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4학당..오등동 남학당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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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4학당..오등동 남학당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07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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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호 건학비」라는 깨어진 비석과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로 추정'

 

오등동 남학당 터 南學堂址


남학당 터 南學堂址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위치 ; 제주시 오등동

 

 

 

조선시대 관학(官學)에 대한 사학(私學) 교육기관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학교조에 보면 제주에는 〈월계정사(月溪精舍)와 김녕정사(金寧精舍) 외에 성안에는 향학당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1486년(성종17)으로 추정된다.

또 탐라기년에는 〈1534년(중종29) 겨울에 심연원 목사가 남성 안에 향학당을 세웠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건물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 두 정사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렵 좌우면에 학당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향교에서 시작되어 각청(各廳)과 각사(各社)가 안팎에서 호응하여 소장을 내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①주성 내에는 세 곳에 학당이 있으나 외곽인 좌우면에는 하나도 없다

②좌우면은 주성과의 거리가 100리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혹자는 집이 가난하여 출접할 수 없고 혹자는 길이 멀어 출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목사인 이예연은 실질적인 이유를 주성은 노래와 여색, 술과 도박이 판치는 곳이므로 나이 어린 아이들이 방탕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부형들이 주성 내의 학교에 취학시키지 않으려고 각기 자기 면에 학당을 설치하게 해 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라 여기고 1830년 겨울 학당 설치를 허락하였다.

각면에서는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하여 다음해인 1831년 2월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건물이 완공되자 각 15명의 접생을 두어서 항상 기거하며 학습을 익히게 하였다.(제주교육사 164쪽)

이원조의 「耽羅誌草本」학교조에 《순조 31년(1831)에 이예연 목사가 좌학당을 세화촌에, 우학당을 명월리에 설치하였는데 부름접생(付 接生 ; 름과를 주는 학생)이 각기 5인이었고, 순조 33년(1833)에 한응호 목사가 남학당을 오등촌에, 서학당을 상가촌에 각각 설치하였는데 부름접생이 역시 5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이른바 4학당이라고 한다.

이원조 목사는 이어서 《탐라록》에 쓴 1843년 3월 16일자의 《사학당이건기》에서 《탄환같이 작은 섬에 향교와 서원 서당이 설치되어 있는데다 4학을 더 설치하였고 그 늠사(4학의 학생)도 60명에 달하여 국학과 대등하게 되었으니 넘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넘치면 해이해지고 해이해지면 폐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60명 중에는 선비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고 4학에는 학교다운 학당이 하나도 없다.》하였으며, 〈전 영윤(令尹=牧使)이 나서서 4학의 학생 수는 줄였으나 학당을 줄이지 못한 것은 단지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여기서 전임 목사는 구재룡이며,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구재룔 목사가 재임중에 파직되었음을 뜻한다.) 하여 4학당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 결과 《강독과 제술을 독려하여 가르치자 날마다 제생이 주학에 모여들어 4학이 헛되이 설치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하고, 그 중에서도 남학당이 더욱 심하였다고 했는데《우뚝하게 텅 빈 집 한 채가 바람과 흙비가 사방으로 침습하고 게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선비들의 요청에 따라 남학당은 광양으로 이건하게 되었는데 《이는 먼 곳에서 가까워졌으니 나쁜 짓을 고쳐 착하게 되기를 바라고, 북쪽을 등지고 남면하여 방향을 바로잡고, 4학을 하나로 합쳐서 겉치레를 제거했다.》고 하였다.(제주교육사 162쪽, 교육제주 103호)

그러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이원조 목사에 의하여 통폐합이 시도되었으나 그 결과는 이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헌종12년 병오(1846)에 南西右학당을 파(罷)하고 삼학재(三學齋 ; 橘林·山泉·三姓) 生을 사즐(査櫛)하여 대액( 額)하였다고 되어 있다.(제주향교지 294쪽)

즉, 이들 3학의 학생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강독으로 시험을 보인 뒤 부실한 자는 천역으로 충당하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3년 뒤인 1849년에는 장인식 목사가 다시 남·서·우학당을 설치하였는데 그 간의 사정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들 학당도 고종 초에 들어서는 좌학만 남았다가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삼천서당에 통합되었다.(제주교육사 165∼166쪽)

사실 남학당이 있었던 위치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 실정이고, 「한응호 건학비」라는 깨어진 비석과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이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 남학당 터를 추정하고 있다.(2000년 8월 25일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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