 위치는 <탐라지도>(1709년), <제주삼읍도총지도> 및 <제주삼현도>에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십소장의 지역적 분포를 알게 해 준다.


각 소장의 구역을 보면 현재의 읍면 행정구역과 거의 일치한다. 1소장은 현재의 구좌읍 지역, 2소장은 조천읍 지역, 3소장은 한천을 경계로 제주시 동부지역, 4소장은 제주시 서부지역, 5소장은 애월읍 지역, 6소장은 한림읍 한경면 지역, 7소장은 대정읍 지역, 8소장은 옛 중문면 지역, 9소장은 옛 서귀읍과 남원읍·표선면 지역, 10소장은 성산읍 지역이다.


잣이란 중산간 지대에서 방목중인 말들이 해안의 농경지로 내려와 입히는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중산간 지대에 環狀으로 쌓았던 石城이다.

해안지대의 농경지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와의 경계부근에 하잣, 그리고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와 산간지대의 삼림지와의 경계부근에 상잣이 겹담으로 축성되었다.

중잣은 하잣과 상잣 사이의 공간을 이등분하는 잣이다. 소장과 소장 사이 경계선을 선잣이라고 하였다. <제주계록>에서는 잣을 장원(牆垣)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濟州邑誌』에 근거할 때, 상잣은 하잣에 비해 늦은 시기인 18세기 후반인 1780년경부터 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700년대 중반까지 제주도의 관설목장에는 해안지역과 중산간 지대의 경계부근에 하잣이 축성되어 기능이 유지되다가 1700년대 후반에 들어와 상잣(橫墻)이 등장함으로써 제주도의 관설목장에는 하잣과 상잣이 목장의 상하한계선으로 이용되었다고 판단된다.

해발 350~400m 일대에 쌓은 중잣의 형성시기는 古地圖 및 歷史資料가 없어 시기를 단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하잣과 상잣에 비해 형성시기가 늦은 것은 분명하다.


나라의 정책인 만큼 잣은 주민들을 동원해 쌓았을 것이다. 하잣 축조에 필요한 勞動力은 하잣이 설치될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일정 범위를 할당하였다.

잣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높이 150㎝에 폭 80㎝ 정도이며, 양쪽 바깥으로 굵은 돌을 쌓고 그 안에 작은 돌을 담아 넣는 접담(겹담)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작은 돌을 담아 넣는 일을 '소 담는다'라고 말한다.

잣담 위는 평평하게 되어 있다. 겹담으로 쌓는 방법이 어느 정도 담을 견고하게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담을 더 이상 견고하게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마소가 몸을 비비거나 넘나드는 일 따위로 인하여 잣담은 훼손이 빈발했고 마소를 키우는 사람들은 잣을 추리기(보수·정비하기) 위하여 자주 동원되어야 했다. 서귀포시 道順洞의 상잣과 표선면 가시리 구두리오름의 상잣처럼 외담구조도 부분적으로 있었다.(강만익, 2006, 문화유산체험 전문가과정 - 목축문화와 잣성)


목장의 하잣성을 따라 잣을 통과하는 곳에 설치된 일시적인 출입구를 도(梁)라고 한다. 여기에는 필요에 따라 문을 開閉하는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살채기 문이 있었으며, 목장과 촌락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중요하였다.

살체기가 있는 곳을 「살체기도」, 「하잣도」 등으로 불렀다. 하잣도는 살체기뿐만 아니라 돌을 외담으로 쌓아 마소를 몰고 지나갈 때 무너뜨리고 다시 쌓는 방식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곳의 상잣은 돔베오름 서남쪽으로 내창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있다. 높이는 1.2~1.5m 정도, 폭은 1m 정도이고 북서-남동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사람들의 출입이 많지 않은 곳이고 지금은 키 큰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서 마소도 방목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훼손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정조9년(1785)에 편찬된 濟州邑誌(제주읍지)에는 2소장의 둘레가 50리에 달하며, 馬監(마감) 2명의 책임하에 群頭(군두)와 牧子(목자)를 합하여 52명이 792匹(필)의 말을 방목한 것으로 나와 있다. 2소장 하잣의 잣담 굽이 선흘2리에 남아 있다고 하나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작성 120415, 보완 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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