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를 잇는 선.. 제주목 북성(濟州牧 北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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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를 잇는 선.. 제주목 북성(濟州牧 北城)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04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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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져 내려 아예 문루를 없애고 홍문만 세웠다.

일도1동 제주목북성(濟州牧北城) 

 

•위치 ; 제주시 일도일동 1185-3번지(건입동 1136-1번지 인근)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조선

산지천&측후소.

 

건입동_제주성북성


제주성은 숙종10년(1105)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제주읍성은 본래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명종10년(1555)에는 을묘왜변 때에 영암에서 패퇴한 왜선 40여척에서 1000여명의 왜구가 화북포에 정박하여 상륙하고,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여 왜병을 생포하고 적선 5척을 捕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때는 동쪽 성벽이 산지천 서쪽(안쪽)이라 현재의 여상이나 일도교 정도에서 왜구들은 제주읍성을 공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수문 목사는 이렇게 당하느니 치고 나가자고 판단해서 70명의 별동대를 성밖으로 출전시켰다. 다행히 이 별동대를 이끌었던 김성조(金成祖)를 비롯한 4명의 장수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었다. 왜구들이 물러났던 것이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명종조 7월 6일 기사에는제주기상청 북쪽에 남아 있는 성벽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하기를 “6월 27일에 왜적이 무려 천여명이 하륙하여 진을 만들었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골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입하여 거리가 30보 정도였는데 왜인은 전(箭)에 맞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퇴병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金直孫과 갑사(甲士) 金成祖·李希俊, 보인(保人) 文時鳳 등 4인이 말을 타고 돌격하니 적군이 궤산(潰散)하였습니다. 한 왜장이 있었는데 홍모(紅毛) 투구를 썼습니다. 자기가 활 잘 쏘는 것을 믿고 혼자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정병(正兵) 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맞히니 곧 엎드려 쓰러졌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참획한 무리가 심히 많았습니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340쪽)

그 후 10년이 지난 중종20년(1565) 곽흘 제주목사가 10년 전의 교훈을 살려 성 동쪽 벽을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서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의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를 잇는 선이다.

북성은 기상대에서 내려오는 계단 바깥 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북성 홍문(虹門) 터라는 표석이 있다. 여기서 虹은 무지개라는 뜻이다. 따라서 虹門은 내를 가로질러 교각 부분이 둥글게 만들어진 문이다.

《이곳은 제주성 북수구로 홍문이 있던 터다. 처음 죽서루가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되고 효종3년(1652) 목사 이원진이 보수하면서 공진루를 세웠다. 그 뒤에 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져 내려 아예 문루를 없애고 홍문만 세웠다. 이 홍문도 1927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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