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의 세계를 안내한 엘레우시스 이야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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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의 세계를 안내한 엘레우시스 이야기①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2.13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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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살아 있는 신화- 데메테르의 경고

 살아 있는 데메테르의 신화

엘레우시스.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20km에 위치하며, 현재는 경공업과 시멘트, 정유, 철강산업의 중심이다. 고대에는 여기에서 매년 엘레우시스 비밀제의가 이루어졌다. 데메테르과 코레(페르세포네)를 주신(主神)으로 하는 신역(神域)은 미케네 시대에 이미 제사의 장이었던 것 같은데, 이와 데메테르 신앙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명확치 않다. 데메테르과 엘레우시스와의 결합 및 비밀의식의 유래는 기원전 600년경에 성립한 호메로스의 ‘데메테르 찬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비밀의식은 이보다 상당히 이전부터 이 땅에서 행해졌다. 초기에는 엘레우시스의 명문호족의 제사였던 비밀의식이 점차 아테네의 중요한 제의가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이후이다. 이 6세기 말에 입신식(入信式)이 행하여진 신전 테레스테리온이 대규모로 개축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전쟁때 파괴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다. 2천여 년 동안 계속된 엘레우시스 비교의식은 고전기에는 다수의 입문자들이 전 그리스 지역에서 몰려와 참가할 정도로 성황이었고, 헬레니즘시대와 로마시대까지 계속 되었다. 이는 엘레우시스가 농업의 발상지이며 비밀의식 입문자에게는 행복한 내세가 약속된다는 신앙의 두 요소가 노예를 포함한 남녀 다수의 신자를 모았던 것이다. 비밀의식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된 후 쇠퇴하고 알라리크의 신역 파괴로 서기 5세기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의 고고학계의 노력으로 신역의 대부분이 발굴되었다.

   

엘레우시스(Eleusis)는 아테네 서쪽 23㎞, 트리아의 비옥한 평원에 있으며 세계 3대 해전으로 유명한 살라미스 섬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다. 아테네에서 고속도로와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독립 도시였으나 기원전 7세기에 아테네에 병합되었고, 그 뒤부터 엘레우시스 신비의식은 아테네의 주요종교축제가 되었다. 엘레우시스 비교의식(秘敎儀式)은 데메테르가 그녀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저승으로부터 되찾아온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엘레우시스 비교의식은 입문의식으로도 불린다. 이 비교의식은 미케네 문명 시대(기원전 1600~1100)에서 유래되어 그리스 암흑기(기원전 1100~750)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여 진다.

고대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재위 기원전 546~528)의 통치 시기에는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을 범그리스적으로 확대시켰고, 순례자들이 그리스 전역과 다른 지역에서도 신비 제전에 참여하기 위해 엘레우시스로 왔다. 

기원전 300년경부터는 고대 아테네 도시 국가가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을 관장하였는데, 아테네의 사제 가문이었던 에우몰포스가(Eumolpidae)와 케릭스가(Kerykes)가 관장하였다.

서기 170년에 데메테르 신전이 사르마샤인(Sarmatians)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가 재건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비전가가 아니면서도 아나크토론(Anaktoron,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4세기와 5세기에 기독교가 대중성을 얻어감에 따라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의 명성과 권위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마의 마지막 비기독교 황제였던 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또한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에 입문한 마지막 로마 황제이기도 하였다. 

기원후 392년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8~395)는 칙령을 발표하여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의 신전들과 성소들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의 마지막 남은 성소들은 고트족의 왕인 알라리크 1세가 로마를 침략한 서기 396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비교의식이 치러진 엘레우시스 신역 

비교의식은 광란적이기도 하였고, 명상적이었으며, 동물의 희생제의와 엄격한 채식주의를 지키기도 했다. 이 신비의식의 핵심은 죽었다가 부활하는 이야기이다.

엘레우시스는 신비의식을 통해 천년이 넘게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세계의 모든 곳에서 입문식을 치루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노예와 황제, 인도의 브라만들도 왔다고 한다.

