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4․3때, 4백여호 중 3백여호 불에 타.. 가시리 새가름(잃어버린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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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4․3때, 4백여호 중 3백여호 불에 타.. 가시리 새가름(잃어버린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9.20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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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는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에게 희생당한 마을이다.

가시리 새가름(잃어버린마을)터

 

위치 ; 표선면 가시리 가시천 동쪽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주거유적(마을터)

가시리_새가름터 대나무

 

가시리_새가름터 올레

 


가시리는 1948년 5월부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5·10 선거 당일 선거준비를 하던 문상형 가시초등학교 교장과 이장 강팽림이 기습한 무장대에 의해 살해됐다.

또 5월 하순엔 토벌대에 의해 가옥 4채가 불태워졌다.

1948년 11월15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대령) 2대대(대대장 김창봉 대위) 표선 주둔 중대는 가시리 마을로 진입하여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공비토벌 작전상 공비들이 이용하기 쉬운 중산간 마을을 소각하여 주민들을 분산시킴으로써 작전의 원활을 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날 새벽부터 총소리가 소란하였고 이곳저곳에서 불기둥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야산이나 냇가의 나무그늘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피난하지 못한 일부 주민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거나 불에 타 죽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이 때 '달랭이모루'에서도 어린이를 포함하여 안홍규씨 일가 등 10여명이 희생당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노약자 등 30여명이 마을 안에서 희생당했다. 오후가 되어 총성은 멎었으나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고 절절한 울음이 온 마을을 매웠다.

그리고 며칠 후 남아 있던 집조차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고, 주민들은 타다 남은 집을 의지하거나 인근 피난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연고를 찾아 해변마을인 표선리, 토산리, 세화리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4․3 전과정을 통하여 4백여호중 3백여호가 불에 타버렸다. 이와 같이 가시리는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에게 희생당한 마을이다.


가시리에는 본동(동상동, 중동, 동하동), 안좌동, 폭낭모루, 용머리왓, 두리물, 생기동, 뒷뱅듸, 새가름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중산간의 기름진 농토가 많았던 이곳엔 해방 직후 4백여호에 1천6백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 중 새가름은 500여 년 전에 한윤광에 의해 설촌되었다. 한윤광은 가시리 설촌자 한천의 후손이다. 가시리 동쪽의 동내와 마을 서쪽을 흐르는 섯내가 합쳐지는 가시천 동쪽 일대에 10만평의 평원지대이다.

정의현에서 서귀진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었고 곡창지대라 할 만한 곳이라서 마을 규모는 50호까지 이르렀었다. 4․3 사건 당시에는 50호에 2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건을 거치는 동안 25명이 희생되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다.


1949~1950년 가시리의 다른 마을은 복구되었으나 성 밖에 위치한 새가름은 복구되지 않아 동네가 없어졌다. 지금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으나 무성한 대나무 숲이 간간이 있어서 집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이 없어져 버렸지만 가시리 사람들은 여전히 새가름이라고 부른다. 2002년에‘잃어버린마을’표석이 세워졌다.
《작성 1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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