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신적 승화를 통한 신성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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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신적 승화를 통한 신성의 존재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3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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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막스셸러의 철학적인간학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년 ~ 1928년)는 독일의 철학자로 뮌헨에서 태어나 뮌헨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 예나대학교에서 의학, 천문학, 사회학을 공부했다.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의 지도 아래 연구하다가 1902년에 예나대학교 강사 시절에 에드문트 후설을 만나 현상학적 방법론에 관해 연구했다. 후설의 영향을 받아 그의 현상학을 정신과학, 윤리학, 종교철학, 심리학, 지식사회학 등에 적용시켰다. 그 후 쾰른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셸러는 사회학과 철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적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현상학적 방법에 의한 ‘실질적 가치윤리학’의 정립과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카를 만하임과 더불어 ‘지식사회학’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다. 문화사회학의 시조로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는 1928년에 출판된 막스 셸러(1874-1928)의 대표적 명저다. 도대체 지구와 우주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어떠해야 하는가? 정말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유사이래 모든 종교나 철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면서 제대로 아는 것도 또한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번역자는 자주, 그리고 가까이서 함께 일하거나 지켜 볼 기회가 많았던 서울대 진교훈 명예교수가 한 것이라서 특히 관심이 있었다. 진교훈 교수는 가톨릭적인 입장에서 생명운동을 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생명론자로 낙태문제나 줄기세포문제, 인조인간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학자이며 종교실천가이다. 종교적 보수성이 강해서 소장학자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에 대한 학자로서의 사고는 특히 무어라 비판할 만한 부분을 나는 찾지 못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서는 막스셸러의 승화적 존재라는 부분을 관념론적인 허상이라고 보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인간은 전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주체적인 부분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승화나 정신의 상부적 토대를 통한 그 어떤 존재방식은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목적의식이 강하게 경도된 북한의 주체사상의 지적이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폭넓은 인간학을 고민하는 열린 자세에서 보면, 막스셸러야말로 철학적으로 인간학을 고찰한 높은 관점을 일축시키기엔 아쉬운 면이 많다. 

인간에 관한 논의는 철학적 인간학의 중심주제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막스 셸러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었는데, 그는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비교하고 인간의 세계개방성을 동물의 환경에 구속됨과 구별하여 인간의 지위를 정신에서 찾고 있다.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를 먼저 총체적으로 개괄하면, 인간이 다른 동. 식물과의 차이점은 생각할 줄 아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사물들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전개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자 하는데, 특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실재를〈삶의 충동〉속에 있는 역동적인 힘과 생기발랄함에 두고 있으며, 그 가운데 사랑, 가치, 인격, 세계로써 이 문제들을 생물학적, 사회학적, 형이상학적, 종교철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인간의 고유성을 정신과 삶과의 종합관계 속에서 찾으며, 정신의 유일한 존재형태를 인격이라 하면서 역사 속에서 그 신성을 드러내며, 드러나게 하여 주는 것이 철학적 인간이란 것이다. 즉 인격적 정신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특수한 지위는 생명심리적 세계의 구조 전체를 눈여겨볼 때 비로소 명백해질 수 있는데 생명 있는 모든 것의 특징은 스스로 행위 하는 <자주적 내면존재>로써 생명의 객관적 현상과 함께 내면적 존재 공동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본능>은 영적 생명의 객관적 단계 서열에 있어 감각충동에 따른 제2의 심적 본질 형태로써 즉 생명체의 행동에 의한 정의로 내면적, 심적인 것의 내면상태의 표현으로 본다. 이러한 본능은 목적지향적, 생득적(生得的), 유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감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 종(種)의 부산물로써 변화 할 수 없는 것으로써 그 심적 근본 형태는 동물의 근본 형태 및 인간의 생명의 형태와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셸러의 주장중 재미있는 표현은 탈현실화를 할 줄 아는 지적 존재로써 현실성에 대하여 강력히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의 특성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오로지 정신만이 순수한 <의지>로써 억제활동(의지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현실존재에로 가는 통로로 인식하였던 감정충동의 중심을 작용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교의 탐진치를 명상을 통해 억제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궁극의 본질로 나아간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인간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자>이며 <생명의 고행자>이며 모든 한갓된 현실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항자라고 하며, 그래서 인간은 그의 충동적 에네르기를 정신적 활동에로 <승화> 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셸러의 말중에 이 승화(昇華)라는 부분에 매우 공감한다. <생명>과 <정신>은 서로 본질적으로 상이하면서도 이 두 원리는 인간에게서 서로 화합하고 있는데, 정신은 생명을 이념화하지만 정신을 활동하게 하고 실현시키는 것은 오로지 생명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관찰해서 형이하학인 생명을 형이상학적인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것을 셸러는 <생명현상> 그 자체의 내재된 정신의 자연적 근원적인 자립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정신>의 승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오리엔탈리즘적인 차원에서 이를 잘 통섭시키지는 못하는 인상도 있지만, 그러나 셸러는 인간만이 생명체로서 자기를 넘어서 초월할 수 있는 힘을 믿었다. 시간적 공간적 세계의 피안에서 모든 것과 자기 자신까지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단순한 동물적 생명을 넘어선 인간의 특수한 지위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정해진 항구적 인간의 모습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본래 이성기구는 아니라고 셸러는 말한다. 인간은 학습되어지고 사람이 되어가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며, 그것은 인류의 지도적인 선구자들이 경험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다중이 뒤따라 수행하거나 새로운 본질을 통찰함으로서 새로운 사고와 직관, 가치평가를 이룩하고 형성해 나온 과정의 산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는 본능적으로 마구 살아온 것이 아니라 과정속에서 충동자극을 억제하고, 억압까지 하면서 생명에 대해서 고행까지 하여 자신의 참된 인간규명을 향해 노력해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즉 금욕과 억제와 승화는 내면의 기술, 수행이나 사유적 관찰로서 이루어지는데, 정신은 그러한 작용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정신 그 자체가 에너지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본다.

