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이야기]안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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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이야기]안오름
  • 홍병두 객원기자
  • 승인 2018.05.02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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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고: 186m 비고:21m 둘레:1,453m 면적:114,268㎡ 형태:원형

 안오름

별칭: 안악(鞍岳)

위치: 애월읍 고성리 1,146번지

표고: 186m  비고:21m  둘레:1,453m 면적:114,268㎡ 형태:원형  난이도:☆☆

 

 

오름 명칭의 여러 전래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화산체...

항파두리 성 동쪽의 외성에 인접한 오름으로서 얼핏 보기에는 오름으로 구분이 안 되지만 산 체의 반은 성 안에 있고 반은 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삼별초가 항파두리에 축조한 석성 중 외성인 토성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안오름 정상부이다. 이 안오름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는 제주 지역의 삼별초 지휘부가 들어섰던 곳으로 항몽의 주요 거점이었다. 

항파두리 성 안에 위치를 해서 안오름이라고 부르며 이 경우 안(內)오름을 풀이할 때 다소 차이가 난다. 한자로 안악(鞍岳)이라고 표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안과 밖을 의미하는 내용과는 다른 맥락이기 때문이다.

오름 등성이에는 몇 개의 묘가 있으며 비문에는 안악(鞍)이라고 쓰여 있다. 추측하건대 일찍이 낮고 펑퍼짐한 산 체의 모양새가 안장과 비슷한 때문에 안장(鞍)을 떠오르게 했을 테고 이로 인하여 안(안장)오름이라 불렀을 수도 있다. 이후 항파두리 성이 축조되면서 (성)안오름으로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해볼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의 안오름은 아프고 슬픈 역사를 뒤로 한 채 고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지난 세월을 품고 있다. 항파두리 성은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건너와 몽고에 저항한 삼별초가 머물던 군사기지이다. 삼별초의 선봉대가 여몽연합군을 격파하고 내성을 비롯해 외성과 건물들을 세운 곳이 바로 항파두리 성이다.

결국 대규모의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며 삼별초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 흔적 중 복원된 토성의 정상부가 안오름이다. 항파두리 성은 복원된 곳을 제외하고 안오름 정상부를 비롯한 일부는 허물어져 그 흔적만이 남아있고 잡초만 무성하다.

 

  사실 안오름 자체가 탐방의 묘미가 있거나 오름으로서의 가치나 규모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세월과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산체이면서 항몽의 고통을 감싸안은 채 수치와 모멸감을 떨쳐내려 하는 바램을 지녔으리라. 불과 21m의 낮은 비고(高)이며 원형의 화산체이나 정상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간이 이뤄졌다.

오름 주변은 경작지나 초지가 차지하고 있으며 일부 소나무 등이 숲을 이룬 모습도 볼 수 있다. 안오름 자체를 탐방한다는 의미 보다는 일대에 쌓아진 토성을 비롯하여 항몽유적지를 함께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거리나 장소 등이 전반적으로 잘 정비가 되어 있어서 자녀들과 동행을 하여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현장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

안오름 자체만을 만난다면 좀 더 이동을 한 후 진입을 하면 수월하겠지만 경유지에 항파두리 토성이 있다. 일찍이 도로가 만들어졌고 양쪽으로 길게 토성이 쌓아졌으며 복원 이후 잘 보존이 되고 있다. 토성은 고려 원종(127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제주로 들어올 당시에 대장 김통정 장군에 의해서 쌓은 것이다. 내성과 외성으로 하여 2중으로 쌓았으며 내성은 돌을 이용한 석성이고 외성은 흙을 이용한 토성이다.

당시 이 성은 강화와 진도를 거쳐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만큼 망명정부의 수도와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호국의 얼을 불태웠던 것이다. 한편, 삼별초와 관련해서 전투가 벌어지는 등 해당이 되는 오름은 제주의 서부권 해안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전투가 이어졌는데 바굼지(파군봉)를 시작으로 안오름을 거쳐 극락오름, 붉은오름, 살핀오름 순이며 삼별초 최후의 항쟁 터는 붉은오름이다.