해마다 약 3만명에 달하는 아테네 시민들도 엘레우시스 성소까지 20여킬로미터를 순례하는 행진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데메테르 흉상. 그리스 원본에 대한 4세기 로마시대 복사본(국립로마박물관)

이 비의의 참가자들은 수난과 부활, 카타르시스의 영적 체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입문식은 변화된 각성 상태의 체험, 즉 신적인 의식에 영혼이 공명하여 신성과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ㅂ저리고 신들과 어우러져 신들림을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두고, “입문자들은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강한 인상을 받고 정신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었다” 고 하였다.

제사장이었던 플루타코스도 입문자들이 확실한 믿음의 획득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고 고백했다.

 

데메테르 여신. Pierre Mignard. 17세기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사라진 엘레우시스의 비교. 그러나 가장 최근에 데메테르가 출현했다는 기록은 1940년 2월초에 일어났다.

고트족의 왕인 알라리크가 396년에 엘레우시스 성소를 불태워버린 것만큼 이교신앙을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한 것은 역사에 드문 일이다.

서기 5세기경 엘레우시스의 최후의 사제는 예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후계자는 정당하지 못하며 신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 시민이 아닐 것이며 다른 신을 신봉하는 자이며 단지 그들의 의식만 주관할 것이라는 자신의 맹세에 발목을 잡힌 자이다. 이러한 신성모독 때문에 성소는 파괴될 것이며 두 여신의 제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알라리크가 이끄는 고트족이 테르모필레의 험준한 길을 통해 내려왔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즉 기독교 수사들이 그 뒤를 이으면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입문의례가 사라졌다고 데메테르가 극적으로 성현한 장소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기독교의 그리스정교가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엘레우시스를 제외한 나머지 그리스지역에서는 성 데메트리오스가 그녀의 위치를 차지하고 농업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의 성인으로 영명축일이 정해져 있으며 엘레우시스에서 여전히 숭앙받고 있다. 19세기 초까지, 마을의 농부들은 데메테르 여신상을 꽃으로 덮어 풍요로운 수확의 기쁨과 들판의 축복을 기렸다.

1860년대에도 성 데메트리오스 이야기를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르노르망은 들었다고 했다. 그가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성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에서 온 노파였다고 한다. 한 터키인이 그녀의 딸을 빼앗아 갔으나 한 용감한 팔라카르(의용군)가 그녀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28년에도 엘레우시스에서 90세가 된 밀로나스라는 사람이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노파의 이름도 데메트라였다고 한다.

이렇듯 데메테르는 계속적으로 아직도 엘레우시스를 떠돌며 사람들에게 나타나 여러 가지 이적과 도움을 주고 있다.  

 

성 데메트리오스(가운데. 270~306?)는 위대한 기독교 순교자이며 테살로니키의 수호성인이다. 그녀는 슬라브족이 테살로니키를 포위 공격하였을 때, 여러 차례 나타나 기적을 선보였다고 한다. 7세기 모자이크. 데살로니키 성 데메트리오스 교회 소재

 

 

성 데메트리오스 성당.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다. 창건은 5세기 중기부터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테살로니키의 수호 성인인 성 데메트리오스에게 전념하는 성당이다. 성 데메트리오스가 순교한 곳은 당시 고대 로마의 목욕탕 자리로 여기에 교회가 들어섰다. 그리스 최대의 바실리카 식 교회이며, 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와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이다. 1917년 대화재로 불탔으나, 1926년부터 1948년까지 오랜 재건을 거쳐 1949년에 축성식을 열었다. 1996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런데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최근의 기록으로 볼 때 1940년 2월 초에 일어났고, 아테네에 있는 신문 헤스티아지에 기사가 2월7일자로 실린 것이다. 신문사는 해설까지 붙여 내용을 보도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아테네와 코린토스 사이에 있는 버스 정류장 중 한 곳에서 한 노파가 버스를 탔다고 한다. 노파는 마르고 주름이 쭈글쭈글 했지만, 키가 매우 크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노파는 차비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버스운전사는 노파에게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곳이 바로 엘레우시스였다. 그러나 버스 운전사는 엔진을 다시 켤 수 없었다.

