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일제강점기 때 한학자이자 향토사학자..오등동 김석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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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일제강점기 때 한학자이자 향토사학자..오등동 김석익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8.11 0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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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초대 도지사를 역임하였던 박경훈, 의학박사 홍순억 등의 명사들도 김석익의 문하생이었다.

오등동 김석익묘

 

위치 ; 제주시 오등동 1743.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묘

오등동_김석익부부묘

 


정실 온난화농업센터의 바로 앞 남쪽 실험포로 쓰는 밭의 동쪽 가에 있다. 부부쌍묘이며 묘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산담 안에 배롱나무가 있다.

부인 묘 앞에는 비갈이 있으나 김석익의 묘 앞에는 비석이 없다. 다른 곳에 모셨을 때 비석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비석을 도난당한 후에 부인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김석익(金錫翼, 고종32년(1885)~1956년)은 일제강점기 때 한학자이자 향토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윤경(胤卿)·윤경(允敬)·홍점(鴻漸), 호는 심재(心齋)·일소도인(一笑道人)·해상실사(海上佚史). 초명은 김석조(金錫祚)이다.

아버지는 김창규(金昌圭)이며, 조선 말기에 의병운동을 벌였던 김석윤(金錫允)[1877~1949] 스님의 동생이다.

여덟 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의 기초를 배웠으며, 열세 살 때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열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였다. 16세 때인 1920년에 아석(我石) 이용호(李容鎬)에게 한문을 배웠다.

이용호는 충청북도 보은군 사람으로 교리(校理)를 지냈으나 고종33년(1896)에 유배7년형으로 제주도에 귀양을 왔고 고종38년(1901) 6월에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지도로 이배되었던 한학자이다.

이후 김석익은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에 살았던 안병택(安秉宅)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안병택은 조천읍 조천리 출생으로, 아버지 안달삼(安達三)을 따라 일찍이 광주로 옮겨 살았다.

이 무렵 의병장이었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거주하던 한천정사로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으며,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이미 기울어지자 기우만의 구국 격문을 몰래 가지고 귀향하였다.

1909년 고사훈 등이 의병을 일으키려 할 때 서당 숙장(塾長)이었던 김석익과 고성모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한다.

김석익은 의병장을 맡지는 않았지만 고사훈과 뜻을 같이하였으며 1909년 3월 4일에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되자 다음과 같이「억고초광경지(億高樵㹰景志)」라는 시를 읊어 당시의 마음을 토로하였다.

“오직 공의 굳은 성품은 이 세상에 비할 자 없어, 추풍에 말 달려 저 강 건너고자 몇 번이던가, 몸은 죽었으나 장한 뜻만은 아직도 죽지 않아, 우리천 아래 물을 서로 맞부딪치게 하오(惟公性癖世無雙하니 驅馬秋風幾渡江고, 篤志壯心今不死니 牛梨泉下水相撞이라).”


이때부터 민족혼을 진작할 계책을 찾아 먼저 『탐라기년(耽羅紀年)』저술에 몰두하여 1915년에 완성하였고, 1916년 가을에 『탐라관풍안(耽羅觀風案)』의 오류와 빠진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할 무렵 주변에서 한문서당 개설을 권장하자 이를 실행하였다.


이 무렵 강창보(姜昌輔)[1902~1945], 한상호, 김택수(金澤銖), 김정순, 김정로, 고경흠(高景欽)[1910~?] 등이 김석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한문을 익혀 그 영향을 입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광복 후 초대 도지사를 역임하였던 박경훈, 의학박사 홍순억 등의 명사들도 김석익의 문하생이었다.


1948년 초 민주독립당은 제주도 지구당을 창당하기 위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김석익이 내빈 자격으로 참석하였으며, 만장일치로 도당(道黨)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김석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의병활동에 나서거나 또는 독립단체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글로써 민족혼과 후진을 일깨워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저술에 『탐라기년』, 『탐라기년속편』이 있다. 『탐라기년』은 938년(태조 21)부터 1906년(고종 43)까지의 탐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것이다. 「탐라기년」은 제주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탐라기년속편』은 1906년(광무 10)부터 1955년까지의 제주의 현대사를 재정리한 것이다. 또한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 『파한록(破閑錄)』, 『유리만필(儒理漫筆)』 등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오사카를 비롯해 한양, 청진, 정읍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식견을 넓혀 『북행록(北行錄)』, 『근역시화(槿域詩話)』, 『천주교란기』, 『양경천전(梁擎天傳)』 등을 비롯해 많은 글을 썼다. 월계 진국태를 칭송하여 지은 찬시(讚詩)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서예도 당대 최고봉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해서(楷書)로 쓴 「황고부근행장(皇考府君行狀)」과 행서로 쓴 「퇴계선생 복축사(退溪先生卜築詞)」는 매우 유명하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2004년 그의 후손인 김계연씨가 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1000여점 중에서 「탐라기년」「탐라지」「탐라관풍안」「파한록」「심재산고」「잡동산이」「해상일사」 등의 역사와와 문집, 서예의 깊이를 알 수 있는 행서로 쓴 8자 병풍인 퇴계선생복축사 등 선생의 저술작품과 생전에 썼던 문방사우와 인장, 능화판 등 250여점을 선별하여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했다.(제민일보 2004년 07월 05일)


제주의소리에 따르면 심재선생은 당대 대부호인 송두옥의 사랑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제주의소리 111205)
《작성 1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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