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걷는다(16)..'상상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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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걷는다(16)..'상상의 길'을..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3.07 0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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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16코스 탐방기)고내포구-광령까지 숨어있는 아름다움이

 

 


내가 젊고 자유로워져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조금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켜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들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시켰을지..

희한한 책을 만났다.
큰 제목은 ‘인생열전’인데 그 앞에 작은 글씨로 ‘묘비명으로 본 삶의 의미’라고 적고 있는 책(박영만 저)이었다.

윗글은 웨스트민스트 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써 있는 글이라고 한다.

아직 다 읽지도 않은 책이지만.. 머리말에 있는 몇 개의 묘비명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컸다.

 

 

이왕 소개하는 김에 하나 더..

송나라의 주신중은 훌륭한 죽음으로 5멸의 실천을 내세웠다고 한다.


그 5멸이란 ‘첫째 멸재-재산을 남기지 말 것, 둘째 멸원-원한을 남기지 말 것, 셋째 멸채-남에게 빚지지 말 것, 넷째 멸정-정분을 남기지 말 것, 다섯째 멸망-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등이다.

 

제주올레16코스를 걷는데 왜 이들 묘비명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건 어느 오름 정상에 유유자적 앉아 있는 어느 무덤 3개가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많았던 어느 공동묘지에서의 ‘처사’라는 말에서도 그런 감상은 생기지 않았지만..
오름 정상에 누워있는 무덤들은 늘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올레16코스를 걸었던 3월5일 일요일, 이날 만난 수산봉 정상의 3개의 무덤도 그 오름 정상에 꼭 묻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의 묘비에는 보통 그의 어록이 아닌 그의 직위가 적혀있다는 데에도 각종의 의문을 품게 한다.
죽은 다음에 그 직위나 직책은 과연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죽은 후 묘비에 써 둘 말은 준비나 하고 사는 것인지..
그 책을 잠시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솔솔 일어났다.

 
 

일요일인 3월5일, 올레16코스는 오랜 만에 홀로 걷는 시간을 가져봤다.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같이 걷던 모든 사람들이 출장중이거나 할 일들이 많다고 해서 함께 갈 수 없는 입장이라 나도 쉴까 하면서 계속 미적대다가, 늦은 아침인 10시쯤 집에서 나와 늦게 출발했다.
거리(16.7km)가 짧았던 것이 그런 여유를 부리게 했는 지도 모르겠다.

16코스를 걸으면서 나는 이 길을 ‘상상의 길’로 부르기로 미리 정했었다.
이 상상의 길이라는 뜻에는 상상 외로 괜찮고, 그렇게 부를 충분한 이유가 있는 길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제주시에서 차를 타고 고내포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54분이었다.
이날 처음 걷기 시작할 때는 조금 흐린 날씨였지만 오후가 되자 겉옷을 벗고 다녀야 할 정도로 완연한 봄 날씨가 이어졌다.


고내포구 앞 나무로 된 해안누리길 안내판에는 고내포는 고내리 성창 이름이라는 설명과 함께 고내리는 제주도내에서 한라산이 안 보이는 곳 중 한 곳이라고 써 있었다.


고내리 주위지대가 고지대로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어 마을 이름도 '높은 곳 안쪽에 있다'고 해서 고내리라는 설명.

 

 

이 고내리포구는 또 요강터라고 불린다고도 한다.
신엄리와 경계지역인 강척코지에서 개구미에 이르는 바다바닥이 마치 요강처럼 움푹 패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요강터 일대에는 자갈밭이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그물을 드리우면 대부분 찢어져 버려 바다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은 포구가 절실했다고 한다.


이 고내 성창은 대략 고려 원종11년(1230년)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에 들어 방파제 공사는1960년부터 시작됐다.


지금도 고내포구는 몇 척의 배가 이용하고 있을 뿐이나 옛 정취를 간직한 몇 안 되는 아늑한 포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고내포구는 크지 않은 그렇게 아늑한 작은 어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6코스 스탬프 포스트 바로 옆에는 우주물이 있었다.
지금은 쓸모 없이 버려진 곳이지만 주위에 인가가 많아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의 주요한 생활용수로 사용하기도 하고 빨래물 구실도 했다고 하는데 우주물의 우자는 '언덕사이 우' 자이고 주는 '물노리 칠 주' 자라고 한다.