마침내 승객들이 자선을 베풀기로 하고 노파의 차비를 대신 내 주었다. 노파는 다시 차를 탔고 이번에는 시동이 걸리고 버스가 출발을 했다. 그때 노파가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좀 더 일찍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데, 당신들은 이기주의자들이군요. 내가 당신들과 함께 있으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당신들이 살아온 방식 때문에 당신들은 벌을 받을 겁니다. 당신들은 작물들과 물을 얻지 못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도 노파는 위협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헤스티아에 게재된 그 기사의 필자는 “노파가 사라지기 전에 아무도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승객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버스표가 진짜로 발행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노파에게 떼어주고 남은 버스표를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오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노파로 변장한 코레의 어머니(데메테르)가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의 집에서 예언을 하고 몹시 화를 내며 사람들이 경건하지 못하다고 책망했다. 그리고 모든 지역에 가공할 만한 재난이 있을 거라고 선언했다.” 는 저 유명한 호메로스의 시가 떠오를 것이다. 데메테르 여신은 여전히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서 우리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까?

 

헤겔(G.W.F. Hegel, 1770~1831)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으며, 1778년부터 1792년까지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후 1793년부터 1800년까지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때 청년기 헤겔의 사상을 보여주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미출간 단편들을 남겼다. 첫 저술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가 발표된 1801년부터 주저 '정신현상학'이 발표된 1807년 직전까지 예나 대학에서 사강사 생활을 했다. 그 뒤 잠시 동안 밤베르크 시에서 신문 편집 일을 했으며, 1808년부터 1816년까지 뉘른베르크의 한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년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후, 1818년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 강의', '역사철학 강의'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다.

  

헤겔과 엘레우시스

 

헤겔은 지상 너머의 신을 거절하고 이 지상에서 신을 찾는 일에 횔덜린, 셸링과 젊은 시절의 헤겔이 함께 했다. 헤겔은 그래서 새로운 민중종교를 주창했으며, 신을 오직 자신들만의 신으로 삼고, 자기 족속의 안전장치로만 언약된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과 인간사이의 거래라는 교환가치로 환원시킨 신을, 또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 인간에게 지배하게 만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비난했다.

헤겔은 엘레우시스 비의가 지성소에 숨겨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신상과 감정, 영감과 흠모의 모든 내용과 신들의 출현까지도, 지위고하가 배제되지 않고 개방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겔은 종교를 그대로 둔 채 부패한 윤리체계와 그 국가 체계나 법률을 바꾸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기독교 정신과 그 문명’에서 말했다. 신성은 즉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거룩한 엘레우시스의 황홀함을 그리워하면서, 헤겔은 신종교를 주창했으며, 동지를 규합해 종교동맹을 추진했다.

 

 

어느덧 내게 그려지네 열렬히 고대했던

그 포옹의 장면, 그 즈음 번갈아 탐문하던 물음들의 신비스런 모습

벗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가짐, 표정에서 그때 이후로

지금껏 변한 것이 무엇이던가

예전의 동맹에 대한 진실한 마음 점점 더 굳어져,

더욱 더 풍부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기쁨이여.

맹세의 말로 확약하진 않았으되

오직 자유로운 진리를 위해서만 생겨난 그 동맹,

의견과 감정을 얽어매는 규약과는 결코 화해하는 법 없었네.

 

1796년 8월에 헤겔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헤겔을 위해 일자리를 찾고 있던 횔덜린 앞으로 '엘레우시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다만 현존하는 것은 그 초안일 뿐으로 그 시가 횔덜린에게 보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헤겔은 많은 시를 남기고 있지만, 이것은 그 가운데서도 최대의 작품이다. 엘레우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지명으로서 거기서 중요한 비밀제사가 행해졌기 때문에 그 제사 자체가 그렇게 불린다. 그 비밀제사에 의탁하는 모습으로 헤겔은 3년 전에 이별한 횔덜린에 대한 우정을 격렬하게 고백하고 있다.

베른에서의 바쁘면서도 고독한 처지, 그리고 헤겔 등의 희망을 배반하고 있던 프랑스 혁명의 현상. 일찍이 튀빙겐 신학교에서 헤겔 등이 말하고 있던 이상은 이미 상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횔덜린에 대한 우정이 되어 넘쳐흘렀다. 그리고 이 시를 쓴 두 달 후 헤겔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취직자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횔덜린으로부터 받았다.  

다음 시는 헤겔이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는 횔덜린에게 보낸 것이다.

