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점은 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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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점은 치셨습니까?.."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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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동양의 지혜, ‘주역’을 논하다

 

독일에서 발견된 주역의 64괘 다이어그램. 1701년.

예전에는 정초가 되면 어느 집이나 토정비결로 한 해의 운수를 점치곤 하였다. 어렸을 때 불확실한 세상살이에 어머니는 정초에 토정비결을 구해다가 식구들마다 일일이 그 비결에 따라 언제는 물가에 가지 말고, 언제는 관재수가 있으니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아라, 언제는 구설수가 있으니 다른 사람이야기를 하지 말아라, 또는 삼재수가 들어서 무얼 해도 어려우니 다지나갈 때까지 그저 참고 인내하라는 등 점을 보는 것을 당연히 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 임할 때면 미리 점을 쳐서 승패와 길흉을 미리 예견하여 실전에 응용했다고 하고, 명성황후도 구한말의 혼미한 정세 속에서 점에 많이 의지했다는 설도 있다.

또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두상(骨相)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데 매우 탁월한 승려가 있어서 인사담당 자문위원으로 모시고, 주요한 인재를 선발할 때 배석시켰다고 한다.

 

주역은 동양에서 우주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동양철학의 이미지를 사주나 명리학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양철학은 천지운행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을 타고 태어난 길흉화복의 복서(卜筮)를 말하는 것일까? 정녕 사람의 운명은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일까?

필자가 주역을 가까이 한 것은 홍역학회(洪易學會) 때문이었다. 주역의 대가로 알려진 대산 김석진 선생께서 흥사단에서 고전주역강좌를 하시다가 1987년에 정식으로 홍역학회를 만들어 매주 화요일마다 주역원전강의를 하였는데, 당시 거기에 자주 들락거리던 나는 그 분을 종종 뵐 때가 있었고, 강의도 더러 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산선생은 주역을 이야산(李也山)에게서 배웠고, 예순 무렵까지 공부하다가 뒤늦게 흥사단의 서영훈 이사장 도움으로 세상에 널리 주역을 알리는 강좌를 개설하여 시대에 맞게 정리한 수시변역(隨時變易)으로 십 수 년 간 수많은 문도를 배출해내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주역>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인 약 5천 년 전에 복희씨가 괘와 효라는 부호를 통해 정치 경제의 수단을 삼던 것을, 문자가 만들어지고 난 후인 3천 년 전 주나라 문왕이 괘에 대하여 설명을 붙였고, 문왕의 아들 주공이 효에 대해서 설명을 붙인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괘효라는 것이 변하고 바뀌는 것이라서 역(易)이라 하였는데, 이 때가 주나라시대이므로 주역이라고 부른다. 그 후 공자가 주역에 다시 열 가지 해설을 붙여 십익(十翼)으로 집대성해서 동양의 최고경전인 사서삼경 중 역경이 된 것이다.

공자가 주역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다른 책은 몰라도 주역의 죽편만이 가죽 끈이 세 번 떨어질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주역의 깊이를 당신 생애에 다 헤아릴 수가 없어 주역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성현의 뜻을 누가 알아낼 것인가를 탄식했다고도 하는데, 공자의 도덕경륜은 주역에 근거한바가 적지 않고, 공자의 사상경륜은 주역이 그 비결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십익(十翼)이 공자의 견해가 아니고 진한시대의 공동창작물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복희씨, 문왕, 주공, 공자 네 성인의 손을 거친 주역은 그러므로 수천 년간 이어져온 기나긴 집필기간이 있었고, 그 내용과 사상은 광대하기 그지없어서 주역은 만학의 제왕이요, 삼대가 선을 쌓아야 배운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공자의 초상. 공자는 주역의 깊이를 당신 생애에 다 헤아릴 수가 없어 주역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성현의 뜻을 누가 알아낼 것인가를 탄식했다고 한다.

정조가 구해보고 싶었던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있었다. 그래서 신하를 청나라에 보내 사고전서를 구해오라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사고전서는 몇 권으로 된 서책이 아니라, 역대의 모든 책을 방대하게 엮은, 한마디로 문자가 나온 유사 이래 모든 책을 정리해서 국가가 대대적으로 간행한 대출판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중국에서 간체어로 전산화되어 몇몇의 중국어전문가만이 이를 구해서 부분 부분 보고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사고전서의 완역본이 우리나라에도 나오는 날이 있을 것이고, 이것은 출판계의 로망이기도 하다.

