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걷는다(11)"..'선생의 길'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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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걷는다(11)"..'선생의 길'을..(1)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1.26 10: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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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탐방기 11코스)하모에서 무릉까지 많은 깨달음 이끌어

 

 

올레를 걷는다는 건 자연과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겨울 올레를 걷다보면 언젠가는 눈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비를 맞기도 할 거라 생각했다.
사실 제주에서 그런 날 올레를 걷는 일도 좋은 그림이 되고 또 좋은 추억도 되는 법이긴 하다.

인생길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올레길에서는 다른 곳에서, 또다른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지난 1월22일(일요일)은 연 사나흘 추위가 계속된 날이었다.


21일 가파도를 다녀온 후 목욕으로 언 몸을 잠시 녹이고 집에 들어와 다음날 아침 결코 짧은 거리라 할 수 없는 17.8km의 올레 11코스 걷기에 나서야 했기에 이날 도전 또한 녹녹한 행군길은 아니었다.

걷기 초반에는 다리가 풀려 가다가 서고 또 가다가 잠시 쉬기를 반복해야했다.
걸으면서도 연이틀 계속 걷는 건 역시 무리인가..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걷기 중반부터는 몸이 또 정상으로 돌아와 걷기에 익숙해져 있어 다행이었다.

올레를 함께 걷기로 약속한 김형권과 아침 9시에 제주시 칼호텔 인근에서 만나 출발점인 모슬포 하모리공원으로 향했다.

 

9시55분쯤 도착한 그곳 올레안내소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문을 여는 중이었다.

이날은 남자분이 담당인 듯 문이 열리자마자 올레지도를 또 하나 다시 하나 얻었다.
전에 얻은 지도에 일정을 적는 바람에 글 쓰는 용도로 돼 버려 코스별 사진을 잘 찍어두기 위해서였다.

시작점에서 김형권은 올레길을 걷기 위해 사왔다는 사냥꾼이나 쓸 것 같은 털모자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부인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군고구마장사꾼처럼 보인다고 했다"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올레를 항해 떠나려하자 이 올레지기는 홍마트 건너편을 가르키며 그쪽으로 올레 11코스가 시작된다고 안내해 줬다.

 
 
 
   

드디어 11코스의 시작이다.

이날은 유독 바람이 많은 날이었다.
제주도 서쪽 대정지역은 원래 바람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10코스를 걸을 때도 10-1코스를 걸을 때도.. 이날 11코스를 걸을 때도,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더욱 계속 쏟아지는 눈발과도 맞닥뜨렸다.

처음 걷는 곳은 포구쪽을 지나 길지 않은 조그만 바닷길 해안도로였다.
아직 공사가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넓은 해안도로가 날 듯 한 모습으로 간간이 차들이 지나다녔다.

동일1리라는 안내문이 우리를 반긴다.

하지만 바람속에 해안가를 걷는 일은 결코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빨리 코스속 숲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어질 정도로 바람이 드셌다.

다행히 조금 더 걸어가자 큰길을 건너 모슬봉이 멀리 보이는 쪽 길로 안내된다.

대정고등학교 옆길을 따라 모슬봉으로 향할 때 눈보라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싸락눈이었다.

앞길이 막막했다.

아직 초입인데 벌써 이렇게 퍼붓다니..
송악도서관이 보이는 곳을 뒤로 하고 모슬봉으로 가는 오르막길이 나타나면서 조그만 들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속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니 오른쪽으로 아까 멀리서 보았던 둥근 군사시설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 입구에는 또 마을공동묘지라는 표시도 나타났다.

조금 더 오르다 공동묘지 어느 산소 앞 돌담에 앉아 잠시 쉬면서 아까 올라온 마을을 감상했다.
파란 바다색과 어우러진 동일리 마을이 눈앞에 찬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왼쪽 도시화된 곳은 언제 저런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나 할 정도로 고층화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억새꽃 지역을 따라 다시 산으로 올라 가는 길이 이어진다.

조금 더 오르자 시멘트로 포장된 평탄한 올레길이 나타났다.
군사기지 입구다.

중간스탬프지점이 모슬봉 정상이라고 했는데..그러나 올레길은 그보다 아래쪽으로 가도록 안내한다.

왼쪽길은 군사시설이니 출입이 금지돼 있다는 설명과 함께..

그 길을 따라가니 아주 큰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사실 이날 걸어본 모슬봉은 오름 전체를 빙 둘러가며 온통 묘지로 가득했다.

마을마다 공동묘지터를 나눈 듯 중간지대는 모두 공동묘지로 이뤄져 김형권의 말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알게 된 사실처럼 상당히 이 마을 최대의,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올레길 안내판에는 모슬봉은 모슬포 평야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오름이다, 모슬봉은 모슬에 있다고 하여 모슬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모슬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어라는 설명이 쓰여져 있었다
 

이 모슬봉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산방산과 송악산 멀리 서귀포 앞바다 범섬이 보이는 곳 정상에 11코스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놓여 있었다.

