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 첫 가톨릭 순교자 복자(福者) ..함덕리 김기량(金嗜良 Felix Petrus)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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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 첫 가톨릭 순교자 복자(福者) ..함덕리 김기량(金嗜良 Felix Petrus)현양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1.0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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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량은 1857년 성령강림주일에 영세와 동시에 첫 영성체를 했다

함덕리 김기량(金嗜良 Felix Petrus)현양비

 

위치 ; 조천읍 함덕리 72-156번지. 함덕중학교 서쪽 밭
시대 ; 조선
유형 ; 기념비

 

김기량(한라일보)

 

김기량현양비

 

제주도에 공식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례 행위와 전교 활동이 시작된 것은 1899년 5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천주교 소식이 단편적으로 이 땅에 전해진 여러 기록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로 1857년 홍콩에서 영세 입교하여 이듬해 고향에 돌아와 전교 활동을 전개한 김기량을 들 수 있다.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은 함덕리 출신으로서 제주의 첫 영세자이며, 이 고장에서 처음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한 제주 지역의 첫 순교자로, 모진 박해를 받다가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기량은 1816년 제주목 함덕리의 비교적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총명한 두뇌와 강한 의지에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고 있어서 김선달로 불리었다.

청년 김기량은 모든 일에 정성을 기울였고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이웃의 신임을 얻었으며 배를 구입하여 선주로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이 방면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42세가 되던 1857년 2월 김기량은 동료 4명과 함께 배에 약재와 그릇들을 싣고 정의현 서귀진을 거쳐 모슬포로 항해하다 갑자기 사나운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동료들을 모두 잃고 배에 남은 약간의 양식으로 겨유 연명하며 한 달 가까이 표류하던 중 해류에 밀려 중국의 광동 해역가지 흘러갔을 때 다행히 지나가던 영국 배에 발견되어 구조를 받았다.


《제주계록》함풍8년(1858) 4월 7일의 기록에는 김기량이 제주에 귀환한 후 문초받은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약재를 싣고 무역자 격졸 문영환, 박식근, 문광철, 한앙문 등 4명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지난 정사년(철종8년=1857년) 1월 24일(양 2월 28일)에 정의현 서귀포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사나운 바람을 만났습니다. 이에 실었던 무명과 겉보리는 모두 잃어 버렸고, 다만 양식 한두 말만 남아 있었으므로 끓여서 미음을 만들어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 양식이 떨어지자 배 위에서 혼절하였습니다. 배에 있은 지 5일째인 3월 초5일에 대청국 광동성 향항도(홍콩)에 도착하여 저를 청나라 사람의 배에 하선시켰습니다.”(http://koreanmartyrs.or.kr/)


이렇게 구조받은 그는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80일간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루세이(Rousseille) 신부의 지도 아래 조선인 신학생 이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웠다.

이바울리노는 1854년 최양업(토마) 신부에게 발탁되어 페낭(Fenang)신학교에 유학가서 사제수업을 받던 신학생으로 건강이 나빠져서 1857년초에 이곳에 와서 휴양을 하던 참이었다.


“당시 조선 배 한 척이 폭풍에 밀려 광동 해역에 이르렀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허기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김기량)만이 구조될 수 있어서 우리 조선 학생들 중 한 사람(이바울리노)이 있던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 루세이 신부 지도하에 그 표류인은 이 학생에게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 그러나 큰 섬(제주도)을 위해서는 한층 더 기도해 주십시오. 조선 사람 하나가 공동 근처의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의 우리 대표부 신부에게 거두어졌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아시지요?”(베르뇌 주교의 1858년 8월14일자 서한)


김기량은 1857년 성령강림주일에 영세와 동시에 첫 영성체를 했다. 부활절이 4월 12일이므로 그의 영세일은 5월 31일이 된다.(http://kimgwanhoo.pe.kr/북제주문화원사무국장 김관후)


그 후 김기량은 상해에 가서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받았다. 중국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학식을 갖추고 있던 그는 글자를 써서 자신의 상황을 중국인들에게 전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1858년 1월에 우리나라 국경인 의주부에 도착하여 귀국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의주, 경기감영, 강진 등에서 표류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것이 없어 석방되었다.


