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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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0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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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죽란시사- 복사꽃과 오얏꽃은 말이 없어도 저절로 그 밑에 길이 난다

법정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길상사로 찾아가 뵌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훨씬 전부터 나는 법정스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청소년기에 월간지 ‘샘터’를 사면 맨 뒷장에 법정스님의 짧은 글이 실렸는데, 나도 그 글들을 읽으면서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월간 샘터가 법정스님의 그 글 때문에 발행부수가 올라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열반하시기 얼마 전에 인터뷰 겸 대담을 위해서 길상사로 법정스님을 찾았으나, 이미 발병한 뒤여서 시간을 잡지 못해 인터뷰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깐 동안 길상사에서 만나 뵈었을 때, 자기가 하실 말씀은 구업이 될 만큼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은 말을 하셨고 책으로도 내셨다면서 고사를 하셨다.

특히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절판되기도 하였으나 품귀 현상으로 책 가격이 폭등하자 다시 한시적으로 출판을 하기도 하였다.


그 분의 평소 활동을 간결하게 드러낸 “맑고 향기롭게”라는 표어와도 잘 어울리는 성품을 지녔다.
그 분의 머리맡에는 늘 눈여겨보는 책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였다.

 

법정스님


향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저절로 마음의 길이 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말에 “桃李不言 下自成蹊(복사꽃과 오얏꽃은 말이 없어도 저절로 그 밑에는 길이 난다)”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 소개하는 정약용의 글도 그런 취지의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저절로 웃음이 일어난다.


다산 정약용 같은 사람, 아마도 법정이 그랬을 듯싶다. 그 분도 이승의 옷을 벗고 열반의 길을 떠났지만, 그 분의 향기는 이리도 은은한데 내 인생도 어디쯤에서 그쳤을 때 저절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의 길이 날지 모르겠다. 


죽란시사서첩(竹欄詩社書帖)

지은이: 정약용(1762~1836). 조선말기의 학자.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실학을 계승하여 집대성했다. 주요 저서에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이 있다.


위아래로 5,000년이나 되는 시간 속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 가로세로 3만 리나 되는 넓은 땅 위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나라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도, 나이로 보면 젊음과 늙음의 차이가 있는데다가, 그 사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시골이면, 서로 만난다 해도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야 하니, 만나는 즐거움이 적을 것이다. 게다가 죽을 때까지 서로 알지 못한 채 살다가 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더 많겠는가.


더구나 이 몇 가지 경우 외에도, 또 출세한 사람과 그렇지 못함에 있어서 차이가 나고, 취미나 뜻하는 바가 서로 다르면, 비록 동갑내기이고 사는 곳이 가까운 이웃이라고 해도, 서로 더불어 사귀거나 잔치를 해가며 재미있게 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이 모두 인생에서 친구로 사귀어 어울리는 범위가 좁아지는 까닭인데, 우리나라는 그 경우가 더 심하다 하겠다.


내가 일찍이 이숙(邇叔) 채홍원(蔡弘遠)과 더불어 시 모임을 결성하여 함께 어울려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자 의논한 일이 있었다. 이숙이, “나와 그대는 동갑이니, 우리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과 아홉 살 적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와 그대가 모두 동의하는 사람을 골라 동인으로 삼도록 하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과 아홉 살 적은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면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므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하고, 또 앉아 있다가도 나이 많은 이가 들어오면 일어나야 하니, 너무 번거롭게 된다. 그래서 우리보다 네 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우리보다 네 살 적은 사람에서 끊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열다섯 사람을 골라냈는데, 이유수, 홍시재, 이석하, 이치훈, 이주석, 한치응, 유원명, 심규로, 윤지눌, 신성모, 한백원, 이중련과 우리 형제 정약전과 약용, 채홍원이 바로 그 동인들이다.


이 열다섯 사람은 서로 비슷한 나이 또래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살며, 태평한 시대에 벼슬하여 그 이름이 가지런히 신적(臣籍)에 올라 있고, 그 뜻하는 바나 취미가 서로 비슷한 무리들이다. 그러니 모임을 만들어 즐겁게 지내며 태평한 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모임이 이루어지자 서로 약속하기를,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셔가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이 어린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주선토록 하여 차례대로 나이 많은 사람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게 한다.

