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델포이신탁의 비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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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델포이신탁의 비밀(하)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6.12.3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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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자이다

 

 그리스 민주정치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  Leo von Klenze

델포이신탁의 실례- 그리스 민주정치의 산실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폴리스가 발전함에 따라 새롭게 법과 제도를 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왕들은 피티오라는 사절을 고용해서 델포이의 응답을 받는 임무를 맡겼다.

당시 스파르타는 영토가 커지면서 새로운 영토에 대한 행정부담,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사회불안이 야기되고 있었다. 이에 스파르타인들은 국가를 잘 통치할 법률제정을 위해 델포이를 몇 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피티아의 조언에 의해 여기서 채택된 헌법이 스파르타를 다른 도시국가들과 구분하고 융성하게 한 기여를 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 헌법은 일부는 군주제이고, 일부는 과두제이며, 일부는 민주제인 복잡한 지배체제이다.

델포이의 예언은 스파르타인들이 안건제안과 투표를 주기적으로 하면 나라가 강해 질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용기와 화합을 통해 영광스러운 자유의 집으로 이어지며, 증오에 찬 싸움과 어리석은 파괴를 하면 안 되므로 그 길을 피하라고 하였다. 이 예언에 따라 스파르타인들은 기존의 쾌락적 소비와 사치향락을 버리고 금욕적이고 간결한 군국주의적 제도를 마련했으며, 세력 팽창에 따른 부를 경계하고 돈을 숭배하는 생활양식의 억제를 하였다. 그리고 부의 상징인 은화주조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점점 더 강대해져서 제국화되었고, 전사들이 고국에 보낸 금과 은, 노예들로 인해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어, 결국 스파르타경제체제는 와해되었다.

아테네도 헌법의 틀을 만들기 위해 델포이신탁에 의지했다. 기원전 6세기경 아테네는 가난한 자들이 토지재분배를 요구하면서 사회적 긴장관계가 촉발되었다. 이에 아테네는 솔론에게 경제와 법률을 정비할 전권을 주었다. 그는 귀족정치를 약화시키고 민주정치를 위한 대범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피티아가 타협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언에 따른 것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시원이라는 아테네민주주의는 이렇듯 델포이신전 여사제의 조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예언에서 “배 한복판에서 키잡이의 일을 똑바로 안내하시오. 그러면 많은 아테네인들이 그대를 도울 것이오”라고 하였다. 즉 중용이 솔론의 법률제정 슬로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빛 진 사람들을 노예상태에서 풀어주었는데, 부를 반대하는 인위적 평등주의는 거부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라는 부분까지는 혁명적으로 가지 않았고, 귀족중심에서 평민도 참여하는 길을 열어서 물질적 부를 쌓은 사람의 의회진입을 허용했다.

솔론은 아폴론신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했으며, 피티아를 요직에 발탁하고 신성한 법과 의식을 관장하는 관리의 임용권도 맡겼다. 그러므로 델포이신탁은 민주주의 이상을 태생시킨 두 나라의 융성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델포이의 여사제. 미켈란젤로 

신탁의 자문은 그 후로도 공공연한 정치훈육을 지속했고, 점차로 신탁은 애매한 영적 영역뿐만 아니라 통치의 어려운 부분까지 도와주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델포이의 사제들은 계몽과 도덕의 스승이 되었고, 우리가 부르는 인도주의의 기초가 된 것이다.

아디톤의 여사제는 맹세와 위엄, 인간생명 존중, 옳고 그름에 대한 ‘양심’의 성장같은 사회적 이노베이션을 강조했다. 당시에는 그러한 가치들이 매우 급진적이어서 구체적인 사회적 규범으로까지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인류의 정신사에서 한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당시에는 복수가 일반화 되어 있었고, 끝없는 악순환을 불렀다. 피티아는 복수를 하기 보다는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유무죄여부는 드러난 행위보다 내면적으로 평가해야한다고 알려주었다. 오늘날 ‘양심’의 준거가 된 지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면보다 선의의 노력에 대한 관점을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정직한 빈곤을 좋다고 하였고, 사치스런 거만을 경멸했으며, 부유한 참배자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피티아는 노예를 수천명이상 풀어주도록 했으며, 천한 사람을 죽인자도 귀족일지라도 살인자이기 때문에 신에게 정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델포이신탁의 수세기에 걸친 조언은 거친 말과 독단을 피하고 용서와 자유를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해 졌으며, 신탁의 보수성과는 달리 다른 종교나 종파도 인정하는 폭넓음을 보여주었다. 그 예로 피티아는 크세노폰 장군이 신들을 기뻐하게 하는 방법을 묻자, 그 지역이나 나라의 관습에 따르고 그곳의 인물과 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와 실론. Johann Georg Platzer

