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불교사 큰 획..아라1동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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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불교사 큰 획..아라1동 관음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0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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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조 안봉려관 공덕비, 주지 서경보 스님이 1975년에 세운 것'

 

아라1동 관음사


아라동 관음사
위치 ; 제주시 아라1동 387.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관음사는 5·16도로와 1100도로를 잇는 산록도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관음사에서 발행한 리후렛 <觀音寺의 沿革>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며, 조선 숙종28년(1702)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사되었다가 1908년 안봉려관(安逢廬觀) 스님에 의하여 재창건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불교의 쇠퇴에 대하여 흔히 이형상의 사찰훼손을 주요인으로 꼽고 있으나, 이형상이 혁파한 것은 신당(神堂)이 129개소였고, 사찰은 단 5개소뿐이었다.…(탐라순력도 92쪽)

안봉려관에 의한 관음사 창건은 제주도 불교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쇠퇴하였던 불교가 안봉려관에 의해 재포교되었기 때문이다.

안봉려관을 제주 불교의 중흥조(中興祖)로 보는 것도 이 같은 사실에서 연유한다.

안봉려관은 제주시 화북동에서 1865년 6월 14일 출생하였다. 1901년 백의관음(白衣觀音)이 나타나 '발심출가(發心出家)하여 중생제도에 헌신하라'는 현몽을 받고 1907년 12월 1일 제주를 출발하여 전남 해남군 대둔산(大芚山)에 있는 대흥사(大興寺)로 갔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1607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모시게 되면서 선교의 총본산이 되었던 사찰이며, 특히 서산대사의 문도(門徒)들 가운데 13대종사(大宗師)·12대강사(大講師)가 배출되어 숭유억불의 정책 속에서도 조선 후기 불교문화의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안봉려관은 이곳에서 주지스님 상좌의 나병을 고쳐 준 것이 인연이 되어 1907년 12월 8일 수계식(受戒式)이 이루어졌다. 은사(恩師)는 유장노니 스님이었고, 계사(戒師)는 청봉화상(晴峯和尙)이었다.

이듬해 1월 5일 제주로 돌아온 안봉려관은 제주시 화북동 집안에 불상을 봉안하고 관음사(초기에는 대흥사 포교소라 생각됨) 창건을 발원하고 있었다.

그가 1908년 4월 8일에 경찬제(慶讚齊)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한라산으로 입산하였다.

아마 안봉려관은 이 당시 산천단과 아미산을 오가며 석굴(石窟)에 의지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편, 대흥사에서 가사불사(袈裟佛事)를 마친 운대사스님은 안봉려관을 찾아서 1908년 5월 3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안봉려관이 한라산에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산천단에서 삼일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회향하려는데 산천단에서 안봉려관을 만난 것이 5월 5일이었다.

안봉려관은 운대사에게서 袈裟를 받고 그 자리에서 관음사 창건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안봉려관은 1908년 10월 16일 결제일(結制日)을 기하여 현 관음사 도량 안에 있는 석굴에 의존하여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1910년에는 안봉려관의 불사를 돕기 위하여 대흥사에서 박만화 율사스님이 이회명(李晦明) 일승선사를 모시고 제주도로 왔다.

이들은 1910년 4월 8일 안도월(정조) 스님을 이회명(李晦明) 스님의 상좌로 戒하여 초대 住持로 임명하였다.

이회명 스님을 은사로 하고 박만화 율사를 계사로 하여 수계한 안도월 스님은 장정명(송파)·오일화(명륜) 스님을 상좌로 하여 관음사 도량불사를 수행하였다.

그 후 안봉려관 스님의 기적이 계속 일어나 관음사에는 그의 신기함을 들은 중생들이 불교에 귀의하느라 성황을 이루었다.