설명서에는 이 물은 언덕 사이로 흘러 나오는데 이 물에서 물놀이를 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이어 올레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도록 안내했다.
바다에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고 육상에서는 이 해안도로의 인기를 반영하듯 각종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자동차를 타고는 많이 지나간 곳이지만 이날 해안도로변을 따라 걷는 이 길은 이곳이 왜 그토록 아름다운 곳인지를 더 잘 느끼게 해 주었다.

화산 폭발 때 용암이 흐른 흔적이 그대로 남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벽길을 따라 걷는 올레는 바다색깔과 어우러져 특별한 감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해안도로 절벽의 압권은 단연 포세이돈 큰바위얼굴이었다.
누군가가 지나다 우연히 발견했다는 이곳은 이번에 처음 만나봤다.


거대한 암벽으로 만들어진 바다의 신이 바다를 응시하며 장엄하게 서 있는 그 얼굴은 사실 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 진짜로 닮아 보였다.

바위색깔까지도 얼굴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더욱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정말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 포세이돈 해변..이탈리아 포스타노 해변은 포세이돈의 전설로 유명해져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절벽을 따라 들어선 호텔과 레스토랑, 도자기와 염색, 지역특산물 상점이 좁은 골목에 들어차 있고, 화랑과 아티스트들의 작업실들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사진=안종국 제공)

 

포세이돈 전설 간직한 이탈리아 포스타노

포세이돈의 전설을 가장 잘 활용한 곳으로 이탈리아 캄파니아주의 ‘포스타노(Positano)’가 있다.
폼페이에서 유명한 카프리 섬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절벽을 끼고 형성된 휴양도시다.

이곳은 내쇼날 지오그래피의 기자들이 선정한 ‘죽기 전 가보아야 할 곳 1위’로 뽑히기도 하였고, 세계여행 담당기자들과 여행 관계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 이곳 ‘포스타노’를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세계적인 예술가 리처드 바그너, 토스카니니, 로버트 카파, 앙드레 고디 등 유명한 거장들이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포스타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이탈리아 출신 세계적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포스타노에 푹 빠져 자신의 음악적 영감을 이곳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이렇게 유명해지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바로 포스타노의 해변이다. 이 해변은 우리나라의 백사장만 못한 모래와, 200미터도 안 되는 해변, 제주서귀포의 절벽보다 못한 암반뿐이지만, 이 해변을 둘러싼 포세이돈의 전설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이름인 포스타노는 ‘포세이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신 데메테르를 사랑한 포세이돈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말로 둔갑하여 멋진 포스타노 해변을 마구 달리며 유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을의 가장 유명한 기념품은 상반신이 인간 모습이고 하반신은 말 모습을 한 포세이돈의 청동상이다.


이제 포스타노는 해변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절벽의 하얀 집과 노란색 별장이 독특한 풍광을 자아내는 유럽의 최고 휴양도시가 되어 1000여명의 주민 대부분은 호텔, 레스토랑, 기념품점 등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는 이탈리아의 그 화려한 유적이나 유물이 하나도 없다. 대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예술가와 여행자를 끊임없이 유혹해 사람들 향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아늑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하고,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산책을 즐긴다.


산비탈에 걸린 아름다운 별장, 호텔, 레스토랑이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무너질 듯 아찔하게 붙어있고, 예술의 도시답게 화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겹겹이 쌓아 올린 듯한 집이나 푸른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어부 모습을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 내는 화가들의 빠른 손놀림으로 주변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인다. 또한 작은 미술 갤러리들이 산재해 있어 신예 작가들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이탈리아 화가뿐만 아니라 유럽의 미술세계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포세이돈의 전설로 시작되어 수많은 작가, 예술가, 화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포스타노처럼 ‘신엄리’도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휴양도시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안종국의 글에서}


이 포세이돈 얼굴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가니 이번에는 해안도로변 절벽 위를 걷도록 만든 길이 나타났다.

절벽 위를 걷는 꿈은 누구나 가끔 꾸는 것이지만 이곳이야 말로 절벽위를 마음놓고 걷도록 이어진 길이 너무 아름다웠다.

푸른 색 바다와 검은 돌과 노란 잔디의 끝을 따라 걷는 길은 올레길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는 정경이었다.

