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民和合? 化合? 華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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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和合? 化合? 華合!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4.1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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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화합(和合)은 화합(華合)이 되기 어렵다. 상호 화합은 서로 상승하는 빛남으로 발전한다는 이 논지는 정말 쉽지 않다. 더구나 화합(化合)은 본디 다른 성격의 두 가지 이상 물질이 모여서 본래의 각각의 성질을 잃고 새로운 물질로 탄생함을 의미한다.

쉽게들 화합을 말하지만, 사실 잘 뜯어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화합(和合)이다.

갑자기 형성된 대선국면에서 주자들은 국민대화합을 이야기한다. 선거 구호이거나 정치적 수사일 뿐 실질적인 화합의 구체적인 대안은 거의 없다. 대립과 분열은 모든 생물학적, 물리학적 존재들의 본성이다. 음과 양이 그렇고, 자성을 띠는 극이 그렇고, 화학구조 원자 나열식이 그렇다. 대립적 존재형식과 달리 사람들은 무조건 화합이 좋은 것으로 착시를 일으킨다. 이성기능을 사용하는 인류만의 인식의 오류이다.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는 없는 개념이다.

대선주자들도 자신들이 구세주가 아닐 터인데, 국민화합의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남북화합, 노사화합, 계층화합, 지역화합, 문화화합 등등 언 듯 들으면 좋은 뜻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강압과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모두 불가능한 언어의 조합이다. 남과 북은 엄연히 다른 제도와 이데올로기로 70년이 넘게 살아왔다. 상호 존중과 평화적 교류 정도가 최선이다. 노사는 본래부터 이해관계가 대립적이다. 종종 들려오는 화합의 종류는 노동자들이 회사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양보했을 때만 가능하다. 계층간에는 본래부터 신분적 상하구분으로 화합보다는 배려와 자비를 베푸는 성격을 띠었다. 그것도 높은 계층만이 아래 계층에게 일방적으로 말이다.

지역화합은 어떤가? 말과 풍토와 습성이 다른데,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고 비난한다면, 비슷비슷한 복제인간들로만 만들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문화차이는 더욱이 어렵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그렇고, 언어와 음식의 차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화합하기 어렵다. 한국남성과 동남아 여성의 결혼가정에서 대부분 이 언어와 음식문화 차이가 극복되기 어려운 것으로 꼽힌다. 음식이 이데올로기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우리는 김치를 안 먹고는 살지 못한다.

어느 한 쪽이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편에게 추종해 가지 않는다면 화합은 어려운 노릇이다. 아니면 어느 일방이 강제적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결국 끝난다. 그것이 과연 화합이라는 말과 의미가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나 사회, 민족이나 국가는 모두 자존적 존재들이다. 자기를 버리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한 알의 밀알이 자기를 버려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성서의 이야기이고, 자신을 버려야 해탈의 경계에 들 수 있다는 것도 불교의 수행장에나 있는 말이다.

 

도산 안창호. 한말에 애국계몽 활동을 했으며, 이후 도덕적 실력양성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했으며, 1926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남북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순국했다.

그래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라고 했다. 본래가 자존적 존재들이고, 독립운동을 둘러싸고 온갖 노선이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니, 반목과 대립으로 동포들끼리 서로 미워하게 되자 도산이 꺼내든 히든카드였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죽고 못 살아서 연애에 빠지고 결혼했지만 몇 년 못가서 원수가 되는 것이 남녀사이다. 부모자식도 돈 문제로 갈등을 빚고, 형제간에 병든 부모를 안모시겠다고 반목한다.

그래서 도산선생은 공부를 하자고 했다. 너도 공부하고 나도 공부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의 하심과는 다르다. 온전히 스스로 상대를 이해하고 배워보자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있다. ‘맹자(孟子)’의 ‘이루편(離婁編)’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말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와는 대립된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 말은 농업을 관장한 하나라 시조 우(禹)임금이 태평성대에 세 번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못해 어질다고 공자가 평했고,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는 난세에 누추한 골목에서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다른 사람들은 감내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태도를 잃지 않아 공자가 그를 어질다고 평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즉 안회도 태평성대에 살았다면 우 임금이나 후직처럼 행동했을 것이며, 우 임금과 후직도 난세에 살았다면 안회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며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러했을 것”이라는 뜻으로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을 썼다.

도산은 아주 명쾌하게 사랑하기 공부를 주장했다. ‘애기애타(愛己愛他)’라고도 했다.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뜻이니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의 살신(殺身)정신과는 다르다. 흥사단도 진보와 보수, 권위적 관료주의와 정의적 가치추구 사이에서 대립한다. 형식과 내용의 대립으로도 보인다.

 

도산 선생의 친필 '애기애타'

질서와 행정도 중요하고 운동적 비전과 실질적인 사회적 책무도 중요하다. 불교가 그 방대하고 소모적인 형식과 종단의 운영방법이 없었다면 붓다의 깊은 가르침이 온전히 전해졌겠는가? 즉 형식이 내용을 담보한 사례로 불교종단의 장구함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톨릭 종단은 교황과 그 주재자들의 입맛대로 경전을 편취하기도 하였다니, 형식의 장엄함이 곡 내용의 장엄을 담보하는 것만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공허한 화합의 합창보다는 실질적인 방법론을 말하는 정치인은 없을까? 국민이 바라고 선택하고자 하는 인물은 바로 따듯한 진실을 말해주는 지도자일 것이다. 인격의 깊이와 향기가 사라지고 구호와 이슈만 편취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얄팍함만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화합이란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거나 입술의 가벼움에서 시작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화합의 정신을 본래의 취지보다는 편리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입맛대로 편취하는 면은 없는지 살펴 볼 일이다. 그리고 100년 전 도산의 외침대로 여전히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는 이유 있는 울림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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