이 사고전서에서 주역을 평한 글을 보면, “주역이란 책은 전체가 음양과 팔괘 64괘 및 태극 등 역리에 대한 설명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전통시대에도 주역의 도는 넓고 커서 포함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고 칭송하는 내용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걸출한 대작이라고 하여도 그 지혜가 세계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무릇 과장된 칭찬은 종교적 신봉으로 전화되고 추종자들에 의해 완벽주의라는 교조적 생명력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양의 거대한 전통문화는 이 주역에 근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태극기도 무극이태극(無極以太極)이라는 주역사상에서 나왔고, 천지인 괘효의 운행에 근거해 사괘를 그렸다.

윷놀이와 바둑은 말할 것도 없고, 도교나 우리나라 고래의 선도(仙道), 천부경이라는 것도 주역의 자양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젠가 미국드라마인 로스트(LOST)에서 섬의 정령이 있는 기지에 괘효가 등장하는 것을 보기도 했는데, 동양사상의 상징과 더불어 무속, 수학, 천문과 지리, 역사와 철학, 윤리와 미학, 문예와 명리 등등 다양한 문화의 융합이 주역 안에 들어있고, 문자보다도 더 많은 뜻을 함의한 괘효는 영감과 심취의 매력으로 신비로운 자극을 주기도 한다.

주역은 심오한듯하고 시적인 미학이 있으며, 너절한 설교를 넘어 깊은 철학이 있어 보이고 날카로운 역사의식도 내포하고 있다. 주역을 통해 조용헌 같은 이는 풍부한 세상의 이치를 저술활동을 통해 내보이기도 하고, 방편과 깨달음을 얻어가는 이도 있으며, 명성과 부를 쌓는 이도 생겨났고, 청빈을 도모하다 궁하게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으며, 허세와 고상함을 위한 치장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주의 시방세계를 이해하려고 불경보다 주역에 더 몰두한 승려도 비일비재하고, 기독교에서도 주역을 창조주의 우주질서로 이해하고 심도 깊게 연구하는 이가 많으며, 우리나라 선비들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연구하다가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신영복 선생은 주역을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에 비유하면서, 수천년 수만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로 바라본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사전을 인용해서 주역의 사상을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단 세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뜻이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이 극에 이른 상태로 즉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에 이른다는 것이고, 그러한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통(通)이고, 그렇게 열린 상황은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주역은 당연히 무술(巫術)을 기본으로 합니다. 복잡다단한 인간세의 삶속에서 사람의 행위와 연관된 사물의 운동과정에서 인간행위의 미래를 미리 알기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심리이다. 원인과 결과의 전후관계에 대한 성찰은 인간다움의 기초인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초기 현상을 잘 관찰해서 그 결과를 유추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과학이고 과거에는 점이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점을 쳐야 한다고 생각된다. 신영복 교수도 점치는 사람이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고,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서경(書經)에도, 의문이 생기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에게 묻는다고 했다.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복서(卜筮)에 묻는다고 했는데,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것을 대동이라고 했다.

 

상왕조 시대의 거북등에 새긴 점괘문

점은 변화의 추동력을 관계론적 입장에서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점은 사람의 운명이 천명에 의해 정해진 것과 반대되는 양극단이 있으며, 동시에 사람의 노력을 통해 흉을 피해서 길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주역은 천인합일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사람은 우주 속에서 위축되거나 운명에 수수방관하지 말고 인위의 노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운명적인 천의 부분으로 인간이 태어나지만, 동시에 인은 천으로서 충분히 위대하며 천지의 가운데 우뚝 서있는 존재로서 매우 자존적인 의미부여도 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나 순자가 말하는 인위 등이 그런 것의 일환일 것이다.

