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9-4)-9,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오호도(嗚呼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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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9-4)-9,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오호도(嗚呼島)'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5.0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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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최근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한시로 읽는 제주 역사는 고려-조선시대 한시 중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제주관련 한시들을 모아 해석한 내용이다. 특히 각주내용을 따로 수록, 한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5)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오호도(呼島)'

 

有客過溟浡(유객과명발) 발해(渤海)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어

弔古愴精神(조고창정신) 옛일을 조상(弔喪)하자니 마음 서글퍼라.

遙望田橫寨(요망전횡채) 멀리 전횡(田橫)의 울타리를 바라보며

嗚呼五百人(오호오백인) 오, 슬프구나! 오백인의 식객들이여.

各自爲其主(각자위기주) 제각기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위해

殺身以成仁살신이성인) 옳은 일 성취하려고 제 몸 희생했네.

死生誰云大(사생수운대) 죽고 사는 문제, 누가 크다고 말했다던가

賢達距足珍(현달거족진) 현명하고 통달함, 아름다운 자취와 거리 멀어.

齊王初窆日(제왕초폄일) 제왕(齊王)이 처음 목숨 버렸던 날에

二客能殉身(이객능순신) 수행했던 두 객 또한 함께 따라 죽었네.

彼旣負覇紲(피기부패설) 저들은 이미 임금 모실 부담 벗어난 마당에

不忍死無鄰(불인사무린) 이웃 없인 차마 죽음 선택하지 못했다네.

諒難懷舊德(양난회구덕) 옛날의 덕을 떠올리기가 참으로 어렵거늘

彼此俱委塵(피차구위진) 서로 모두 진흙 속에 버려진 채 묻혔다네.

芳名流簡策(방명류간책) 아름다운 이름들 역사책에 오르내리고

後世誡爲臣(후세계위신) 후세에 신하 된 이에게 교훈을 전하네.

猶有輕薄子(유유경박자) 되레 행동거지에 가벼운 자들 있어

臨危棄君親(임위기군친) 위기 닥치자 쉽게 임금과 부모를 버린다네.

天性固所有(천성고소유) 타고난 성품, 참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면

何爲背人倫(하위배인륜) 어찌해 사람의 도리, 져버릴 수 있겠는가.

九泉應愧赧(구천응괴난) 죽어 구천에 가면 응당 부끄러워질 텐데

臣道少純眞(신도소순진) 신하의 도리 적음, 마음에 꾸밈없이 참됨이라.

浮雲橫海嶠(부운횡해교) 뜬구름 바다 산을 가로질렀고

芳草生海濱(방초생해빈) 꽃다운 풀 바닷가에 피어나네.

山哀與浦思(산애여포사) 산에서 슬퍼하고 포구에서 그리워함

嗚呼屬靑春(오호속청춘) 아, 슬프구나! 푸른 봄날에 붙임이여.

因題古調韻(인제고조운) 그 옛날 격조 있는 운에 차운해 시를 지으니

幽懷爲展伸(유회위전신) 그윽한 회포나마 펼쳐볼 수 있으리라.

※ 운자 : 평성(平聲) ‘眞(진)운’ - 神, 人, 珍, 身, 鄰, 塵, 臣, 親, 倫, 眞, 濱, 春, 伸

 

이첨(李詹)의 ‘오호도(嗚呼島)’란 이 시는 그의 《쌍매당선생협장문집(雙梅堂先生篋藏文集)》(2권) <관광록(觀光錄)>에 실려 소개되고 있다.

쌍매당 이첨은 태종 2년(1402년)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하륜(河崙)과 함께 명(明) 황제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사행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영락제 때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옮아가게 되는데, 이첨 일행이 사신으로 갈 당시까지는 아직 천도 이전의 상황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의 시 <오호도(嗚呼島)> 외에도 앞뒤로 쓰인 시문 여럿의 제목들이 시사하는 바가 각별하다.

