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에페소스와 아르테미스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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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에페소스와 아르테미스 신앙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6.12.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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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의 주인은 아르테미스일까 성모마리아일까?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분수. 다산을 상징하는 앞가슴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여신이며, 출산의 여신이기도 하고, 대지와 다산의 여신으로도 여겨진다.

아르테미스는 많이 알려진 여신이었으나 숭배의 대상으로는 부차적인 여신으로, 주로 에페소스에서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그것은 그 지역의 토착신과 결합하여 대지의 여신인 시벨레와 동일시된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풍만한 육체의 성숙한 여성 이미지로 주로 그려지는데, 초기에는 염소 가죽을 올려놓은 나무제단에 모시는 형태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에페소스 지역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리마코스의 아르테미스 찬가에는, 그 신전이 아마존족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홍수로 사라졌다. 그러다 기원전 550년경에 리디아의 왕인 크로이소스가 지원하여 크레타 출신 케르시프론과 그의 아들인 메타게네스가 10년에 걸쳐 다시 세웠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원전 358년 7월 21일 공명심에 불타는 과대망상의 젊은이 헤로스트라투스가 불을 질러서 파괴되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신전이 다시 지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게 된다.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당대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전차를 위한 길이 나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포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16세기에 그려진 아르테미스 신전 공사묘사도. Hendrik van Cleve

 

 아르테미스 신전의 축소 복원 건물. 에페소스 소재.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복원 그래픽.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타고 있던 그날, 마케도니아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르테미스 신전의 방화를 왜 아르테미스는 막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그녀가 펠라로 가서 신전을 비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에페소스에 들렀다. 그리고 불타버린 아르테미스 신전을 다시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페소스 시민들은 신으로 불린 알렉산드로스가 다른 신의 신전을 짓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가 재건하기로 하고, 신전을 신축하기 위해 에페소스의 모든 여자들이 귀금속을 바쳐서 재건된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보다 4배가 큰 규모였다. 착공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인 기원전 323년에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신전은 규모가 더 커졌는데,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12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 번째 신전은 600년간 유지되었다.

이 신전은 에페소스의 상징과도 같았다. 에페소스인들은 스스로 사원지킴이라는 뜻으로 전각지기(temple keeper)라고 불렀다. 아시아지역에서는 이 신전을 보려고 순례객들이 끊임없이 모여 들었다. 물론 에페소스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거점도시이기도 하였다. 에페소스의 은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들어 팔면서 커다란 부를 쌓았다.

신전의 사제들은 남성이 거세된 환관들이 주로 맡았는데, 이들은 고위층의 승려였고, 독신수행을 하는 승려집단이 여러 제전을 관장하면서 신전을 지켰다. 특이한 점은 신전의 수입을 위해서 매춘부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축제는 화려한 행렬과 희생제물, 여신의 성상이 등장했다. 이 행렬은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피온 산 주변을 행진하고, 타르겔리온의 달 6일에 신전에서 오르티기아 동굴까지 행진을 한다. 그리고 사냥의 여신답게 아르테미스 여신으로 분장한 여성을 사냥꾼들과 개들이 뒤따르는 행진을 한다. 이 마지막 행진은 초창기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강림하게 하는 제의였으나, 점차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정하게 되면서 마치 미녀선발대회 같은 관문처럼 되어버렸다.

 

 아르테미스. Francesco Hayez

에페소스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기록에 여러 번 등장한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9장 21절에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에페소스에서 사도 바울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설교를 하자, 아르테미스 신상모형장사로 부를 쌓던 데메드리오가 "바울이라는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설교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위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라고 직공들과 시민들을 선동했다. 덕분에 바울과 같이 선교활동을 하던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 아리스다고가 연극장에 잡혀갔고 2시간이나 아르테미스를 찬양하며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척하는 집회가 벌어졌는데, 시의 지도자인 서기장이 시민들에게 "항의할 것이 있으면, 총독들과 민회에 고소하여 시비를 가리십시오. 불법집회를 일으키는 것은 책망 받을 것이니 신중하지 못합니다."라면서 이성을 되찾아서 진정하도록 설득했다.

기독교에서는 위경논란이 있는 2세기의 요한행전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도 요한이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면서, 악령을 몰아내자 갑자기 신전의 제단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신전의 반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비탄에 잠겨 있던 에페소스 사람들이 이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전한다.

 

 아르테미스와 사냥의 님프들. 티치아노

서기 268년,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트족의 약탈로 파괴되었다. 그 뒤에 신전이 재건되었는지 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의 기록이 불확실하다. 학자들은 에페소스의 토착신에 대한 애착으로 보아서 재건을 하였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점차 기독교의 강세로 인해 이 신전은 퇴색하게 되었다. 신전의 석재 일부는 다른 건물의 건축에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의 기둥 몇 개는 이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이었다. 그리고 신전의 몇몇 석상과 재료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여러 건물들에 재활용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스의 성 요한 성당에도 이 석재들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신전은 점차 퇴색의 길을 걷다가 서기 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거나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비가 오면 늪지대로 변하는 사원일대에는 돌기둥 하나만 남아서 쓸쓸함을 더해준다.