델포이신탁과 리디아제국의 몰락

델포이신탁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리디아왕국의 크로이소스는 기원전 560년부터 왕좌에 올라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의 대부분의 도시들, 그리고 지중해 해안선의 대부분의 도시를 정복했다. 그는 우화작가로 알려진 이솝에게 조정의 관직도 주었고, 아시아와 그리스의 관계에서도 상호 관습과 종교를 모두 인정하는 유연한 정책을 취했다. 아테네의 실론도 그의 인품에 반해서 크로이소스를 자주 찾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그가 통치 10년 만에 신탁이 어디가 가장 정확한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델포이신탁, 아바에신탁, 디디마신탁, 도도나신탁, 리비아사막의 시와신탁, 아테네북부의 오로푸스신탁, 레바데아신탁 등 일곱 군데의 신탁소를 고른 왕은 ‘특정한 날에 왕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라오게 하였다. 100일 동안 사절들은 신탁을 돌아왔는데, 그중에서 델포이신탁이 가장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한다. 특정한 그날에 왕은 양고기와 거북이찜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델포이신전의 여사제는 “솥과 뚜껑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용기에서 등딱지가 단단한 거북이가 양의 살과 함께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며 끓고 있는 냄새가 난다”고 정확히 예언했던 것이다.

그녀의 정확성에 크게 기뻐한 크로이소스왕은 많은 선물을 하고, 페르시아를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신탁을 구했다. 당시 키루스대제의 지배하에 있던 페르시아는 리디아의 국경을 공격하고 있었고, 크로이소스왕은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피티아는 역사에 길이 남는 답변을 이때 하였는데, “그가 만약 페르시아로 진격한다면, 강력한 제국 하나가 사라질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 크로이소스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페르시아를 공격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크로이소스왕은 떠돌이로 살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리디아인들은 놀라서 신탁이 왜 틀렸는지 사절을 보냈다. 그러자 델포이사람들은 예언은 정확했으며, 사라진 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왕국일 뿐이라고 했다. 즉 해석을 자의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왕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고 하는데,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에 패배하고 곧바로 죽임을 당했다고도 하며, 그의 오랜 혈통이 끝났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 원정길에 헬레스폰트(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에서의 크세륵세스. Adrien Guignet

델포이신탁과 페르시아전쟁

다음으로는 유명한 페르시아전쟁에서의 델포이신탁의 영향이다. 기원전 5세기경 페르시아는 리디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이오니아, 메소포타미아, 발칸과 히말라야까지 정복했다. 서양사에서의 진정한 첫 세계 제국이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초입에 그리스가 버티는 것이 문제였다. 비록 그리스는 느슨한 국가연합이었지만, 내부적 갈등보다는 외적을 막는데 힘을 합쳤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는 그리스 침공을 했으나 마라톤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는 새로운 왕 크세르크세스1세가 등장했다. 그는 마라톤전투의 설욕과 부친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중에서도 페르시아의 보급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테네의 정복이 가장 중요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최우선으로 침공이 가능한 대도시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테네인들은 즉시 델포이로 신탁을 구했다. 그러나 피티아는 아테네를 지키려는 자는 누구나 잔인한 학살을 당하고 고통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그리스인들은 달아나라고 조언했다. 절망에 사로잡힌 아테네인들은 이것을 해결할 도움이 없겠냐고 다시 신탁을 의뢰했다. 그러자 피티아는 아테네는 파멸할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구제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피티아는 이 도시의 건설자인 아테나여신을 제치고 제우스에게 의뢰한 결과, 간신히 정보를 얻었는데, “너와 네 자손에게 큰 은혜가 될 난공불락의 나무벽”을 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된 원조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달아나라고 조언했다.

 

   “다가오는 말들, 행진하는 발들, 무장한 군대를 넋 놓고 기다리지 말아라.

   도망가라. 등을 돌려라. 그래도 어쨌든 전투는 만난다.