곧 ‘등주대풍(登州待風)’, ‘박반양산(泊半洋山)’, ‘발여순구(發旅順口)’ 등의 제명(題名)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제명에 쓰인 지명들을 유추해 보면 이는 곧 산동반도 등주(登州)와 요동반도(遼東半島) 여순구(旅順口)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의 주요 지명이란 점이 특별히 부각된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이첨(李詹)의 조선 사행단 일행이 거쳐 간 지역의 지명을 시사해주고 있기에 여말선초 조선의 사신단 일행들이 남긴 ‘오호도(嗚呼島)’란 시의 배경이 된 지점이 바로 발해만 쪽임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한편 이첨(李詹)은 <밀봉설(蜜蜂說)>이란 글을 지어 전횡(田橫)과 오백의사(五百義士)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기도 한데, 이 글은 《동문선(東文選)》 제98권에 실려 소개되고 있다.

“ … 밀양(密陽) 사람이 꿀벌을 기르는 자가 있었다. 뭇 벌보다 특히 큰 놈이 왕(王)벌인데 주인이 그것을 몰랐었다. 어떤 날 그 왕벌이 밖에 나갔다가 제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주인은 딴 종류의 벌이 꿀벌을 헤치려는 줄 알고 죽여버렸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뭇 벌이 모두 왕벌의 주위에 모여서 단란(團欒)하게 죽었다. 주인은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슬퍼하여, 대저 꿀벌은 무지한 벌레이다. 그 임금의 덕을 봄이 오직 쫓아 날아 집을 차지하며 같은 집에서 꿀을 만들 뿐인데, 오히려 제법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거든, 하물며 신하는 임금과 한 몸이 되어서 함께 하늘이 주는 자리를 누리고, 좋은 일 궂은 일을 같이 하며 살고 죽기를 같이 하거니, 의(義)는 진실로 임금을 위하여 죽음이 있을 뿐이요, 딴 길이 있을 수 없다.

옛날에 전횡(田橫)이 한(漢)나라에서 신하 노릇 하지 않고 죽으니, 두 손[客]이 쫓아 죽었고, 나머지 바다 섬에 있던 자들 오백 사람도 횡(橫)이 죽었던 말을 듣고 다 죽자, 한(漢)나라 《사기(史記)》에 이를 탄미하였고, 당(唐)의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은 건성(建成)의 난에 죽지 않고 태종(太宗)을 쫓으니 선유(先儒)가 이를 죄주었다.

더욱이 시운(時運)이 옮아가는 때를 당하여 사설을 변하고 얼굴을 고쳐 임금을 잊고 원수를 섬겨 후세의 비난을 받는 자는 족히 더불어 말할 수 없다. 오직 미물(微物)이 인신(人臣)된 자의 거울이 될 만하다.[…密人有養蜜蜂者 其特大於衆蜂者曰君 而主人未之知也 適自外飛入其窠 以爲蜂之異類者欲害蜜蜂 殺之 後數日 衆蜂完聚一處 團欒而死 主人爲之流涕 余聞而悲之曰 夫蜜蜂 虫之無知者 其賴於君也 惟隨飛占窠耳 尙能以死報之 況臣之於君 同爲一體 共享天位 共食天祿 同休戚俱存亡 義固爲君有死無二也 昔田橫不臣於漢而死 二客從之 其餘在海島中者五百人 聞橫死亦皆死 而漢史美之 唐之王珪魏徵 不死於建成之難 而從太宗 先儒罪之 後世之爲人臣 不及蜜蜂者多矣 至若當時運推遷之際 變辭革面 忘君事讎 貽譏後世者 不足與議也 惟微物 足以爲人臣者之鑒矣]”