  

엘레우시스- 횔덜린에 부쳐

 

가슴을 열고 환영하오니

숭고한 정령들이여

고귀한 그림자들이여

그대들 머리에는 지혜의 빛이 반짝이고 있네.

그것은 놀라는 법이 없네, 이것은 내 본향의 정기

엄숙하게 그리고 그대들을 감싸 흐르는 찬란한 빛이여

아 이제 그대 성소의 문이 활짝 열리며

엘레우시스를 다스리는 그대 오 세레스(데메테르)여

그대를 받아들이는 열정에 흠뻑 취하여

이제 가까이 있음을 느끼고

그대의 계시를 알게 될 것 같다오

존재의 의미와 그 고귀한 뜻 새기며

신들의 만찬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그들의 고귀한 신탁을 듣는 것 같다오

 

그런데 그대의 신전에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속삭임도 없다네.

오! 여신이여, 신들의 영역 성스러운 제단에서

쫓겨나 아득한 산정의 올림포스에 유배되고

타락해버린 인류의 무덤에서

한때 인간을 사로잡았던 순결한 정령은 쫓겨 가버렸네

그대의 사제들도 이제는 지혜를 침묵하고

거룩한 봉헌의 어떤 음악의 송가로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네.

헛되도다! 뒤늦은 세상에서 그의 그림자를 좆는

한갓 탐구자들이 추구하는 건 호기심에서 나온 것일 뿐

그에게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찾을 수 없다네.

오히려 탐문자는 호기심을 소유할 뿐 그대를 경멸하기까지 한다오.

지혜를 정복하려 탐문자들은 말들을 채굴하네.

그대의 고귀한 뜻이 그 말들에 각인되어 있기라도 하듯이

헛되도다! 그들이 붙잡은 건 먼지와 재일뿐

이 안에서 그대의 삶 그들에게는 결코 되돌아오지 않으리.

부패와 영혼이 떠난 상태에서도 우쭐댔던

영원히 죽은 자들이여

되돌아오지 않는 욕심이 없는 자들이여

무상하도다. 그대의 향연의 어떤 징표도

형상의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으니

봉헌된 아들에겐 고귀한 가르침의 충만함과

형용할 수 없이 심오한 느낌 너무 성스러워

메마른 말들로 그는 가치를 측량할 수 없었다오.

 

사유로는 영혼을 파악할 수 없으니

시간과 공간너머 무한성을 예감하며

침잠한 채 자기를 잊고 있다가 다시금 의식으로 깨어나는 것이

영혼이기 때문이라오. 다른 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한 이는

천사의 입술로 말한다 해도 말의 한없는 부족함만 느꼈을 뿐이라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생각을 통해 신성이 왜소화되고

말을 통해 더욱 그렇게 되는 것

어느새 말이 그에게 허물로 다가와

알아서 입을 다물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네.

거룩한 밤에 봉헌자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달할 수 없는 일

현명한 법은 그가 삼갔던 것을

더 가난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삼가게 했을 뿐이라네

이들의 바보 같은 소란도

마음이 열린 자들의 묵상을 방해하지는 못했으니,

그들의 공허한 미사여구는

신성을 향한 그에게 노여움을 안겨줄 뿐이었다네

신성은 회상에 의지할 만큼 진창에 떨어질 수 없는 것,

신성은 궤변론자가 은전 몇 닢으로 팔아치운

노리개나 상품이 될 수 없는 것,

말 많은 위선자의 외투로도

어수선한 아이들을 훈계할 회초리로도 될 수 없는 것이었다네.

그리고 신성은 낯선 자의 형제에게서 나온 메아리에 의지할 만큼

그렇게 공허하지 않았다네.

여신이여 그대의 아들들은

그대의 영예를 탐욕스럽게도 골목과 시장에서 끌고 다니진 않았다오.

오직 그들 가슴의 성소에 그 영예를 간직하였다오.

그대는 그들의 입가에 살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 자체가 그대를 경외하는 것이었다오.

그들의 행위에 그대는 여전히 살고 있다오.

이 밤도 나는 그대를 듣네, 오 거룩한 신이여!

  

프리드리히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은 독일의 시인이다. 넥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출생하였으며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당시 철학자 헤겔, 셸링 등과 사귀었다.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설 《히페리온》, 미완성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하이델베르크>, <라인강>, <다도해>, <빵과 포도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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