 

1924년 11월 25일 당시 제주도사(濟州島司) 전전을 기성회장으로 하여 불교협회를 창설
1925년 4월 8일 제주시 이도동 1362번지에 포교당(현 불교회관) 창설
1925년 10월 1일 대흥사에 모셨던 관음상을 포교당에 봉안


1926년 법화사·백련사·불탑사 재창건
1926년말의 교세는 관음사 포함 포교소 4곳의 신도수가 1,068인이었다.(당시 천주교 304인, 기독교 698인에 비하여 수는 많으나 교세는 미약하였다)


1932년 월성사 창건
1936년 김영희 처사의 도움으로 아라동 산 66번지 아미산 일대 5천보를 관음사 명의로 등기
1936년 5월 30일 안도월 스님 입적


1938년 5월 29일 안봉려관 스님이 입적한 다음날 관음사는 화재로 전소, 이 때 국채웅이 거금을 제주도 금융당국에 예치해 줌
1941년 국성해 스님·홍법선 스님이 목수 32인을 거느리고 제주에 와서 재건 작업 착수
1943년 대본산말사 제주관음사(大本山末寺 濟州觀音寺)로 승격·인가됨


1946년 일제에 의해 제정되었던 本末寺제도 폐지, 교무원을 두게 되자 이도동에 있는 포교당에 교무원 설치
1949년 1월 15일 제주민중항쟁의 피해로 건물 완전 소실
1954년 7월 15일 홍법선·이순전·김순정·이화선·고선봉 스님 등이 도남동 856번지에 제2차 관음사 재건(오늘날의 보현암)


1955년 주지 서경보 스님 증명 김설호 스님 등을 모시고 성대한 봉불식 거행
1964년 관음사 재건을 위한 '복구기성회' 조직, 아라동 387번지 관음사 舊地에서 기공식
1969년 대웅전 준공

 

경내 동쪽에 세워진 [觀音寺重修功德碑]에는 [說傳高麗有蘭若 排佛崇儒法亂中 五百寺庵完消滅 數千暗夜島衆悲 辛丑蓬尼最創寺 戌子(戊子의 誤刻인 듯)共亂復火消 甲辰月峯檀再建 香雲鳳巖起殿閣 丁巳秋十月]라고 되어 있으며, 1970년 나한전, 1971년 선원·일주문, 1972년 천왕문, 갑진년 대웅전, 을묘년 범종, 정사년 西香三聖閣 등을 건립하였다고 새겨 놓았다.

한편, 관음사 입구에 세워진 비석들 중에서 안봉려관 스님의 공덕비는 1948년 오이화 스님이 조각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주지 서경보 스님이 1975년 완성하여 세운 것이다.

본래 관음사 절집의 지붕은 넓적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근처 냇가에 가면 기왓장으로 쓸 만한 돌들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불전으 짓도록 하여라'라고 계시하자 그가 계시대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지금은 없다. 1940년의 화재와 1948년 사삼의 참화가 흔적조차 모두 없애 버린 것이다.

사삼 당시 한 때 재산유격대의 도당시령부가 이곳 관음사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1949년 2월 12일 군경토벌대가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느라 관음사 건물을 모두 불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 봉려관 스님이 대둔사에서 가져온 300년 된 목불상도 탔다고 한다. 그런데 이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웅전에 불을 붙이자 300년 된 목불에도 불이 옮겨붙었는데 그 부처가 노했는지 몸체가 격하게 떨리고 눈이 벌겋게 되어 번쩍번쩍 빛을 내더니 결국 '펑' 소리와 함께 폭파되었다고 한다.

이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

당시에 목불은 관음사가 아니라 제주시내 포교당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에 타지 않고 현재에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은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1999년 관음사에서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 목불은 1698년 전남 영암군 성도암에서 제작된 것인데 이를 봉려관 스님이 1924년에 관음사로 옮겨와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제주역사기행 98∼99쪽)

현재 관음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23교구 本寺를 맡고 있으며, 末寺로 보덕사를 비롯하여 27개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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