그곳에 놓인 간간이 보이는 의자들..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의자의 모습도 그림이 되는 듯 했다.

나는 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바다를 가만히 보고있자니..

가마우지 한마리가 물속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한마리, 두마리..가마우지는 물속을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입에는 물고기 한마리씩을 물고 나왔다.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끊임없이 먹어대는 그 모습이 참으로  대식가인 것만 같았다.

내가 볼 때만 해도 5-6마리는 잡아먹은 것 같은데, 가마우지는 계속 물속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유유히 다른 쪽 바다를 향해 갔다.

이 길을 따라 정신없이 걷다보니 신엄이다.

신엄해안길은 잘 짜여진 계획도로처럼 들길같은 올레를 선사했다.
가다보니 이름모를 새 한 마리가 포즈를 잡고 앉아 있었고 거대한 절벽 아래는 푸른 바다가 넘실댔다.
이곳에는 또 고래전망대도 있었다.


가끔 돌고래떼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곳이라 그런 팻말을 붙였나보다.
길은 돌과 잔디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대로가 나타날 때까지 쭈욱 이어졌다.


이 고내-신엄간 해안도로는 내가 늘 '세계에서 두 번 째로 아름다운 길'이라고 자랑했던 길이다.
그 아기자기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냥 보아도 아름다운 길이지만 그 길을 걸어본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선택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이 구간은 걷고 누릴 수 밖에 없는, 뭐라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곳이다.
용암을 타고 바다로 나가듯 사진을 찍어 보면 이 길은 장면마다 새로운 얼굴을 나타낸다.
이곳 만큼은 가는 곳곳 볼거리가 넘치니 그냥 걸어서 가 보라고 할 밖에..


걷다보니 구엄 돌염전이다.
소금을 생산했다는 곳.


예전에는 아무런 표시나 새로운 시설이 없었으나 이곳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데크가 만들어지고 소금을 만드는 공간이 생겼고 또 주차장이 만들어져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구엄 돌염전은 삼별초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 주둔할 당시 토성을 쌓으면서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문헌에 의해 고려 원종 12년에 설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마을이름은 엄장포 또는 엄장이라고 했다.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강려 목사가 부임하면서 바닷물로 햇볕을 이용하여 소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쳐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생업의 터전이 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소금빌레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소금밭의 길이는 해안을 따라 300미터 정도이고 폭은 50미터, 넓이는 4,845평방미터로 약 1500평에 이른다고 한다.


이 소금밭은 이 마을 주민들의 생업의 터전으로 약 390년동안 삶의 근간이 되었으나 점차 의식구조의 변천과 생업수단의 변화로 1950년대에 소금밭의 기능을 잃었다고 기록 돼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온 올레코스는 이 소금밭에서 구엄마을 안길로 안내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5km를 걸었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마을 안길은 해안도로쪽과 달리 농사를 주로 하는 마을이었다.


아직도 예전 흔적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벌써 마을분위기가 달랐다.
현대식 건축물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었고 새 것과 옛 것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대식으로 예쁘게 변해가는 마을 모습을 지나쳐 그 마을길을 다 나오니 대로가 나타나고 이어진 길은 수산봉을 향하도록 안내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른 수산봉 정상에는 조그만 정자와 함께 운동기구가 놓여 있었고 두 세 개의 매화나무는 봄을 알리듯 활짝 피어 있었다.


이곳 의자에는 아까 오름을 오를 때 "실례합니다" 하고 나를 먼저 앞질러 갔던 젊은 외국인 청년이 삶은 달걀을 꺼내 먹으려던 참이었다.

말을 붙이니 "죄송합니다. 한국말을 잘 못합니다"라고 대답한  그는 영국에서 왔고 오라동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내게 가장 먼저 물었던 말은 "이 산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수산봉이라며 물과 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줬다.

"내려가면 저수지가 있다"고..


"여기에 온지 1년이 됐다"는 그는 두번째로  "가끔 올레길을 걷는데 올레 중 어디가 가장 좋은 지"를 내게 물었다.

"나는 4-5코스 7,8,9코스.."를 얘기하다가 "올레는 모두가 아름답다"고 답해 주었다.

 

 

 

 

 

 

 

 

 

 

 

 

 

 

 

 

 

 

 

 

 (내용이 많아 2번에서 게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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