인위(人僞)나 위선(僞善)이라는 말이 본래 나쁜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순자는 “인간 본성의 바탕은 본래 소박한데, 인위로 세련되게 꾸민다.” 고 했는데, 여기서 본성은 사람의 타고난 성질이며 인위란 후천적인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인위란 소박한 인간의 본성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꾸며진 ‘인간의 완성’ 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본성이 없으면 인위를 가할 대상이 없고, 인위가 없으면 본성이 아름답게 될 수 없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본성이란 자연과 인위의 노력이 합해진 천인합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관점을 순자는 가지고 있었다. 이와 비교해서 장자나 도가는 인간을 왜소하게 생각하면서 우주는 광대하니 무위해야 한다고 인간을 해석하였다. 그래서 와우각쟁이나 거대한 새인 곤과 참새의 비유로 인간속세의 모든 행위들이 한갓 작은 먼지의 움직임 정도로 해석한다. 장자가 보기에 인간이란 사실상 우주에서 독립할 수 없고, 인간은 우주의 일부분이자 부속물일 뿐이다. 생명이란 천지의 화기가 잠시 맡겨놓은 것으로 내 것 이랄 것이 없으며 스스로의 실천적 노력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늘에 맡기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무위자연사상이 된다. 그래서 장자는 천도 편에서 “만물은 텅 비어 고요하며 적막하고 인위로 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대서 장자나 도가는 일체의 인위를 걷어내고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안팎의 모든 것을 놓아 버린채 자유로이 노닐어야 도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가의 경지는 주역과는 사뭇 다르다. 주역은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다. 점이란 흉(惡)을 피하고 길(善)을 추구하는 인위가 중심이다. 태극사상이 주역의 핵심인데, 이는 인간의 생식작용의 근원과 생명의 위대함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고 찬미한다. 불교는 생명을 지수화풍 사대의 인연과 흩어짐으로 보고 무상과 무아의 입장을 견지하지만, 주역은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생명력, 즉 음과 양, 지극한 태극과 무극이야말로 생생불식하는 정기이며 생명의 정수이며 화합과 추동력의 영원한 에너지라는 것이다. 주역은 그래서 태극이 지닌 생의 경지를 깨달은 다음 이를 자연과 인공의 미로 확대하고 본질과 인위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바로 천과 인의 합일이라는 경지로 보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천지가 서로 사귀는 천인합일은 인간이 이성과 사귀거나 생식작용의 자연의 변화를 아름답게 생각하며 위대함 그 자체로 본다. 한마디로 주역의 기점은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노력이 가미된 인위의 철학적 범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천인합일이 균형점에 늘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인위적 노력은 종종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사회적 윤리라는 미명하에 개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적 경제적 권력이나 부의 불평등은 인간의 도덕 윤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와 모순으로 치닫기만 한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가 가능하지 않고, 통계학적인 점괘는 항상 불완전하고 인간운명이라는 순응적 세계관으로 그림자마저 드리우게 한다.

이것은 사람에 비해서 사회적 생산력이 미진하고, 권력의 수가 적어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래서 주역의 한계는 사회적 모순분석에는 무관심하고, 경강부회와 통계의 동일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오류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송나라 시대의 주역 인쇄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의 사상이 주는 긍정성은 화합의 정신에 있다.

서양의 생각으로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대립적 위협적 존재로 본다. 그러나 주역은 자연과 인간이 화합하는 친화적 관계로 생각한다. 그래서 주역의 점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꾀하는 길흉의 관리에 있다. 흉이라는 자연과의 대립각을 피하고 종종 홍수나 지진같은 자연의 힘에 눌려 죽거나 재난을 당해도 인간과 자연의 화합성을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으로 시작되는 소위 동양철학이라는 원시무술이 불교나 기독교처럼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미신으로 치부되어 사회의 음지로 밀려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인지 모른다. 천인합일의 조화로움은 분석과 분류를 특징으로 하는 서양의 과학과 불교의 사유에 밀리게 되고, 주역이 “일체는 하나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것은 가장 나쁜 방식의 통일”이라고 본 어느 서양철학자의 견해도 고려해볼만한 평가라고 본다.

주역의 오랜 지혜는 분명히 동양인이라면 그 유전자 속에 존재하는 자양분이 존재한다. 태극과 무극의 사유 또한 이와 기로 해석하는 우리의 전통적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원형질이 있고, 주역에서 배울 것은 스스로의 소박한 나약함을 긍정하는 겸손이지만, 점을 통한 미래의 운명개척은 일정한 한계가 있음도 동시에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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