이러한 아르테미스 신전에 대한 자료들은 주로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와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애에 기록되어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괴된 뒤 오랫동안 잊혀 졌다가, 대영박물관의 ‘존 터틀 우드’ 탐사대가 6년의 탐색 끝에 1869년에 재발견하였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상의 복제물. 서기 1세기경.

에페소스의 유물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유방을 주렁주렁 매단 아르테미스 여신상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들의 어머니이며, 모든 동물의 여성인 시빌레와 혼합된 이미지이다. 그런데,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린 방울들이 사실은 아마존 여전사들의 전승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스의 오래 전 지배자는 아마존 여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토속신으로 위대한 어머니 여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전쟁에서 돌아오면 전리품과 함께 남자들의 남근을 잘라서 그 어머니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아마존 시대가 끝나고 리디아가 들어섰을 때나 카리아인이 지배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그녀의 이름이 시빌레라고 불린 것만 달라졌다. 어떤 신도는 시벨레 여신을 위해서 자신의 남근을 거세해서 공양을 했다고도 한다. 거세한 남성은 여성복장을 하고 여신을 따라서 여성적 정체성을 자기와 동일시했다.

시빌레 신전은 본래 여사제가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점차 신전의 규모가 커지고 고대사회에서 경제적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점차 거세된 환관 남성이 자리 잡게 된다. 최고의 사제들이 가부장제의 확산에 따라 점차 고위직을 계승하면서 여사제들은 난교파티나 매춘에도 관여하였다. 그녀들은 광란의 음악과 드럼에 술을 곁들여 노래와 춤을 추었다. 이러한 제전은 시빌레의 아들인 아티스와 관련된 비교의식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아티스는 거세되었다가 다시 부활한 자로 재생(再生, 還生)의 비의(秘儀)와 관련된 인물이다.

닥틸은 여신의 수행원인데, 그리스어로 ‘손가락’을 의미하지만, 작은 남근을 말하기도 하고, 크레타 섬에서 아기 제우스를 모셨던 반신빈인인 쿠레스를 가리키기도 한다. 닥틸은 대장장이이거나 병을 치유하는 마술사들이었다. 그리고 금속기술과 수학, 알파벳을 인간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축제에서는 프리기아의 쿠르반테스라는 무녀가 등장하는데, 아르테미스의 시녀이기도 한 그녀는 밤새 춤추면서 소리치고 춤과 노래로 여신이 주재하는 제전의 무아지경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숭배의식의 초절정에 이르면, 드럼과 창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 난교파티로 이어졌다.

후에 들어온 이오니아인들은 자신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이 토속신의 융합을 도모했다. 처녀신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신으로 살아 있는 제물을 좋아했고, 아마존 여전사들은 전리품과 사제들의 남근거세는 비슷한 이미지로서, 상호 연관성이 있었다. 에페소스의 여신의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것은 다산의 상징이기보다는 바로 수컷을 적으로 간주하는 아르테미스와 아마존 여전사의 남근제물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고,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하는 편이다. 토속신앙과 이민자의 신이 만나서 절묘한 신앙으로 재탄생한 융복합의 산물인 셈이다.

 

성모 마리아의 집. 성모 마리아는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에페소스는 예수가 죽자 제자인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지키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에페소스에는 도시의 중심에 사도 요한의 무덤 터가 있으며, 성 요한 교회가 아야소크르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기독교가 흥하기 전, 에페소스는 기원전 7세기경부터 번성하였으나,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 전쟁 후부터 쇠락했다. 그러다가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부흥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대 건축이 완성되었다.

에페소스에는 코린트식 기둥의 켈수스 도서관과 고대 에페소스 유적, 성모 마리아의 집, 성 요한의 교회가 관광객을 불러 들인다. 성요한 교회는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요한이 매장 되었던 자리에 서기 6세기경에 지어졌다.

성모 마리아는 메리예마나(Meryemana)라고 하는 뷸뷸(Bülbül) 산중에서 사도 요한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곳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여기에는 오늘날 거대한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성모 마리아의 집터에는 세례 터도 남아 있다.

 

에페소스의 동상 복제품. 서기 1세기경. 이 신상은 다리가 없는데, 그 이유는 아르테미스를 대지와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

 

아르테미스 신전은 드물게는 디아나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신전이 세워졌던 흔적은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이 곳이 신성한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서기 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기까지 세 번이나 재건되었었다.

 

 에페소스 고대 유적. 작은 지역이지만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켈수스 도서관. 2세기 중반 아시아 주 총독이던 켈수스를 기념하여 지어진 화려한 석주 건물.

 

야외극장. 파나 유르산 언덕에 지어진 야외극장은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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