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자유인 '스콧 니어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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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자유인 '스콧 니어링'의 삶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4.08.01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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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이지훈 제주시장이 말한 '이 사람이 사는 법'

 

▲ 스콧 니어링(사진 제공=실천문학사)


“저는 청년이 되어 막 대학에 진학했을 때 품었던 마음, 즉 바람직한 제주공동체를 위해 미력하나마 저의 정성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던 첫 마음을 늘 간직하기 위해 지난 30여 년 간 노력해 왔습니다.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했던 것도 그런 다짐을 실천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대만 한다는 지적도 받았고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그동안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 쉰 살을 넘어갈 무렵부터는 노년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던 '스콧 니어링' 부부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전형을 가꾸어 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결심해 시골로 모든 것을 옮겨갔습니다“

 

이는 지난 7월31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지훈 제주시장이 밝힌 기자회견문 내용중 일부이다.

이지훈 시장이 말한 스콧 니어링은 어떤 인물이며 그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이 인물을 거론했을까.

칼럼자는 '스콧 니어링'에 대해 늘 ‘미국의 도사’라는 명칭을 즐겨 써왔다.

교수로써 사회운동가로써 특히 실천적인 생태환경운동가였던 그의 일생은 누구나 닮고싶은 이 시대 우리들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꼭 1백년인 1983년, 1백살이 된 그는 “이제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을 다했다”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마감했다.


이때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채롭다.

“그는 인생의 가장 정점에 이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며 “그것은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이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그의 생애를 얘기한 '스콧 니어링' 한국판 자서전(실천문학사)에서 소설가 김영현은 “그는 1백년의 짧지 않은 기간동안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다. 성인이 아니면서 그런 완전한 삶을 산 사람들은 아마 드물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근본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였던 니어링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죽어가는 수백만의 민간인과 병사들을 보고 절망, 결국 전쟁의 광기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고 재판정에까지 선 인물이다.(그는 반전논문인 ‘거대한 광기’를 포함해 수많은 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했고 그 논문을 출판한 출판사도 함께 기소됐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자기의견을 피력하곤 했는데 그러한 문제들이 사회 전반에 널리 인식되기 위해서는 한참 시간이 흘러가야 할 정도로 앞서간 인물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개인적 자유의 수호자,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자유주의자, 실천적인 생태론자가 된 것이다.

사회의 온갖 냉대에 부딪쳤던 니어링은 첫 번째 아내가 함께 살기를 거부해 떠나버렸고,40대였던 그는 이후 20살 연하이며 도시의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헬렌 노드(헬렌 니어링)와 결혼, 버몬트주의 숲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하고 가난한 생활의 시작이었다.

1945년 8월6일 그의 62번째 생일날 헤리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날 니어링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70년대 80년대에는 호숫가에 니어링 부부가 손수 지은 돌집과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의 ‘화려한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도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이 죽은 뒤 세워진 굿 라이프 센터가 세워질 때는 정관에 그의 환경운동은 물론 정치적 견해도 다 넣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열정적인 삶은 잊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이 존경받은 이유는 그들 부부가 숲속에서 행한 독특하고 절제된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이후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유기농장에서 감자밭을 일구는 이 주름지고 구부정한, 팔꿈치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괴팍한 노인이 금세기초 버트란트 러셀과 클레런스 떼로우에 버금가는 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명을 흥분시켰던 명연설가였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자서전은 소개하고 있다.

또 꾸준하고 인내심 있게 수동톱으로 산더미 같은 나뭇더미와 가지들을 16인치 크기로 잘라 부엌용 난로의 연료로 만드는 조그맣고 깐깐한 노인이 1971년 반전논문을 발표하여 스파이 혐의로 기소돼 1919년 연방법정에 섰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1983년 8월24일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다음내용은 1911년 그가 써놓은 좌우명이다.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 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 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자서전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올리브 슈라이너는 ‘인생’에 이렇게 썼다. ‘지적 순수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한 채 얻은 선이란 어떤 경우에도 영원한 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청년기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고를 지닌 사람은 당대에는 화려한 성공을 거두기 힘들지 몰라도 결코 자신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10여년전 이 책을 읽으며 칼럼자는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졌고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해버린 기억이 있다.

사실 이지훈 제주시장의 경우 스콧 니어링처럼 살고싶어 시골에 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삶의 방식은 그와 전혀 달랐다는 점에서는 겸연쩍은 일로 여겨진다.

지금 이 시간 스콧 니어링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그의 결정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위대하고 진정한 자유인을 꿈꾼다면 '스콧 니어링'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좋은 예로 남아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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