   거룩한 살라미스여. 그대는 파종기와 수확기 사이에 많은 여인의 아들들을 죽일 것이다.“

 

이 말은 첫 번째 신탁보다는 나았지만, 답변은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사절단이 들고 돌아온 답은 곧 갑론을박에 붙여졌다. 한 무리는 나무 벽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라고 이해했다. 원로들은 성벽강화를 위해서 목재를 더 많이 사용하여 쌓으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탁월한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나무 벽을 선박으로 해석했다. 해군력의 강화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설득에 성공해서 그는 200대의 삼단노선 함대를 건조하게 되었다. 이 배는 최고 200명의 노잡이가 있으며, 뱃머리에는 쇠로 만든 충각을 달아 충돌에 강했다. 병사도 최고 40명을 태워서 백병전에도 능했다. 그리고 그는 피티아가 말한 대량의 사망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페르시아 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아테네의 시민과 전사들은 아테네를 버리고 살라미스에서 많은 배를 만들어 기다린 것이다.

아테네가 해전을 준비하는 동안 스파르타도 신탁을 구하러 델포이로 갔다. 거기서 여사제는 그리스가 바람에 기도하라고 조언을 했다. 이 소식은 신속히 퍼져 나가 자유를 잃고 싶지 않은 모든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정성껏 기도를 했다. 델포이에서도 제단을 만들고 바람에게 제물을 바쳤다.

기원전 480년 여름, 페르시아함대가 헬레스폰트에서 에게해로 들어와 마그네시아연안에 접근했다. 배들이 어찌나 많은지 1천여 척에 달해서, 일부만 육지에 정박하고 대부분은 해안에 줄지어 닻을 내렸다. 그런데, 맑고 고요했던 바다가 물결이 일기 시작하더니 해변으로 거세게 몰아치며 돌풍이 페르시아함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무려 사흘간 계속된 폭풍은 페르시아함대를 파괴시키고 난파선의 잔해가 해안곳곳에 흩어졌다. 여기서 페르시아는 해군력의 절반을 잃었다.

 

아테네를 파괴하는 페르시아군. (영화 '300, 제국의부활'중에서)

한편 페르시아 육군은 해협을 따라 진격해 테르모필레에 주둔한 스파르타의 300명 군사와 동맹군을 만났다. 좁은 통로였기에 쉽게 뚫지 못했으나, 그 지역 지형을 잘 아는 현지인의 도움으로 우회하여 결국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노예병 7,000명과 동맹군을 모두 떠나보내고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군으로 저항하다 전멸 당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인들은 도시를 버리고 살라미스 섬으로 갔다. 페르시아 인들은 저항 없이 아테네로 들어가 약탈하고 도시와 신전을 불태웠다. 작은 무리의 방어대가 아크로폴리스성벽에 나무를 쌓고 저항했으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살라미스 해전. 좌측 중앙의 활을 든 여전사가 아르테미시아1세다. Kaulbach, Wilhelm von(1868)

살라미스에서 불길에 휩싸인 아테네를 보면서 아테네인들은 300여척으로 늘어난 함대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아직도 두 배에 달하는 페르시아 해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빠르고 가벼운 배를 가진 그들에 비해 좁은 해협에서 싸워야 승산이 있다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생각하고 살라미스해협에서 일전을 치르기로 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육지의 좋은 자리를 잡고 지켜보면서 해군의 살라미스를 둘러싼 봉쇄작전을 지켜보았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살라미스해협은 대형을 깨야 할 정도로 좁아서 배의 측면들이 노출되었다. 그리스의 배들은 청동뱃머리로 적 함대를 깨고 무장병들이 배에 올라 육탄전을 벌였다. 앞쪽의 배들이 당하고 있는데도, 뒤의 배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의식해 계속 앞으로 전진하였다. 결국 이 해전은 그리스의 대승으로 끝났고, 페르시아는 퇴각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군의 숫자가 170만이라고 기록했는데 후에 역사가들은 30만정도로 보고 있다.