여왕벌이 죽자 일벌들이 함께 따라 죽음을 빗대어 전횡(田橫)과 오백의사(五百義士)들의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를 강조함이란 그 착상의 기발함과 창의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림 (11)>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일벌들의 활동 모습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최고의 공신들이었던 정도전, 권근 등과 함께 이첨도 여기에 그 일원으로 포함된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사상적 기반이 바로 유학(儒學)이었음을 상기하면 충효(忠孝)는 신하로서의 가장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전횡(田橫)의 고사는 바로 이 사상적 배경의 가장 모범적 사례로 인식되면서 특히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시기에 오호도(嗚呼島) 소재의 시편들이 등장하면서 전횡(田橫)과 오백의사들의 이야기가 회자면서 자연스레 오백장군(五百將軍)이란 신조어가 유행해 나왔음을 짐작게 한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당시 중국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이들이 공통으로 남긴 ‘오호도(鳴呼島)’ 관련 시편들인 것이다.

‘오호도’는 명(明)나라 초기 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사절단이 거쳐가면서 시로 읊는 섬 이름으로 잠시 주목을 받다가 후기에 이르러 황성도(皇城島)란 이름으로 대체되면서 점차 오호도란 이름도 사라지게 된다.

참고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보면 이 ‘오호도(鳴呼島)’란 소재의 시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한때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이숭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고고(高古)하지만 웅혼(雄渾)함이 부족하였고, 정도전의 시는 호일(豪逸)하고 분방(奔放)하지만 단련(鍛鍊)함이 적었으니, 서로 간에 장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시를 평할 때면 이숭인을 앞세우고 정도전을 뒤로 하였다.

하루는 목은이 도은의 <오호도>의 시를 보고는 극구 칭찬하였다. 며칠 후 삼봉 또한 <오호도> 시를 지어 목은을 찾아가 말하기를, ‘우연히 옛사람의 시고 중에서 이 시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자, 목은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잘 지은 시다. 그러나 그대들도 이러한 시를 지을지라도 그대들이 도은과 같은 수준 높은 시는 흔하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뒷날 삼봉이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목은은 여러 차례 위기에 처하였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였고, 도은은 끝내 화를 당하고 말았다. 논자들은 이를 두고, ‘필시 <오호도>란 시가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李陶隱 鄭三峯齊名一時 李淸新高古而乏雄渾 鄭豪逸奔放而少鍛鍊 互有上下 然牧老每當題平先李而後鄭 一日牧隱見陶隱鳴呼島詩 極口稱譽 間數日三峯亦作鳴呼島詩 謁牧老曰 偶得此詩於古人詩藁中 牧隱曰 此眞佳作 然群輩亦裕爲之至 如陶隱詩不多得也 後三峯當國 牧隱屢遭顚躓 僅免其死 陶隱終蹈其禍 論者以謂未必非鳴呼島詩爲之崇也]”

이런 시화설(詩禍說)의 진위는 잘 알 수 없으나, 도은 이숭인이 시를 잘 지었다는 평은 목은(牧隱) 이외에도 많이 산견(散見)된다.

권근은 지기(知己)인 도은을 두고 “문사가 고고(高古) 아택(雅澤)하고 탁위(卓偉) 정치하여 그 묘경(妙境)에 이르렀다.”라 했고, 정몽주는 칭송해 말하기를 “독보적 문장은 목은을 이었고, 찬연한 낭성(狼星)이 흉중에 찼네.[獨檀文章繼牧翁燦然星斗列胸中]”라고 했다.

한편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서난후시고(書亂後詩稿)>란 글에서 이르기를, “예로부터 조선대까지의 시중에 도은(陶隱)을 가장 사랑한다.”라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다. 전횡(田橫)의 죽음과 ‘상여소리[挽歌]’의 유래

- 최표(崔豹) 《고금주(古今注)》의 <해로가(薤露歌)> ‧ <호리가(蒿里歌)>

세상에 사람들이 죽으면 장례식 때 불려지는 ‘상여소리[輓歌]’의 근원이 바로 이 전횡(田橫)의 죽음에서 비롯했다는 설 또한 흥미롭다. 진(晉)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그런 사실이 실려 소개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해로(薤露)와 호리(蒿里)는 모두 초상 때 부르는 만가(挽歌)로서 전횡(田橫)의 문인(門人)에게서 나왔다. 전횡이 자살하자 그의 문인들이 상심하여 그를 위해 비가(悲歌)를 지었다. 그 내용이란 ‘사람의 목숨은 염교[薤]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다.’라는 것과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魂魄)이 호리산(蒿里山)의 묘지로 돌아간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2장(章)이 되었다.

