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여기는 이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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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여기는 이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 김평일 명예기자
  • 승인 2018.05.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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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일 명예기자, 임진왜란 최대격전지 한산도에 가다.
 

 

구국의 요람, 임진왜란 최대격전지인 한산도를 다녀왔다.

한산도로 드나드는 방법은 선박을 이용하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통영항 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로 가는 여객선이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겨울철에는 오후5시) 1시간간격으로 운행하는 파라다이스 카페리를 타고 25분 만에 한산도에 도착했다.

거제도에서도 한산도를 왕복하는 카페리가 있다.

거제도 어구항에서 한산도 소고포항으로 매일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1시간간격으로 운항을 하는데 소요시간은 약 15분이 걸린다고 한다.

한산도를 방문했던 관광객이나 한산면 주민들이 부산이나 창원 방면으로 나갈 때 주로 이용을 하는 항구가 한산도 소고포항이다.

 

한산도는 통영시에 속하는 섬으로 섬 전체가 하나의 면을 구성되고 있는 섬이다.

통영에서 카페리를 타면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 앞에 배가 정박하므로 제승당이나 이순신장군의 발자취를 찾는다면 통영에서 가는 방법이 유리한 방법인 것 같다.(단, 차를 가지고 한산도로 들어 갈 때는 예외이지만)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최초로 자리잡은 곳이고 앞바다 한산해역은 세계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지명(地名)치고 이충무공과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국 혼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섬이다.

한산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섬 전체가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 수려하여 사시사철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한산도(閑山島)’라는 지명은 ‘섬에 큰 산이 있어서 한뫼(큰뫼)라고 부르던 것이 한산’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통영 앞바다에 한가하게 떠 있는 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섬 중앙에는 해발 294m인 망산(望山)이 솟아 있고 이 산으로부터 산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북서쪽은 두억천(頭億川)이 흘러 한산만으로 유입하므로 하천 주변은 농경지로 조성되었고 섬 전체적으로는 남쪽에 비해 북쪽이 저지대이며 완경사지도 많은 편으로 이곳에 한산도의 취락들이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 해안은 암석해안으로 남쪽 해안은 비교적 단조로운 반면 북쪽 해안은 해안선이 복잡하여 깊숙한 한산만을 형성하고 이순신장군의 유적지인 제승당으로 가는 길에는 동백나무 등이 자생하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한산도에는 제승당, 충무사, 한산정 등 이순신장군과 관계된 문화재가 많이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충무공의 우국심정이 담긴 시조로 더 잘 알려진 역사의 장인 한산도는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최대 전승지인 한산대첩을 이룬 곳으로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의 참패로 폐진(廢陣)되었던 것을 1739년(영조15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중건하고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63년에 이 일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노량해전도」·「사천해전도」·「한산대첩도」등이 그려져 있는 제승당(制勝堂)과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 한산정(閑山亭), 수루 등이 있다.

또한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 거북등대가 있다.

제승당(制勝堂)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지금의 해군작전사령부와 같은 기능을 하던 곳이다.

제승당은 1592년 이순신장군이 창건하고 전라좌수영을 설치한 곳이며 1593년에는 삼도 수군 통제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이순신장군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해상권 장악과 동시에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이순신장군이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된 후 1597년 7월 16일 원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근 3년 8개월 동안 이곳은 삼도 수군의 중심 진영으로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순신장군은 이곳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고 총통과 같은 신식 무기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등 군무를 관장했었다.

이순신장군은 ‘삼도 수군통제사’의 직위를 받고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을 때 그는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이순신장군은 운주당에서 밤낮으로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작전계획을 세우고 전쟁에 관하여 의논했으며 한편으로는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전투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병사가 있으면 찾아와서 말하게 했다고 한다.

1597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할 때 도주했던 배설은 한산도로 돌아와 일본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통제사 군영시설을 불태웠다고 한다.

곧이어 이곳으로 몰려온 일본군은 한산도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남해안의 바닷길은 통제영을 점령한 일본군이 다시 장악했고 전황은 악화되었다.

