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걷는다(11)"..'선생의 길'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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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걷는다(11)"..'선생의 길'을..(2)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1.26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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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탐방기 11코스)하모에서 무릉까지 많은 깨달음 이끌어

 

(1번에서 계속)

 

그렇게 찾다보니 처사란 보통의 단어가 아니었다.
또 찾아 보았다.

처사란 조선 중기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한 선비들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중기인 16세기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중앙관직으로 출사를 단념하고 고향에서 사림(士林)을 형성하며 지방에 은둔하게된 선비들이 형성되었다.

이들 선비들은 다양한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데 처사뿐만아니라 은사(殷士), 유일(遺逸), 은일(隱逸), 일사(逸士), 일민(逸民) 등으로 불렸다.

이중 처사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지방의 은거하는 선비를 상징하는 호칭이 되었다.

특히 당시 북인(北人)으로 분류되어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호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처사라고 호칭하였다.(출처미확인)

 

 

처사라는 글을 찾다보니 신천함소아한의원 이혁재 원장이 쓴 글도 좋아서 그 일부를 소개한다.

 

"..공부의 달인인 퇴계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까지 퇴계의 일생은 늘 공부와 함께 있었습니다.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지요.
사화로 얼룩진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퇴계 이황은 평생 공부의 길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퇴계는 문하생을 받아들일 때 여러 재밌는 일화가 있지요.

그 중의 하나는 한여름 삼복더위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게 한 다음 이것저것 문답을 하지요. 이때 이황은 시원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제자 되기를 자청한 사람만 잔뜩 차려입고 더위를 참아가며 그와 대화를 주고받아야 했답니다.

그러다보면 중간에 옷을 벗는 자도 있고, 끝까지 참아내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누가 제자가 되었을까요? 바로 중간에 옷을 벗은 자입니다.

퇴계는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있지만, 모질게 참아내는 사람에게는 따로 가르칠 게 없었나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성리학의 또 다른 거목인 남명 조식에게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혹평을 합니다.

남명 조식은 대쪽 같고 직설적이고 엄하다 보니, 무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학자로서는 문제가 있다고 본 듯합니다.

 공부의 기본은 흐리멍덩하지 않고 늘 깨어있는 것입니다. 퇴계는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지요.

그러다 만난 주자의 글에서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잠자다가 확 깨는 것처럼” 절실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스스로 깨어있어야 상대의 말과 글을 경청할 수 있게 되지요. 조선 성리학의 한 획을 그은 사단칠정 논쟁 역시 한참 나이차가 나는 젊은 학자 기대승의 말과 글을 경청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논쟁입니다.

퇴계의 깨어있음은 죽기 전까지 이어져 말년에는 어린 왕 선조를 위해 그림 선물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서 노래 선물을 짓게 되지요. 앞의 것이 『성학십도』이고, 뒤의 것이 『도산십이곡』입니다.

 『성학십도』의 서문에서 퇴계는 "도무형상(道無形象), 천무언어(天無言語)"라고 합니다. "길은 형태가 없고, 하늘은 말씀이 없다"는 뜻이죠.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는 이 길을 찾는 요령을 『성학십도』에서 풀고 있습니다.

아녀자들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한글로도 번역하지요. 『도산십이곡』이란 노래를 지은 배경은 아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한시는 우리 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서 이런 쓰잘데없는(閑事)일을 해 보았다. 나는 악곡의 형식은 모르지만 이 노래를 아이들부터 유행시켜 나가다 보면, 마음속의 비린내와 인색함을 씻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의 비린내와 인색함이 없기를 막연히 바라지는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도산의 그림과 노래를 함께 감상하고 읊어보면서 잘 씻어내는 건 어떨지요?

[출처] 공부의 달인 퇴계 이황의 그림과 노래 |작성자 신천함소아한의원

 

 

섭섭해 할 것 같은 남명의 시도 하나 소개한다.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有餘’

‘봄 산 어디엔들 향그런 풀 없으랴/
다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운걸 사랑해서라네/
맨손으로 들어와서 무얼 먹고 살 건가/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니 먹고도 남겠네’

조식의 ‘德山卜居-덕산에 살면서’이다.


허허공이 남명에게 바치는 제문도 있었다.