승산 없는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인들은 델포이에 12미터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황금삼각대를 세워 기념을 삼았다. 델포이의 여사제는 아테네가 하늘의 독수리처럼 위대한 도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국 아테네는 뛰어난 정치가와 극작가, 예술가와 역사가, 과학자와 건축가, 철학자들이 배출되며 인류역사의 정치와 정신사, 예술과 문화사에 뛰어난 도시가 되었다. 그들의 뛰어난 건축기술은 파르테논신전을 세웠고, 지중해의 문화적 교육적 융성과 인류의 영감을 주는 독수리의 기상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델포이신탁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델포이에 대해 존경하였거나 숭배의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전쟁 후 10년 뒤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윤리와 도덕적 철학에 대한 완고한 탐구를 하며 유명한 사색가가 되었다.

델포이를 찾아간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피티아에게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피티아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 답변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탐구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이 예언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나중에 아테네의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명으로 기소된 재판에서, 자신의 무지를 깊이 깨닫고 지혜를 얻기 위해 평생 탐구를 했는데, 결국은 감동을 받지 못하고 떠난다고 말했다. 아내 크산티페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찌들고 평판도 나빠졌어도, 그는 신탁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정말로 하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신탁을 해석했다. 진정한 지혜는 신들의 전유물이라는 부연과 함께.

소크라테스는 종종 피티아의 신탁과 델포이의 전승된 금언들을 인용했는데,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도 델포이의 기둥에 새겨진 신탁의 답변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델포이신탁이 개인과 국가발전에 꼭 필요한 길잡이였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다비드 작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적 유토피아에서는 델포이의 여사제에게 지도적인 역할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법률’과 ‘국가’에서 이 여자 예언자에게 영예롭고 책임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제사와 유물관리, 규칙과 원리를 해석할 관리의 인사권도 그녀가 가져야 하고, 신탁의 오래된 전통과 지혜를 그리스의 법률과 종교에서의 삶의 수호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델포이신전에는 플라톤이 죽은 후에 그의 석비를 신들의 상들 사이에 세워 경의를 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년마다 열리는 범그리스권의 피티아 경기의 승리자들 목록 작성에 기여했다. 4개에 석판에 기록된 그의 목록은 당시 200여년의 운동경기 역사를 체계화한 주요사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탐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 찬 사람으로 텔레파시에 의한 파동이론으로 신탁의 여사제가 지닌 여러가지 초능력에 매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델포이의 황금 트리포드와 피티아 여사제. (기원전 330년경. 피톤 출토)

신탁소의 몰락

델포이의 신전은 기원전 373년에 발생한 거대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 뒤 수십 년간 노력으로 신전이 재건되었으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과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점령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세계는 이제 그리스 권을 넘어 다양한 문화의 시대가 도래 했다. 이제 피티아의 신탁은 중요한 정책을 묻는 질문은 없었고, 극히 사적이고 실용적인 신탁만 남았다. 전염병퇴치법이나 귀향이 가능한지를 묻거나 마을을 공략하는 방법을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원전 279년 켈트족이 쳐들어 왔으나 지진과 눈보라로 퇴각했다. 기원전 146년에는 세력을 넓혀가던 로마가 그리스에 세력을 확장하더니 독재자인 술라는 델포이의 보물을 약탈해갔다. 술라를 두려워한 키케로는 신탁을 찾아 방법을 물었는데, 피티아는 그에게 다른 사람의 견해에 따르지 말고 자신의 천성을 삶의 길잡이로 삼으라는 조언을 받았다. 키케로는 나중에 위대한 웅변가가 되었다.

로마가 고대사회의 중심이 된 후에도 델포이는 그리스를 동경하는 황제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도티미안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전형적인 그리스신봉자들이었다. 플루타르크는 서기 90년경 델피의 최고사제로 봉사했다.

그러나 서기 2세기 무렵부터 기독교주의자들은 피티아를 악마로 몰기 시작했고, 아폴론은 사탄으로 격하되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해서 기존의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그는 관료제도에 기독교를 이용했다.

그러나 361년 율리아누스황제는 델포이신전을 복구하고 이교적 신들을 복구하려고 하였으나 2년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피티아에게 질문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을 때, 그녀는 우울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왕에게 전하시오.

   아름답게 공들여 지어진 집은 무너졌다고.

   집에는 아폴론도 없으며, 신성한 월계수 잎도 없다고.

   샘들은 이제 잠잠하고, 목소리는 조용하다고.

 

최후의 로마인인 율리아누스는 최후의 여사제에게 희망을 기대했지만, 신들의 밝은 미래를 예측하는 어떤 암시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는 기독교라는 기나긴 유일신의 군림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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