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돌아갈 주민 없어 '잃어버린마을’ 돼 버린...송당리 알손당(알송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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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돌아갈 주민 없어 '잃어버린마을’ 돼 버린...송당리 알손당(알송당)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7.06 0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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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리 등지로 피난간 주민들은 도피자 가족 등의 구실 아래 집단 희생

송당리 알손당(알송당)터

 

위치 ; 구좌읍 송당리 535번지 일대
유형 ; 마을터(잃어버린마을)
시대 ; 대한민국

송당리_알송당마을터 사기조각

 

송당리_알송당마을터


송당리(글자로 쓸 때는 송당이라고 쓰지만 옛어른들이 발음할 때는 손당이라고 흔히 불렀다.)는 예로부터 목축이 발달했던 곳으로 크게 상동, 중동, 하동으로 나뉘었으며 장기동, 알손당, 너븐밭, 가시남동, 대천동 등의 여러 마을을 거느리고 있었다.

중산간에서도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무장대의 힘이 많이 미쳤고, 4․3 초기에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우익인사와 그의 가족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 22일 군경토벌대는 알손당을 포함한 송당리 전지역을 초토화했다. 송당리와 교래리 경계 지점에는 ‘감발레주둔소’가 설치되어 경찰이 주둔했었다.

소개한다는 정보가 사전에 주민들에게 알려져서 당일 인명피해는 없었다. 다만 가을걷이한 곡식과 우마를 지키려고 소개에 응하지 않았던 노인들이 이후 토벌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또한 세화리 등지로 피난간 주민들은 도피자 가족 등의 구실 아래 집단희생되기도 했다. 송당리는 1949년 5월 29일부터 복구되었으나 장기동, 알손당, 너븐밭, 가시남동은 복구되지 않았고 대천동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복구되었다.

알손당에는 정철연, 정원주, 박두영, 박영, 김완진, 정두규, 김인주, 부봉은, 부평규, 김태준 등 15호 정도에 8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송당리를 복구할 때 본동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재건했기 때문에 본동과 멀리 떨어진 알손당은 당장 복구되지 못했다.

이후 사태가 완전히 평정된 다음에는 이미 다른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에 돌아갈 주민들이 없어서 '잃어버린마을’이 되어 버렸다. 현재는 대부분 농경지로 바뀌었다.(『제주4․3유적Ⅰ』546쪽)

송당리에서 비자림으로 가는 길 중간에 ‘알송당’ 시외버스 정류소 표지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큰길가와 밭 경계에 유난히 대나무가 숲을 이룬 곳이 많아 마을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계펌프장 서쪽에는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정류소 표지 남서쪽 경작지에는 옹기와 사기그릇 조각들이 밭담 옆에 많이 남아 있다.

옛마을길이나 집올레는 찾아보기 힘들다.(111225 답사)
《작성 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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