‘선생의 고매한 뜻 쫓을 길 찾아/숫한 나날을 고민하며 뜬 눈으로 새우네/무심히 떨어지는 뙤약볕의 땀방울이/이미 늦은 나이를 가슴 치게 만드네’ 
 

 

이처럼 처사에 대한 글을 찾다보니 수많은 곳에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같은 이의 선비정신까지 배우게 됐으니 올레가 주는 의미는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걷는다.

공동묘지를 지나자 5km 지점 까지는 산방산을 조망할 수 있는 숲속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 길도 공동묘지가 계속 이어질 정도였다.
그곳으로 내려와 밭길을 따라 갈 때 밭에서 일을 마친 아낙네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신평리로 들어가는 큰 길이 나타났다.
정난주 묘를 향해 들길을 따라 걷다 보니 11km가 남았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정난주묘로 생각했던 천주교묘지 앞에서 김형권은 잠시 기도를 올렸다.
그는 아주 예전에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그곳은 대정읍 천주교묘지였다.
제주시는 벌써 무덤이 들어차 추모관을 지을 정도인데 이곳은 아직도 천주교식 매장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다.

그길을 따라나오니 이제는 밭길로 올레는 안내했다.
드넓은 밭길을 따라가다 보니 올레깃발을 잃고 잠시 길을 찾아 헤맸다.


다시 걷던 곳으로 돌아와 찾다 보니 길은 밭 옆길을 따라 조그만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밭 한가운데 있는 돌더미 뒤에 앉아 잠시 쉬고 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 있는 올레길을 찾아 다시 걸었다.


그곳을 지나니 9km 지점까지 왔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이제 반 정도를 걸은 것일까..

 

천주교 대정성지인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앞에 서니 다시 세찬 눈발이 몰아친다.

그곳에서도 김형권은 오랫동안 십자가앞에 서 있었다.

그곳을 나오니 다시 밭으로 이어진 길이 나타난다.
몸은 춥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고..식사시간도 한참을 지났다.
신평리마을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띤 가게가 있었다.

 

올레길 할망가게라는 이름이 크게 붙어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무엇인가 적어도 라면이라도 팔줄 알았다.
그러나 할망이 아닌 젊은 주인에게 라면 되느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라면 없습니다. 라면 못끓여 줍니다..“

“그럼 물이라도 끓여주면 컵라면이라도 먹겠다”고 하니 “물도 없습니다”하고 아주 귀찮은 듯 말했다.

옆에 있던 한 아저씨는 “택배 때문에 바빠서 그런 것”이라고 변명해 주었지만 그렇다면 올레길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아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할망(할머니)도 없고 젊은 사람이던데..올레길에서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날씨에 오래 걸어온 사람에게 물 한잔 줄수 없다는 사람이 그런 가게를 한다는 사실도 웃기는 일이지만 올레길이라고 쓰고 장사를 하는 그 뻔뻔함이 참 무서울 정도였다.

할 수 없이 옆가게를 찾았다.


사람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이곳은 아예 문을 닫았다며 전화도 그 집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난감했다.

현수막에 고기국수라는 얘기가 써 있는 식당으로 더 걸어가 보기로 했다.
올레길 입구에서 50m 정도를 더 벗어난 그 식당은 과연 문을 열었을까..
걱정속에 걸으며 보니 연통으로 연기가 솟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음식이라고 먹자고 일단 들어갔다.

 

 

이곳은 자매가 운영하는 곳인듯 여러 음식을 맛있고 깨끗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돔베고기정식을 점심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김형권은 “제주에만 오면 식욕이 더 생긴다”며 행복한 점심을 먹었다고 즐거워했다.

맛있게 먹었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그곳 식당을 나와 다시 걸어 조금 가니 7km가 남았다는 표시와 함께 신평-무릉간곶자왈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났다.

 

올레안내판에는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진 곳을 제주말로 곶자왈이라고 한다.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 대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 이라는 설명과 함께..제주올레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고 하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말 그대로 곶자왈이 그곳에 있었다.


이곳 곶자왈은 곶자왈을 지나면 다시 들길이 나오고 들길을 걷다보면 다시 곶자왈로 들어가는 길이 연속됐다.

곶자왈에 들어서자 다시 눈발이 더많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날은 특히 수도 없이 바람과 눈 그리고 햇볕이 나왔다 다시 눈발이 날리는 그런 날씨가 계속 됐다.