정기 모임 외에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 턱 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 턱 내고, 승진한 사람도 한턱내고,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한 턱 내도록 한다” 라고 규정했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기록하고 그 제목을 붙이기를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라 했다. 그리한 것은 그 모임이 대부분 우리집인 죽란사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번옹(樊翁:채홍원의 父)께서 이 일에 대해 들으시고는 탄식하며, “훌륭하구나! 이 모임이여. 나는 젊었을 때 어찌하여 이런 모임을 만들지 못했던고? 이야말로 모두가 우리 성상께서 20년 내내 백성들을 훌륭하게 길러내고, 인재를 양성해 내신 결과로다. 한 번 모일 때마다 임금님의 은택을 노래하고 읊조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부질없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나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숙이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기에 번옹이 경계해 주신 말씀을 함께 적어서 서문으로 삼는다.

 

 

다산 정약용 초상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남송의 학자 조희곡(趙希鵠1195-1242)은 『동천청록집(洞天淸祿集)』의 ‘고화변(古畵辨)’에서 이렇게 읊었다.

胸中有萬卷書       가슴속에는 만 권의 책이 있고
目飽前代奇蹟       눈으로는 앞 시대의 기이한 명적(名蹟)을 실컷 보며
又車轍馬跡半天下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절반은 되어야
方可下筆            비로소 붓을 댈 수 있으니
此豈賤者之事哉     이 어찌 천한 자의 일이라 하겠는가


또 명대(明代)의 문인이며 서예가인 동기창(董其昌1555년 ~ 1636년)은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라는 말로 이를 간추렸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시서화의 창작 및 감식에 뛰어났으며 명대 최고의 문인화가 및 화론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고, 남종화를 대성함으로써 당시의 화단을 남종화 일색으로 만들기도 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돌아다닌 사람이라야 이 땅에 살다간 은혜를 조금이나 갚을 수 있다고나 할까?

인도의 명상가인 오쇼 라즈니쉬는 10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3만권을 넘게 읽은 애독가(愛讀家)였고, 대부분의 유명한 저술가와 작가는 만 권의 책을 읽은 후에야 자신의 글을 썼고, 정약용은 5천권의 책을 읽어야 선비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모름지기 남자는 다섯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두보’도 말하였다.

전자제품이나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은 사용설명서가 함께 따라오지만, 그것과는 달리 매뉴얼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인생의 고비마다 적절한 조언자나 길을 가르쳐 주는 스승을 만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결국은 스스로 길을 찾고 지혜를 간구하고, 삶을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고독한 인생길이라는 것이다.

독서는 비교적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인생의 나침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나 부귀가 인생의 강을 건너는 확실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재물이나 명예같은 것은 저절로 따라오면 모를까 그것만을 좆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강을 효과적으로 건너는 데는 부적합하다. 대부분 돈을 좆다가 인생의 낭패를 보고 인생 후반전이 되었는데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주변에 기생하는 룸펜(Lumpen)이 되어 폐인처럼 떠도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책을 통한 멘토(mentor: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충실한 조언자로, 트로이 원정을 떠나기 전에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에게 맡기는데, 이런 까닭으로 멘토가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와의 만남, 현실의 막다른 길에서 끝까지 인생다움을 찾은 각자(覺者)가 있으니 그가 다산 정약용 같은 사람이다.

경기도 남양주 마재마을(馬峴)에는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묘소가 있다.
여유당이라는 이름은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若畏四隣)”는 노자의 말을 빌어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고 칩거한 것에서 연유했다. 그렇게 조심했던 다산이었건만 그는 결국 유배객이 되어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 57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고,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줄곧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즉 경학을 통해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천하와 세상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다산은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다섯가지 학에 관해서 그 폐단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론 위주의 성리철학으로 윤색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자, 맹자의 본지(本旨)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결과로 <논어고금주> 48권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9권 등 육경과 사서에 대한 232권의 방대한 저술로 남았고, 기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등 실학서적까지 합해서 500여권을 저술하였다. 한 선비가 그 많은 방대한 저술을 남기기 위해서는 아마도 수 천권, 아니 수 만권의 독서를 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법정 스님도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자주 읽었다고 하였고, 나도 이 책은 자주 보는 애독서목록의 수위(首位)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그의 학문적 성과나 실학정신,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초인적인 자세에 그치지 않는, 진정한 스승이랄 수 있는 풍모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맑은 풍모에서 나오는 힘 있는 문장과 엄중한 가르침은 내 가슴을 뜨끔하게 후려치는 죽비같은 단호함이 있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이 책에 수록된 어느 한편의 편지도 가벼이 쓴 글이 없다. 내면의 공력과 우주의 기를 모아 피를 끓는 간절함으로 글을 쓰고 당부하고 또 길을 알려 주고 있다. 두 명의 자식과 형제, 친척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라기엔 너무나 보편적이고 시대초월적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팔딱임과 구체성이 그대로 피할 길 없는 화살처럼 날아든다.
그 이유는 실학자인 정약용의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 때문에 글이 애매하거나 불필요한 난해함이 없는 탓이다.

