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국내 최고(最古) ..외도1동 우물 유적 (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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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국내 최고(最古) ..외도1동 우물 유적 (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12 0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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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후 100∼200년경(원삼국시대) 추정,도로개설 위해 묻어버려


외도1동 우물 유적 (멸실)

▲ 외도동_출토_대형토기

▲ 외도동_우물_유적


외도동 우물 유적 (멸실)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길 개설을 위하여 묻어 버림)


위치 ; 제주시 외도1동 125번지 일대(광평마을과 외도동을 잇는 도로상 외도 가까운 교량 서쪽 50∼60m 지점)


시대 ; 기원후 100∼200년 경 (탐라시대)

 

 

제주문화예술재단(이사장 양창보) 부설 제주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7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긴급시굴조사에 이어 11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연동-외도동간 도로개설 구간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기원 후 100∼200년경(원삼국시대)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고 우물 유적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것보다 고고학적 편년이 300년 가량 앞선 대규모 우물 군집이다.

지금까지 국내 고고학계에 보고된 국내 최고(最古) 우물은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AD 500년경의 대구시 시지동, 경북 경산시 임당동 유적이 있으나,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물군집은 발견된 예가 없고 최근 충남 논산 마전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간단한 집수시설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정형화된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물군집의 발견은 국내 최초로 고고학계의 관심은 지대하다.

이번에 발견된 우물은 도로개설 구간내의 한정된 범위 안에서 12기가 밀집돼서 군집형태로 나타났다.

이 지역은 외도천과 가까운 곳으로 외도 취수장이 수백m 안에 있고,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아무 곳이나 파면 물이 나오는 지역이라고 한다.

우물은 천석형 우물과 자연석형 우물로 바닥에서는 파수부토기(把手附土器 손잡이 붙은 토기, 높이 30㎝ 폭 15∼17㎝)와 호형토기 등이 놓여 있었다.

우물 근처에서는 높이 1m 이상 되는 집수용 대형그릇이 안정되게 놓여 있는 점으로 보아 우물이 틀림없는 것으로 발굴단측은 판단하였다.

이곳 외도동 우물 유적은 모두 12개가 발견됐는데 이 중 5기는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확실한 정주취락의 증거임을 보여주는 수혈주거지와 우물이 군집으로 확인된 것은 주목된다.


외도동 우물 유적에서는 용담동 옹관묘·삼양동에서 확인되는 토기가 출토돼 우물 축조 시기는 AD 100∼200년에 걸쳐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들은 직립구연토기(直立口緣土器)·적갈색토기·파수부토기 등 토기류와 갈판·갈돌·홈돌·공이석기·숫돌 등 석기류 등이다.

우물 유적과 함께 이 일대에는 원형(圓形)주거지 6기, 방형(方形)주거지 2기, 수혈유구(竪穴遺構) 22기, 소토유구(燒土遺構, 흙이 탄 흔적) 3기, 구상유구(溝狀遺構, 도랑 모양) 1기, 배수시설 1기, 적석석렬유구(돌을 줄지어 쌓음) 3기와 다수의 기둥 구멍 등이 확인됐다.

뿐만 아니라 원형주거지 바닥에서 십자형의 특이한 유구가 국내 처음으로 발견됐는데 토기편을 세워 그 안에 냇가의 잔 돌을 채웠고, 그 십자로를 따라 토기가 놓인 형태다.

이 시설은 조리시설 혹은 난방시설로 추정되고 있으나 제의시설일 가능성도 있다.

이 일대는 인근에 30여기의 광령리 지석묘 유적군과 인접해 있어 기원 전후(2000년 전) 대규모 세력집단의 주요거점일 가능성이 높다.

또 우물이 발견된 곳을 포함한 경작공간과 곡식을 저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시설을 비롯해 제의 공간, 무덤공간 등 생활공간과 주거공간의 분리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계는 이곳이 대규모의 마을로 보고 있으며, 당시 주거인들의 생활상 연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고 있다.(한라일보 2002년 2월 22일, 제민일보 제주일보 한라일보 2월 23일, 제주일보 2월 24일, 제민일보 2월 25일, 제주타임스 2월 26일)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만으로 볼 때 외도동 유적은 주거공간과 식수 등을 공급하는 수급공간 무덤공간 등으로 분리된 계획된 대규모의 마을유적임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나온 외도동 유적의 유구와 수습된 유물로 보아 중심시기는 기원후 2∼3세기로 추정된다고 발굴단은 설명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될 때마다 중요한 유구가 잇따라 나오고 있는 외도동 유적은 현재 발굴대상 면적 3천평방미터(9백평) 중 8백평방미터(2백42평)만이 조사돼 기간 연장 등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적의 중요성에 비춰 도로 우회 등을 포함한 선형변경 문제 등을 검토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한라일보 2002년 2월 23일)

그러나 이와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도로개설을 우선시하여 이들 우물 유적은 묻어 버리고 그 위에 길을 만들어 버려 2000년 전 우물의 모습은 사진에서밖에 볼 수 없게 됐다.

위 사진은 또 다른 우물 옆에 놓여 있던 대형토기인데 물을 담아 두었던 그릇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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