제1장 ‘해로가(薤露歌)’의 내용은 이렇다. ‘염교[薤] 위의 아침 이슬, 어찌 쉽게 마르는가? 이슬은 말라도 다음날 아침 다시 또 축축이 맺히건만, 사람은 죽어 한번 떠나가면 어느 때 다시 돌아올까?[薤上朝露何易晞 / 露晞明朝還復滋 / 人死一去何時歸]’이다.

제2장 ‘호리가(蒿里歌)’의 내용은 이렇다. ‘호리(蒿里)는 뉘 집 땅이란 말인가? 현우(賢愚)를 가릴 것 없이 혼백을 거두어 모으네. 염라대왕은 어찌 그리도 재촉하는가? 사람의 목숨 조금도 머뭇거릴 수 없게 하네.[蒿里誰家地 / 聚斂魂魄無賢愚 / 鬼伯一何相催促 / 人命不得少踟躕]’이다.

한무제(漢武帝) 때에 이르러 이연년(李延年)이 마침내 두 곡으로 나누었는데, 해로곡은 왕공(王公)과 귀인의 장송곡으로, 호리곡은 사대부(士大夫)와 서민(庶民)의 장송곡으로 삼았다. 초상 때 운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노래하게 했으니 세인들에게 만가(挽歌)로 불리게 되었다. [薤露蒿里 並喪歌也 出田橫門人 橫自殺 門人傷之 爲之悲歌 言人命如薤上之露 易晞滅也 亦謂人死魂魄歸乎蒿里 故有二章 一章曰 薤上朝露何易晞 露晞明朝還復滋 人死一去何時歸 其二曰 蒿里誰家地 聚斂魂魄無賢愚 鬼伯一何相催促 人命不得少踟躕 至孝武時 李延年乃分爲二曲 薤露送王公貴人 蒿里送士大夫庶人 使挽柩者歌之 世呼爲挽歌]”

결국 조선 중기 문신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문에 등장하는 ‘오백장군(五百將軍)’의 배경엔 중국 한(漢)나라 초기, 제(齊)나라 왕 전횡(田橫)과 그의 부하 오백의사(五百義士)들의 장렬한 죽음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음이 확인된다.

제주 한라산 영실계곡에 존자암(尊者庵)이란 사찰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기에 이 바위 군상(群像)들의 모습을 두고서 불가(佛家)의 시각적 표현으로 ‘오백나한(五百羅漢)’이라고 불렸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시대가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유가(儒家)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기상을 담은 표현으로 ‘오백장군(五百將軍)’으로 윤색되어 불리게 되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도 《남사록(南槎錄)》이란 책에서 추정했다시피, 문헌 기록으로 전하는 영실 계곡 내의 ‘오백장군(五百將軍)’이란 호칭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문을 통해 처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끝>

 

<각주 모음>


 1)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으로서 자가 자순(子順)이고 호가 백호(白湖)이다.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선조(宣祖) 10년(1577)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제주 목사로 재직하던 부친 임진(林晉)을 근친(覲親)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가 그 기록을 《남명소승(南溟小乘)》이란 책으로 남겼다. 

 2) 田橫(전횡) : 전횡(田橫, 미상~기원전 202년)은 제나라 왕 전광(田廣)의 숙부로서 재상으로 있으면서 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한(漢)의 유방(劉邦)이 항우의 초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하자 빈객(賓客) 5백여 명과 오호도(鳴呼島)란 섬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유방의 부름을 받고 낙양(洛陽)으로 오던 중에 자결하였다.  