 


 -안오름탐방기-


 안오름을 만나러 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에 으례히 항몽유적지나 토성을 먼저 거치게 될 것이다. 화산섬 제주도는 토양이 화산회토(火山灰土)이기 때문에 접착력이 강한 흙들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항파두리 토성 일대에는 기와를 구워낼 만큼 질 좋은 진흙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투용 토성을 축조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당시 김통정 장군이 이를 이용한 슬기와 지혜를 엿볼 수가 있다.  

안오름까지 이어지는 토성의 중심부에는 도로가 생겨났고 이곳을 거쳐 항몽유적지 안쪽까지 들어가게 되는데 토성만을 거쳐서 안오름으로 가는 루트를 선택하였다.  토성 아래에는 경작지가 있다는데 조기 파종을 한 유채들이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세월 속으로 사라진 얼과 넋을 다소라도 잊게 하려는지 겨울의 시련을 이겨낸 잎새들은 마르지 않은 연초록색으로 풋풋함을 느끼게 했다.

머지않아 노랗게 꽃을 피우는 날에는 이 주변을 지나는 올레꾼들을 비롯하여 방문객들에게 더한 환영으로 맞아줄 것이다. 안오름 남쪽 기슭에는 김통정 장군이 호수를 만들어 배를 띄우고 망중한을 즐기던 장털왓이 있다.  항파두리란 명칭은 그 지역(고성리)의 지형이 물항아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토성에 인접한 남쪽에 장태(고성리 남쪽 안오름 뒤편 장털왓)가 있어서 물항아리에 장태로 물을 부어 넣는 형태에서 비롯된 명칭이 그 유래이다. 성 밖으로는 박새왓이라 부르는 옛 지명지가 있는데 안오름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는 과거부터 좋은 터로 잘 알려져 있다.  토성은 안오름 정상부까지 이어지며 중간에 올레길(16코스)과 연계가 된다.

그러나 깊고 으슥한 숲과 초지를 포함하는 구간이라서 실상 여성 혼자의 진행에는 다소 부담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토성의 복원은 안오름의 정상부까지 이어졌다. 안오름 자체의 비고(高)가 말해주듯 높은 산 체는 아니며 면적 역시 대단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러나 해발과 주변의 여건이 전망에 방해를 하지 않는 때문에 정상부에 오르면 해안까지 보인다.

오름 옆으로는 방대한 경작지가 있는데 개간이 잘 이뤄졌으며 폭발 당시에 하나의 굼부리를 형성했다가 이후 변화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계절이 그러하지만 정상부에는 숲이 없고 퇴색한 억새와 잡초들만 무성했다. 일찍이 낮고 펑퍼짐한 산 체의 모양새가 안장과 비슷한 때문에 안장(鞍)을 떠오르게 했다고 하여 안(안장)오름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어느 면에서 그 안장을 그려야 할지 모르지만 개간과 변화로 인하여 다소 달라진 상황도 짐작이 갔다.

토성의 복원은 오름 정상부까지 정교하게 이뤄졌다. 등성의 바깥 부분을 따라 소나무 숲 근처까지 이어지는 토성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가 된 상태이다. 결국 지금의 안오름은 말의 안장을 그려보는 것보다는 토성의 안쪽에 있어서 명칭이 따랐다는 견해가 더 근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름 정상을 마다하고 토성에 선 채로 해안 쪽을 보니 한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심술을 부렸지만 파군봉의 산 체가 뚜렷하게 보였는데 바굼지(오름)라고도 부르지만 저곳 역시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군을 격파시킨 곳이라 하여 파군봉(破軍峰)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미 지난 역사이고 세월에 묻혔지만  파군봉 자체가 요새였고 격전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러 아프기도 했다.

거칠지도 험악하지도 않은  정상부 가까이까지 접근을 한 후 사방을 둘러 살폈다. 산세가 말해주듯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 하기에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도로변의 원점으로 온 후 반대편 토성의 모습을 만났는데 서쪽으로 이어지는 토성은 항몽유적지 근처까지 복원이 되었다. 안오름을 만나는 것이 곳 토성을 연계하는 만큼 단순한 방문보다는 의미를 실어 찾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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