셸러는 붓다의 구제론을 실례로 들면서 순수한 지향이 갖는 정신의 에너지화를 부정하고 있다. 현실에 주어진 사실은 저항의 고통이라고 본 붓다의 통찰을 보면서, 셸러는 인간의 현 존재적 특성인 욕망(탐욕)의 주체를 적멸로 소멸시키는 것에 주목한다. 현실을 이탈한 관조적인 차원에서 본질세계를 성취한 붓다는 적멸(寂滅), 즉 서양철학용어로는 <허무>의 실현이거나 불교의 신화적인 표현으로는 <열반>을 인간의 성자적 완성으로 보았다.

셸러는 그래서 붓다가 인간에 있어서나 세계근거에 있어서 <텅빔>, <고요한 적멸>, <탐진치의 완벽한 사라짐>의 경지를 보였지만, 긍정적인 정신적 이념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붓다의 이러한 궁극에 도달하는 기술적인 부분, 위빠사나나 분석적 명상의 기법을 고뇌를 극복하는 신성한 기술의 지식으로 생각했으며, 그러한 탈현실의 기술을 통해서 욕망, 갈증을 내면적으로 지양(止揚)하여 감각적 현실세계와 육계의 심리작용(마음작용)이 소멸되게 하는, 즉 존재의 감각적 형상관계나 공간성과 시간성을 차례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인과적 질서를 통찰하는데 그쳤다고 설명한다.

