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아폴론과 동굴의 비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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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아폴론과 동굴의 비유(하)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6.12.27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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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굴을 벗어날 용기를 갖고 있는가?

 

 파르나소스 산에서의 아폴론과 아홉 무사이들. 안드레아 만테냐. 

 

플라톤은 그의 제자들과 ‘티아소스’를 조직했는데, 이는 아폴론 신을 따르는 무사이(뮤즈)여신들의 경배를 위한 것이었다. 무사이 여신들의 숭배는 그리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무사이 여신이야말로 철학을 관장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녀들이 관장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기술이었으며 아폴론 신에 대한 헌신을 플라톤 철학의 저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하는 것은 죽음의 한 방식으로 특징을 짓는다. 철학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오직 죽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죽음이 혼과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철학자는 육체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혼으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철학적 명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의 감각적 인식에서 자유로워지고 사유만이 작동되어 흐려지지 않은 철학적 사유로서 육체를 떠난 ‘혼’ 그 자체로 참 존재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육체와 몸을 분리해서 생각한 이원론자이다. 혼은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해져야 하는 그 무엇이다. 이는 곧 종교적인 사유이다. 이러한 종교적 정화(카타르시스)는 이승의 삶에서 결코 완성되기 어렵고 참된 철학이란 그래서 죽음을 동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도 육체적 성질에 젖지 말고 신이 우리를 해방시켜 줄때까지 자신을 육체로부터 순수한 상태로 지켜내야 인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순수한 것에 이르지 못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철학적 인식이 곧 자기 인식이요, 흐려지지 않은 참된 존재자의 인식이라고 본다. 그 ‘인식’이란 혼이 순수하고 영원하며 불멸과 불변과 함께 하는 것으로 방황을 그치고 지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혼은 소멸하지도 않고 계속 살게 되며, 변화를 겪지 않고 한결같은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육체로부터 혼을 해방시키는 것이고, 종교적으로 최후의 약속인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 행복을 누리고 영원히 신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제우스와 올림포스의 신들. 줄리오 로마노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승의 삶은 결코 ‘순수’에 도달 할 수 없다. 그래서 죽으면 사람들의 혼은 일단 지하세계로 간다. 거기서 경건하게 산 사람들은 해방되고 감옥에서 풀려나 청정한 곳에서 살게 된다. 특히 철학으로 순수해진 사람들은 육체 없이 혼이 살게 되며 엘리시움보다 더 아름다운 곳에서 살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의 철학은 종교적 계율의 의미가 있었지만, 더 나아가 종교가 도달한 곳 너머까지 설명한다. 즉 철학을 통해서 순수한 영혼이 도면 혼은 보통의 청정한 거처가 아닌 더 높고 아름다운 거처를 얻는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렇듯 종교와 어느 정도 동일한 길을 걷지만,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함으로서 더 높은 단계라는 고양의식을 내포하게 된다.

다만 철학자의 종교적 고양은 외적인 숭배행위가 없이 혼의 인식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에 의탁하는 경배보다는 감각을 통해 들어온 인식을 버리고 자기 자신과 혼 안에 있는 세계를 향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혼’의 사상은 피타고라스의 ‘혼의 윤회’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피타고라스도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불리는데, 그렇다면 이들의 철학적 인식이 아폴론적 인식이라는 점은 무엇이었을까?

 

아침의 일출을 찬미하는 피타고라스 학파. Fyodor Bronnikov (1869)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유럽 문명의 유형으로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대비시키면서 아폴론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현상의 모든 기쁨과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대로 디오니소스는 도취를 통해 개인의 개별성을 잊고 보다 높은 통일성을 향해 솟아오르는, 즉 비질서의 마술적 제의이며, 개체들은 없어지며 신비로운 일체감으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폴론은 조소와 같이 조형적이고, 디오니소스는 음악과 같이 비조형적이다.

 

철학은 조형과 비조형의 통일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신비적 직관인 디오니소스의 근본 경험과, 아폴론 적인 개념의 종합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열정은 힘이고 원동력은 되지만, 그것은 본성에 대한 근접한 도취일 뿐 근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리하여 아폴론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라든가 인간 개별의 혼이라든가 하는 것을 버리고 각자의 인격을 넘어서서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형식인 무한성의 왕국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승리. Maerten van Heemskerck.

 

지상에 사는 인간은 개별적이며 현상적이다. 즉 신이 아니라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델포이의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곧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불멸성을 소유하지 않았음을 알라는 것이었다.

아폴론의 정신이란 즉 불사의 ‘욕망’과 ‘구원’을 함께 얻는 것으로 자유로운 존재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즉 아폴론은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곧 사라질 ‘없는 존재’이다.

그러한 너 자신을 알고서 개별을 넘어서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그 존재가 초감각, 초시간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폴론의 특징은 예언의 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폴론의 여사제들은 일종의 광기 상태에서 미래를 예언한다. 즉 이성적 사유보다 신적인 광기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신적인 광기란 신적으로 충만한 상태라는 것이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녀 피티아. 존 콜리에

                      

키마이의 시빌레. 로세티 

 

이는 처음에 주로 신과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서 예언녀들을 아폴론의 신부나 애인으로 불렸다. 트로이의 예언녀인 카산드라는 신의 욕망, 즉 신과의 성적 결합을 거부했기에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형벌을 받았다.

 

키마이의 시빌레도 신이 뜻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언을 말하기 전에 그녀의 의사에 반해 아폴론이 격렬하게 애무를 해서 억지로 예언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의 강간수준의 성적인 결합이다. 이처럼 아폴론은 개별적 존재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인간여자와 교접을 통한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도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일종의 은유적 알레고리(우화)이기도 하면서 지혜에 대한 깨우침이다. 그 지혜란 햇빛인 아폴론을 지칭하며, 육체가 소멸되기 전의 동굴에 갇혀 사는 인간의 통속적 한계로는 결코 빛의 속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우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동굴을 벗어날 용기를 갖고 있는가? 현실에 안주하며 그저 익숙한 나날을 보내는 우리의 자화상은 너무나 통속적 삶의 조건들에 찌들려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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