 3) 海島(해도) : 바다 섬. 구체적으로 이 해도(海島)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점에 대해선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선의 사신단 일행으로 참여했던 선비들이 비정한 곳은 대개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사이 발해(渤海) 해협에 위치한 섬을 두고 오호도(鳴呼島)라고 지칭하여 추모하곤 했는데, 특히 이곳의 산을 반양산(半洋山)이라 일컫는다. 한편 중국 본토에는 별도로 ‘전횡도(田橫島)’란 섬이 따로 있다. 곧 현재의 산동반도 남쪽인 청도(靑島) 해상의 섬을 ‘전횡도(田橫島)라 하여 관광지로 삼고 있기도 하다. 

4) 韓彭(한팽) :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의 합칭어이다. 한신과 팽월은 둘 다 진(秦)나라 말기의 사람들로서 군웅들이 할거하자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봉기한 인물들이다. 처음에는 항우(項羽) 예하의 소속이었지만 자신들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자 유방(劉邦)을 찾아가 이에 합세했다. 특히 한신은 조(趙)나라 제(齊)나라를 평정하면서 무공을 세웠고, 팽월 또한 해하(垓下)전투에서 큰 무공을 세우는 등 한(漢)나라가 천하통일을 함에 있어 개국 공신들이었다. 그러나 여태후(呂太后)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둘 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는 신세가 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5) 鈇鉞(부월) : 형구(刑具)인 작두와 큰 도끼로서, 결국 참살(斬殺)당함을 상징한 말이다.  

 6) 金尙憲, <南槎錄(影印本)>《濟州史資料叢書(Ⅰ)》(濟州道, 1998), 320쪽. 

 7) 사마천(김병총 평역), 《사기(3)》(집문당, 1994), 133~142쪽.

 8) 렁청진 편저(장연 역), 《지전(智典)(2)》(김영사, 2003), 514쪽.

 9) 한유(韓愈) (오수형 역해), 《한유산문선(韓愈散文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942-943쪽.  

 10) 遑遑(황황) : 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모양. 

 11) 《사고전서(四庫全書)》 <석창역대시선(石倉歷代詩選)>(권344) ‘망오호도(望嗚呼島)’.

12) 三傑(삼걸) : 이른바 초한삼걸(楚漢三傑)로 불리는 소하(蕭何) ‧ 한신(韓信) ‧ 장량(張良)을 두고 이름이다. 

13) 隆準(융준) : 콧대가 우뚝한 관상을 이르는 말. 사마천이 말하기를, “고조는 사람됨이 코가 높고 용의 얼굴이었다.[高祖爲人, 隆準而龍顔.]”라고 하였다. 《사기(史記)》(권8) 〈고조본기(高祖本紀)〉 참조.

14) 一士足可王(일사족가왕) : “선비 하나 잘 얻으면 왕도 된다.” 이 표현은 당(唐)나라 때 학자 한유(韓愈)의 <전횡(田橫)의 묘에 바치는 제문[祭田橫墓文]>의 구절에서 차용(借用)한 표현으로 보인다. 한유의 글에는 “선비 한 사람만 얻어도 왕이 될 수 있었는데[得一士而可王]”란 표현이 있다. 앞서 소개한 한유의 글 참조할 것.

15) 經溝瀆(경구독) : 본래 ‘自經於溝瀆(자경어구독)’으로서 ‘스스로 구독(溝瀆)에서 목을 매어 죽음’의 뜻이다. 이 말의 출처가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의 공자의 말 중에 보인다. 곧, “어찌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들처럼 조그만 신의를 지키기 위하야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어 죽어서 남이 알아주는 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라고 함이다.  