그 이상의 정신적 지향이나 적멸의 이념이 무엇인지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라는 차원에서 인간의 의미, 즉 철학적 인간학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이라고 의미를 축소할 수도 있고, 셸러가 가톨릭종교철학의 창시자라는 점으로 색다른 이론의 갈래로 동양을 바라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불교의 궁극의 실현점인 열반에 대해서 그의 인식은 사실 불교논사들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공(空)의 개념이상으로 서양학자들을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학자인 프랑스출신 <베르나르포르>의 <불교는 무엇이 아닌가>에서 서양인들의 동양이나 불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오리엔탈리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보고 있고, 특히 <승려와 철학자>같은 책들이 그것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서양철학의 빈 공간을 상좌부불교의 한 측면인 팔리성전에서 찾는 것에 대해서 서양학자들도 스스로의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하고는 있지만, 진정한 지식, 인간 정신의 궁극점이 조용한 무(無), 적멸, 윤회하지 않는 영원한 죽음 등으로 응고된 행렬의 무리에 인간정신의 승화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프로이트는 이것을 가학적인 것이라고도 보았는데, 삶의 근원적인 동경을 무기적인 것에의 회귀심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본래 무기질에서 나왔고, 티벳사람들이 자기의 조상을 물고기라고 생각해서 생선을 절대로 안먹는 것처럼 이 우주도 호두만한 점에서 빅뱅으로 시작되었기에, 인간은 그러한 무(無), 빅뱅이전의 정지된 적멸, 무기질의 압축된 고요 속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은 그래서 붓다를 현저한 심리주의자로 보는데, 이것은 인도문화 전체, 명상과 수행을 포함한 인도의 사유와 깨달음체계 모두가 서구의 특유한 <정신>이라는 범주를 갖지 못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와 힌두교의 모든 제도는 모두 생물주의적이며, 무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셸러는 인간 정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는 동양의 도교나 불교에 대해서 그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의 현상과 극복을 위한 방법, 그리고 그것을 위한 수행의 기술만 있을 뿐 인간에 있어서 무엇이 부정되어야 하며, 살려는 의지를 왜 부정하며, 충동을 왜 억제해야 하는지, 탐진치와 생마저 여의고 왜 적멸에 들어야 하는지, 그렇게 충동억제된 에너지가 어떻게 하면 그냥 노이로제가 되어 정신착란에 빠지거나, 아니면 잘 승화해서 존재의 원리들과 일치하게 하는지, 궁극적 가치와 궁극의 목표를 위해서 삶의 의지는 그러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가 명료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원래부터 강력하고 의식적 활동성을 지닌 정신존재로서의 생기론도 관념론이라고 본 셸러는, 그래서 생명과 떨어진 정신이 본래부터 그 자체로 근원적으로 독자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인간의 정신과 의지는 지도와 조종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고 보면서 정신적 의지는 충동적 자극에 대해서가 아니라 표상의 변화에 대한 근원이 결정을 조종하는 가치이며, 그것은 자연영역에서의 내밀한 통일, 모든 생명의 본질단계를 모두 통합한 승화라는 것이다.

그것은 초공간적이고 초시간적이며 정신의 지향을 통해 지식을 넘어 생명의 시간적 경과를 단절시킨다고 보고 있다. 정신의 활동은 간접적이지만, 시간적인 생명과정에 통합되고 그 속에 파묻히면서 정신은 생명을 이념화한다. 그래서 셸러는 정신과 생명은 서로 화합되어 있으며, 가장 심오한 것을 생각해 본 자가 가장 생명적인 것을 사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 정신의 특별한 근본표징인 이 세계의식과 자아의식을 통해서 또한 자기 자신의 심리적, 물리적 본성까지도 대상화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으로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이 어떤 내면적인 필연성에서 인간이 하나의 초세계적이고 무한하면서도 절대적인 존재의 가장 형식적인 이념을 역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본성에 예속된 현존재 단계로부터 인간본성의 단계적 구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실중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격의 실제적 존재가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존재형식을 넘어서 전회(轉回)에서 무(無)속을 들여다보며 <절대적 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왜 도대체 이 세계가 존재하며, 왜 그리고 어찌하여 도대체 내가 존재하는 것일까?> 종교의 기원도 유한한 경험내용과 인간 자신의 중심적 존재를 초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자기 안에서 신성성을 가지고 있는 자립적 존재의 형식적 존재영역에 대하여 말할 때 <종교의 기원>이라든가 <형이상학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되며, 또한 이러한 영역 자체의 기원을 이해한다면 바로 이 기원은 인간됨의 과정 자체와 완전히 일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 일반의 영역은 그것이 인간에게 체험되고 인식되든 아니면 체험되지 못하고 인식되지 못하든 간에 상관없이 인간의 자기 의식이며 세계의식과 꼭 마찬가지로 구조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인간은 오로지 공동수행을 통해서만, 그리고 몰입 및 행동적인 동일화의 활동을 통해서만 자기의 삶과 자기의 정신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모두는 하나의 지지(支持)가 있는데, 가치실현의 절대지지는 신성을 담아가다가 본인이 스스로 하나의 신이 되어가는 것, 자기 스스로에 의한 존재자의 존재를 인격 자체의 몰입 속에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셸러의 평생 주요 관심사는 사랑, 가치, 인격, 세계, 신이었다. 그는 이 문제들을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종교철학적으로 다루었는데, 죽기 직전에 발표한 이 책에서 그는 정신적 측면을 지닌 인격과 승화적 측면인 신성의 습합을 형이상학적 현상학으로 설명한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의 초월적 측면을 믿으니 즉 신(信)을 믿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정신적 승화를 통해 우주에서 곧 신성을 지니는 가능성을 지닌 매우 귀중한 존재들이다. 삶을 이 가치에 맞추고 지속적인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사람됨의 기본적인 철학적 존재로서의 명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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