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조선 중기 북수구(北水口)의 문루..일도1동 공신정(공진루,공신루)터(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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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조선 중기 북수구(北水口)의 문루..일도1동 공신정(공진루,공신루)터(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0.16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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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오르면 성안은 물론 한라산에서 넓은 바다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일도1동 공신정(공진루,공신루)터(멸실)

 

위치 ; 제주시 일도1동 1186번지(만덕로6길32)
유형 ; 관아건물터
시대 ; 조선

와흘리_공신정주춧돌

 

건입동_공신정터

 


조선 중기 북수구(北水口)의 문루이다. 효종3년(1652) 8월 심한 비바람으로 남수구와 북수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자,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그 해 겨울부터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3월 11일 북수구를 다시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이원진은 문루를 올리는 날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낙성 잔치를 벌였는데, 두보의 시구 중에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본다.”는 뜻을 따서 공진루라 이름하였다.


순조8년(1808) 목사 한정운(韓鼎運)이 중수한 다음 ‘공진정(拱辰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공진정이 폭우로 다시 무너지자, 순조31년(1831) 목사 이예연(李禮延)이 “물길이 가까워서 노는 사람들이 늘 북적거린다.”고 하여 삼천서당(三泉書堂) 북쪽으로 공진정을 이전하였다.

이 때 공진정 위에 초루(譙樓)를 지어서, 북두성을 바라보며 세운(世運)을 기원하는 사당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사와 관리들이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하였다. 또한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접대하는 장소로서도 활용하였다고 한다.


1897년 12월부터 1901년 7월까지 제주에 유배된 김윤식은 동병상련의 유배인은 물론 제주의 상류층과 함께 기망(旣望·음력 16일) 때면 공신정에 올라 유흥을 즐겼다고 기록해놓았다.(한라일보 140922)

공진루는 헌종14년(1848) 목사 장인식(張寅植)이 중건하고, 고종21년(1884) 목사 심현택이 중수하였으며, 광무8년(1904) 목사 홍중우가 다시 중수하는 등 여러 번 손을 보았다. 그 후 공진루는 일제강점기 때 제주측후소 부지가 되었다가 제주 신사를 지을 때 헐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건물은 측면이 각각 3칸이고 퇴(退)는 없었다. 평면은 18자 방형이고, 축대 위에 세워진 합각지붕 집이었다. 제주 부임해 온 관리들의 생활의 일면을 엿보게 해주는 장소로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말까지만 해도 홍예교를 중심으로 동쪽 높은 언덕에는 공신정이, 서쪽에는 간성(間城)을 끼고 중인문(수복문)이 있었다. 이들 유적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곽흘목사가 1565년 동성을 산지천 동쪽언덕으로 확장하면서 1599년 목사 성윤문이 북과 남에 수구(水口)를 만들게 되었다.

공신정은 원래 북수구에 세웠던 문루(門樓)였다. 그러나 잦은 홍수로 홍예교가 무너지자 목사 이원진이 1665년 다리를 복원하면서 누각을 동쪽 둑 위에 세우고, 이름을 공신루(拱辰樓)로 지었다. 두보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본다는 뜻이었다.

그 뒤 1831년 목사 이예연에 의해 지금의 제주측후소와 감리교회가 있는 높은 언덕으로 옮겨 세우게 됐다. 기존의 누각 주변은 여름이면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거나 목욕하는 이들로 붐벼 누각으로 마땅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은 제주성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어서 여기에 오르면 성안은 물론 한라산에서 넓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목사를 비롯한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즐겨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주변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더욱 아름다웠다. 공신정은 그 뒤로도 장인식(1848), 심현택(1884년), 홍종우(1904년) 등 여러 목사가 보수를 거듭하며 잘 보존돼 왔다.


그러나 1928년 일제가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펴기 위해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짓는다며 공신정을 헐어버렸다. 이 신사는 1945년 해방을 맞아 그 해 10월 건입동 청년들이 부숴 버렸다. 그 후 적산관리업무를 맡았던 세무서가 이 터를 분할해 나누면서 지금은 감리교회가 들어섰다.(한라일보 090105)


2013년 11월 현재 제주기상청이 공신정 터로 신축 이전을 추진하고 있으며 뜻있는 분들과 언론에서는 이를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공신정의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2000년 전후까지 일도2동의 모교회에 공신정 주춧돌 11개가 보존되어 있었으나 하나둘 사라져 행방을 찾지 못하였는데 2013년 11월 조천읍의 모 다원에 6기가 옮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주춧돌은 높이 60㎝, 직경 41㎝ 짜리 3기와 높이 45㎝직경 45㎝ 크기 3기 등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다.(한라일보 131125) 필자가 확인 결과 모다원이란 이레향이었다.(위 사진) 와흘 본향당 남쪽 좁은 길로 500m 지점이다. 2013년12월26일 제주목관아로 이전하였다.


공신정 터는 2014년 1월 현재 제주기상청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발굴공사가 진행중이다.
《작성 120909, 보완 131202, 140127, 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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