16) 死輕(사경) … 義重(의중) … : “죽음이란 경(輕)한 거라 능히 감당할법하지만, 의리는 소중하니 어찌 굴욕 참을 수 있으리오.” 이 말은 남효온(南孝溫)의 <과금오산(過金烏山)>이란 시의 시구 중, “목숨은 기러기 깃털처럼 가볍고, 의리는 태산처럼 무겁다네.[鴻毛命輕義重山]”라고 한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본래 가벼움을 기러기 깃털에 비유하고 무거움을 태산에 비유함이란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란 글에 보인다. 곧, “사람은 본래 한 번은 죽게 되지만 그 죽음이 더러 태산보다 무거울 때도 있고, 기러기 깃털보다 가벼울 때도 있으니 그것은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人固有一死或重於泰山或輕於鴻毛用之所趣異也]”라고 했다.   

17) 田橫寨(전횡채) : 전횡의 울타리. 산동반도 봉래(蓬萊)에 위치하고 있는 전횡산(田橫山)에 전횡채(田橫寨)가 있는 것으로 알려 있다. 이곳은 전횡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한신(韓信)과 싸워 패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섬이 아니고 산이다. 

18) 羈紲(기설) : 굴레와 고삐. 임금을 수행하는 수고를 이름. 

19) 愧赧(괴난) :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짐.

20) 서거정 편찬(박성규 역주) 《동인시화(東人詩話)》(집문당, 1998), 80-81쪽.

21) 이 내용은 진(晉)나라 학자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음악(音樂)>편에 실린 것이다.

22) 薤露(해로) : 염교 잎 위의 이슬. 염교란 백합과의 다년초 풀을 지칭하는데, 일명 부추라고 일컫기도 한다. 훗날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만가(挽歌)를 상징하는 말로 고착되었다. 일상어 중에 ‘사람의 운명이 초로인생(草露人生)과 같음’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23) 蒿里(호리) : 본래 산 이름으로서 태산(泰山)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던 곳이다. 그래서 인신하여 만가(挽歌)를 뜻하기도 하고, 묘지(墓地)를 상징하는 말로도 쓰인다. 참고로 태산 아래에 있는 ‘梁父(양보)’라는 산 또한 사람이 죽으면 이 산에 묻혔다. 그래서 ‘양보음(梁父吟)’이라 하면 장가(葬歌)류의 일종으로 치기도 한다. 예컨대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梁父吟)>은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이 도량이 좁아 세 명의 용사를 죽이고 만 일을 한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24) 鬼伯(귀백) : 귀신의 왕. 곧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뜻한다.

25) 踟躕(지주) : 천천히 가는 모양. 망설임 또는 주저함. 

26) 李延年(이연년) : 이연년(李延年, ?~기원전 90)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사람으로 본래는 집안 대대로 창부(倡夫)였다가 죄를 지어 궁형(宮刑)을 받고 환관이 되었고, 처음에는 구중(狗中, 곧 황제의 사냥개를 담당하던 관료)에서 종사하다가 춤을 잘 추던 누이동생이 한무제의 환심과 총애를 받으면서 승진하여 협성률(協聲律, 음악 담당 장관)이 되었다. 

 

 

필자소개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태생

-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독학(獨學)

외조부에게서 《천자문(千字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기초 한문 학습

 

주요 논문 및 저서

(1) 논문 : <공자(孔子)의 음악사상>, <일본에 건너간 탐라의 음악 - 도라악(度羅樂) 연구>, <한국오페라 ‘춘향전(春香傳)’에 관한 연구>, <동굴의 자연음향과 음악적 활용 가치>, <15세기 제주 유배인 홍유손(洪裕孫) 연구>, <제주 오현(五賢)의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 등

(2) 단행본 저술 : 《엔리코 카루소》(1996), 《악(樂) ‧ 관(觀) ‧ 심(深)》(2003), 《방선문(訪仙門)》(2004), 《취병담(翠屛潭)》(2006),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2008), 《우도가(牛島歌)》(2010),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2011), 《귤록(橘錄)》(2016), 《청용만고(聽舂漫稿)》(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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