폐진 되었던 제승당은 1739년(영조 15)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0년 옛 운주당 자리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면서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운주당이 복원되면서 ‘제승당’으로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현재 제승당은 충무사, 행적비, 제승당, 한산정 수루(水樓), 대첩문, 수호사(守護舍), 한산문, 관리사무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무사(忠武祠)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에는 국보 제76호 서간첩(書簡帖)의 일부와 충무공이 송나라 역사를 읽고 쓴 독후감이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의 이순신장군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렸는데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구군복) 구군복(具軍服)은 조선시대 후기 무관들의 평상복 차림이다.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부하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으로 사정과 표적과의 거리는 145m로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존거리 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유허비는 1597년 정유재란 후 142년만인 1739년 제107대 수군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에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 옛터에 건물을 지은 후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760년 충무공의 후손 이태상 제121대 수군통제사가 낡은 건물을 중수하면서 유허비를 손질하고 비각을 옮겨 세웠고 1877년 충무공의 후손 이규석 제198대 수군통제사가 제승당 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옛 비는 그 옆에 묻어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발굴하여 2기를 함께 세워서 보존하고 있다.

제승당 유허비(한글유허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비문을 50여년 전에 한글 비를 만들어 따로 세웠다.

 
 
 
 

“어허 여기는 이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령할 제 천지 귀신도 그 정성을 굽어보고 바람 구름 번개 비가 그의 응변 술책을 도와 왜적들이 바다에 깔려 날뛰면서도 이 집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차마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했던 것이니 어찌 그리 장하시고 이제 다시 수백 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주니 백성들은 이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

슬프다.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막을 잠깐 쳤던 자리라고 거기 나는 아가위나무(甘棠) 한 가지도 베지 말라는 노래를 지어 읊조리거늘 사직을 바로잡고 우리 창생을 살리심이 그 누구 힘이관대 차마 이 터에 풀이 우거져 있게 할까 보냐.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지나가 차츰 더 아득해지면 저 어부와 목동들마저 집터를 잊어버려 물어 볼 곳조차 없어질는지 그 또한 누가 알리요.

그래서 이제 통제공(統制公) 조경(趙儆)이 흙을 쌓아 터를 돋우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는 뜻은 실로 여기를 표해 두자는 때문이리.

어허 인제는 천하 만세에 여기가 이장군 집터였던 줄을 알게 되리라 이제 군자 이르되 통제공 조경은 과연 능히 임금을 섬기는 분이라 하리니 그 어른(忠武公)을 사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비를 세울 것이며 진실로 사모하는지라 반드시 본받을 것이며 진실로 본받는지라.

반드시 충성되고 의로울 것이며 충성되고 의로운지라.

임금을 섬길 따름 다른 무엇이 있을까 보냐.

여기 비를 세우고 글씨를 쓴 이는 통제사 조경이요 글을 지은 사람은 도사(都事) 정기안(鄭基安)이다.”

수루(戍樓)는 망루의 역할을 했으며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인 이곳에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새로 건립했다.

충무공은 이곳에 자주 올라왔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고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하던 곳이다.

제승당은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해체될 때 통제영이 해체되었고 뒤이어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지방 유림들이 나서서 제승당을 관리했으나 재원 조달이 어려워 점점 퇴락하여 가고 있었다.

이에 통영군민들은 제승당의 퇴락을 두고 볼 수 없다하여 1932년 3월 15일 ‘한산도 제승당 중건기성회’를 창립하고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한산도 도민들은 별도로 ‘모충계’를 결성하여 ‘충무 영당’ 건립과 충무공 영정 봉안을 추진하여 1933년 6월 2일 ‘한산도 제승당 준공식’과 ‘충무공 영정 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했다고 한다.

 
 
 

광복 후 정부가 이곳의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여러 차례 보수했다.

1976년부터 유적 정화사업을 벌여 경역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승당 입구 바다 암초 위에 거북등대가 세워져 있는데 1963년 12월에 세운 것으로 한산대첩지가 이곳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의 등대역할을 한다.

제승당을 오가는 길에 우거진 동백나무숲을 보니 일본에서 개량을 한 개량종 동백꽃들이 보여 옥에 티가 아닌가 하는 심정이 들었다.

이순신장군의 우국충정에 반하는 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수종으로 교체를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봤다.

거북선위에서 왜적을 무찌르는 장군의 모습을 그리며 호국정신을 가다듬는 시간이 되어 가슴 뿌듯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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