하지만 제주곶자왈을 그렇게 마음 놓고 만끽 할 수는 없을 정도로 힘든 길이었다.

이 지역 곶자왈 끝에 오니 15km까지 왔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앞으로 1시간 정도면 11코스 올레길도 끝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어지는 조용한 숲속길은 작은 돌들이 깔려있는 울퉁불퉁한 길이었다.

 

 

 
   

   

들길과 숲길을 걷는 동안 그런 돌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그 길을 다 걸어나오자 드디어 무릉2리라는 표석이 나왔다.


대로를 따라 종착점을 향해 걸어가자 2km가 남았다는 표시가 나왔고 길은 또 길고 긴 밭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 또한 참 길었다.

걷다보니 드디어 11코스 종점인 후배 강영식이 운영하고 있는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무릉생태학교)에 도착했다.

 
 

거의 7시간 정도 걸은 16시 46분에 종점스탬프를 찍었다.

스탬프를 찍으면서 보니 한 젊은이가 "자기와 똑같은 코스를 걷었다"며 "자기도 차례대로 올레를 걷고 있다"며 반갑게 인사를 해 온다.

커피를 한잔 하고 싶어 강영식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금 본가에 행사가 있어서 와 있다"며 잠시 실내에서 기다리란다.

조금 기다리니 누가 차를 갖고 와서 데려다주기로 했다는 얘기.

그 차를 얻어타고 하모리까지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고맙게도 우리를 시작점에 데려다준 그분은 누구라는 얘기도 없이 우리가 마음을 전하고자 드렸던 돈까지 마다 하며 그냥 가라고 했다.

미안했지만.. 고마운 마음만 전할 수 밖에 없었다.

11코스는 참으로 난코스중에 난코스였다.
걷는 길이 난코스가 아니라 날씨가 올레길을 그렇게 어렵게 걷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런 날 올레를 걸을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 고마운 일이다.

인생이란 편안하면 총기가 빠지는 법이니..
조금은 어려운 길이 긴장감을 주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가 이란 사회를 좀더 잘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글이 있다.

 

.."예를 들어 이란 사람들이 위인이나 성인을 모신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는 건 일상의 일인데, 그 이유는 이런 행위를 통해 물라의 폭력적이고 숨통을 죄는 권력과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가까운 묘지에 소풍을 가거나 한나절 보내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묘지가 신성한 곳이 되는 이유는 강요된 숭배행위보다 선택된 숭배-부모에 대한-를 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묘지 위에 도구를 전시해 고인이 생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를 나타냈다.


빗이 있는 이 무덤의 주인은 생전에 이발사였을까?

아니다. 이 묘지의 주인은 직조공이었다.


얼레빗은 직물을 짤 때 빗질을 하는데 사용하던 도구였다. 이발사의 무덤에는 가위를 둔다고 한다,"

이는 앞서 말한 공동묘지의 비석에 대한 내용과 그 나라의 문화의 차이일 뿐이다.
12코스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와 만날 것인지..

 


 

 

 

 

 

제주올레11코스

 

제주올레홈페이지

패스포트 스탬프 확인 장소

시작 : 하모체육공원 제주올레 11코스 안내소
중간 : 모슬봉 정상
종점 :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 입구 (무릉 생태학교 입구)

난이도
난이도 - 중

거리(시간) - 17.8km (5~6시간)

길이가 비교적 길고 곶자왈이 포함돼 있다. 곶자왈에서는 길을 잃으면 위험하므로, 리본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어야 한다. 곶자왈이 포함된 코스에서는 역방향 올레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 일부 구간은 통신장애가 발생할 수 있으며, 코스 내 곶자왈 지역은 여성 혼자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부득이한 경우, 제주여행 지킴이단말기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슬포항(하모체육공원)에서 시작하는 11코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 근대사와 현대사가 녹아 있는 올레다.

11코스의 절정인 모슬봉은 이 지역 최대의 공동묘지가 있는 곳으로서, 제주올레는 이곳 정상부로 올라가는 ‘잊혀진 옛길’을 산불감시원의 조언을 얻어 복원했다.

모슬봉에서는 흔들리는 억새 사이로 드넓게 펼쳐진 제주 남서부 일대의 오름과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신평-무릉간 곶자왈 올레는 제주올레에 의해 처음 공개된 ‘비밀의 숲’으로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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