 


이 중간스탬프 포스트 코너에 걸터앉아 잠시 쉴 때 김형권이 물었다.

“오면서 보니 이곳 무덤에 처사라는 비석이 아주 많은데 제주에는 왜 그렇게 처사가 많느냐..”는 것이었다.

“처사란 공부는 많이 했지만 관직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쓰는 용어지..보통 학생이라고 하면 좋은데,,우리 모두 학생이 맞지 않나..?” 하고 내가 답하자 김은 다시 말했다.

“처사라는 말은 그렇게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조선시대 때 영의정을 하려면 아버지부터 4대까지 보고 문제가 없어야 영의정을 하고, 대제학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집안까지 3대를 살펴서 대제학을 시켰다고 하는데..

당시는 집안과 집안이 결혼을 했지만, 영의정을 3명 배출한 집안과 대제학 1명을 배출한 집안이 혼인을 했고, 대제학 3명을 배출한 집안과 처사 1명을 배출한 집안이 혼인을 했지요..

처사는 높은 학식과 경륜을 가졌지만 절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을 말하지요,

그런 사람을 처사라고 부르는데..그 처사보다 더 높은 이름이 선생입니다.

선생이라는 존칭은 아무나 쓰지 못하고 후학을 아주 많이 길러 세상에 인재를 많이 배출한 인물을 선생이라 불렀지요..“

 

 

고려대 법대를 나온 김은 이처럼 제주도 공동묘지에 너무나 많이 비석이 쓰이고 있는 처사라는 말에 그 의미를 전해 주며 학문의 중요함까지 알려주었다.

“고려대를 세운 인촌 김성수 선생의 경우도 성균관에서 선생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도록 했었다”는 일화도 전해주면서..

그래서 이때 나는 제주올레 11코스의 이름은 ‘선생의 길’이라고 부르기로 결심했다.

 

김형권은 이어 처사에 대한 남명과 퇴계 이황의 일화도 전해주었다.

주역을 정통으로 학습한 이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퇴계 이황이 죽기전 미리 명정에 쓸 글을 만들었는데 처사라고 쓴데 대해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황은 이미 벼슬길에 올랐기에 처사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남명이 지적한 것이다.

결국 이황은 처사라고 썼던 내용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남명이나 퇴계나 대단한 선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내용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보다가 이송희가 쓴 ‘지부상소(持斧上疏)의 꼿꼿한 기개, 처사(處士)의 정신’이라는 글을 찾아냈다.

 

 

다음은 그 글의 내용중 일부이다.

 

조선 시대의 선비라고 하면, 입신양명을 바라보며 오로지 과거급제에만 매달리는 존재로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선비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최고관직인 영의정까지 올라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것이었을까?


아니다.
선비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긴 것은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한 선비, 즉 처사(處士)였다.

이상적이며 진정한 선비정신은 “눈 속에 들어/ 눈빛들 형형한 날”과 같이 입신양명과 상관없이 자신의 학문에 정진하면서 자연 속에 묻혀 안빈낙도하며 처사(處士)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벼슬길에 나섰던 퇴계 이황마저도 자신이 죽은 후에는 처사로 불러줄 것을 희망했다고 한다.

임종 시에 퇴계 이황은 나라에서 하사하는 예장은 사양할 것이며 비석도 세우지 말고 ‘처사이공지구(處士李公之柩)’라고만 쓰라고 했다.

벼슬길은 학문에 전념해야 할 선비의 몸을 더럽힌 것이므로 깨끗한 몸을 남기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리산 밑에 사는 남명 조식이 뒷날 이 말을 듣고 "할 벼슬을 다하고 처사라니, 당치도 않다. 진짜 처사는 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화담 서경덕(徐敬德), 남명 조식(曺植), 대곡 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들은 매우 뛰어난 학문을 지녔지만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않거나, 벼슬을 스스로 던져버린 처사들이다.

북한산 인수봉은 이런 처사들이 은둔한 모습과 같다.

 

 

 

 

 

 

(내용이 많아 2번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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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래꾼별난이 2017-01-26 12:34:13
올레길을 걸으며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제주 올레의 풍경과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흥만 취하며 걸었던 내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글입니다. 정말 제주에는 산과 들에 그리고 밭에 묘지들이 산재하고 있는데 '처사...의 묘' 라고 씌여진 비석을 쉽게 볼수가 있습니다...심지언 저의 조상의 묘에도 처사로 시작되는 비석이 있는데...이 글을 읽고 우리선조들의 장례의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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