다음은 책 내용 중에서 몇 소절 뽑았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다오.

반드시 처음에는 경학공부를 하여 밑바탕을 다진 후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보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에 마음을 두고 옛 사람들이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학문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지식인이 책을 펴내 세상에 전하려고 하는 것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바라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이야 관계할 바 없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이가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동년배라면 그와 결의형제라도 맺는 것이 좋으리라.

높고 오묘한 학문의 참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날로 수가 적어져서, 비록 주공이나 공자의 도를 다시 잇고 문장이 양용이나 유향을 뛰어 넘고 학술이 있다 해도 알아볼 사람은 없어져 간다. 이 점을 알아차리고 우선 천천히 연구하며 긍지를 지니는 마음가짐에 힘써, 큰 산이 우뚝 솟은 듯 고요히 앉는 법을 습관 들이고 남과 사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먼저 기상을 점검하여 자기가 해야 할 본령이 확고하게 섰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점차로 저술에 임해야 한다.

세상에 옷이나 음식, 재물 등은 부질없고 가치 없는 것이다. 옷이란 입으면 닳게 마련이고 음식은 먹으면 썩고 만다. 재물 또한 자손에게 전해준다 해도 끝내는 탕진되고 만다. 의돈의 창고 속에 감춰둔 재물은 지금 흔적이 없지만, 소부의 황금은 지금도 이야기가 전해오고, 금곡의 화려한 장막은 티끌로 변했지만, 범중엄이 보리배에 실어 친구를 도왔던 일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왜 그런가 하면 형태가 있는 것은 없어지기 쉽지만 형태가 없는 것은 없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내 나이 스무살 때는 우주간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그 이치를 완전히 정리해내려 했다. 서른살, 마흔살이 되어서도 그러한 의지가 쇠약해지지 않았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이 두 마디 말을 늘 외우고 실천한다면 크게는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작게는 한 가정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폐족 가운데서 왕왕 기재가 많은데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과거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학자란 궁한 후에야 비로소 저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매우 총명한 선비라도 지극히 곤궁한 지경에 놓여 종일 홀로 지내며 사람이 떠드는 소리라든가 수레가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시각에야 경전이나 예에 관한 정밀한 의미를 비로소 연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책 한권을 볼 때 오직 나의 학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추려 쓰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도 눈여겨볼 필요가 없는 것이니 백 권 분량의 책일지라도 열흘 정도의 공을 들이면 되는 것이다.

역사책을 읽어라. 젊은 사람이 멀리 보는 생각과 꿰뚫어보는 눈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로구나. 너희들 편지에 군데군데 의심이 가고 잘 모르는 곳이 있어도 질문할 데가 없어서 한스럽다고 했는데, 과연 그처럼 의심이 나서 견딜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적어서 인편에 부치지 않느냐?

학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효와 제로써 그 근본을 삼고, 예와 악으로써 수식을 하며, 정치와 형벌로써 도움을 주고, 병법이나 농학으로써 그 이익을 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육자정이 말하기를 “우주간의 일이란 자기 내부의 일과 같고, 자기 내부의 일이란 우주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대부의 마음가짐이란 마땅히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아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저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거듭 당부하는 건 말조심하는 일이다. 전체적으로 완전해도 구멍하나만 새면 깨진 항아리와 같듯이 모든 말을 미덥게 하다가도 거짓말을 하면 도깨비처럼 되는 것이니 말을 실속 없이 과장되게 하는 사람은 남이 믿어주지 않으며, 더구나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더욱 마땅히 말을 적게 해야 한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 한 글자는 근(勤)이고 한 글자는 검(儉)이다. 부지런함과 절약을 한다면 당장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뿐만 아니라 귀하고 부유한 사람들도 집안을 잘 다스리고 몸을 유지하는 방편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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