그는 이바울리노가 전해준 서한과 안내 정보를 가지고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며 교우촌을 찾아가 교우촌에서 최양업 신부와 페롱(Feron) 신부를 만났다. 이 때 최 신부는 오두재(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2리 오도티)에, 페롱 신부는 이곳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산막골(모동면 신흥1리 도리원)에 거처하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와 페롱 신부는 김기량의 성실함과 그의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훌륭한 사도가 되리라고 믿어 여러 서적과 성물들을 주면서 제주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도록 격려했다. 최 신부는 김기량을 만난 뒤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그를 만나서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하심과 섭리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제주도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징치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직하면서 자기가 제주도 고향으로 돌아가면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에 저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최양업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1858년 10월 4일 보낸 서한)


김기량은 교우촌에 3개월 가량 머물면서 신심을 다지는 한편 필요한 서적과 자료를 얻고 1858년 4월 1년 2개월만에 조천포를 통해 귀향했다. 고향에서 그는 제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1860년에는 집안 식구를 중심으로 20명 가량을 입교시켰다.

자신의 배에서 일하던 선원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예비신자가 되게 하였다. 1866년에는 예비신자를 포함 40여명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 무렵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주교는 김기량에게 선교사 1명을 제주에 파견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병인박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세례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신자들을 데리고 신부를 만나려 육지부로 왕래해야 했다. 베르뇌 주교가 김기량을 만난 인상을 기술한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겨자씨를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베르뇌 주교의 1858년 8월 14일자 서한)


1865년 김기량은 다시 한 번 폭풍을 만나 일본 큐슈 해안에 표류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프티장(Petijean) 신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도움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프티장 신부는 1864년 나가사키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1866년 주교로 승품되어 일본 교구장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김기량은 세례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신자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거제도로 나갔으며,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통영에 나갔다가 그곳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다른 교우 4명과 함께 1866년 9월에 통영관아로 이송된 그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성교를 믿는다고 떳덧이 자백하였고,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렇게 모진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도 김기량은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치명(천주(天主)와 그 교회(敎會)를 위(爲)해 목숨을 희생(犧牲)함)하여 죽을 것이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의연히 권면하였다.(http://blog.daum.net/hongsk47/)


통영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혹독한 매질을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가 1867년 1월(음1866년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이 때 관장은 특별히 김기량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http://blog.daum.net/cm1292/)


그의 순교로 인하여 가족들은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모든 것을 잃고 흩어져 유랑하게 되어 후손들의 그 후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http://blog.daum.net/hongsk47/) 함덕리에 김기량의 생가 터가 있다. 나중에 김기량의 5대손이 함덕리에 거주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김기량이 지은 가사 중에서 훗날의 증언을 통해 그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교야말로 하느님을 최대한으로 섬기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致命)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 소원 사주모(事主母)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能到)주대전하옵소서."


[주]횡행 : 거침없이 나아감. 사주모(事主母) : 하느님과 성모님을 섬김. 능도(能到)주대전 : 하느님 대전에 능히 다다름.(http://cafe.daum.net/rtpeace/)


1998년 황사평에 김기량순교비를 건립하였고, 2005년 4월24일 순교자 고향인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에서 김기량 순교 현양비 축복 및 제막식을 가졌다.

현양비는 배의 모양을 형상화하였다. 제막식에는 함덕리에 거주하는 김기량의 5대손이 참석하였으며, 제주교구는 앞으로 그의 생가가 위치한 함덕 지역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시복시성대상자 124위에는 김기량 순교자가 포함되어 있다. 조천성당에는 김기량순교기념비가 있으며, 천주교에서는 함덕 김기량순교현양비-함덕포구-신흥포구-관곶-조천포구-조천성당까지 7.7km의 순례길 ‘영광의 길’(김기량길)을 지정하였다.


제주의 첫 가톨릭 순교자 복자(福者)가 됐다. 로마 교황청이 최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해 시복(諡福) 결정을 내린 가운데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출신으로 제주 첫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김기량(1816~1867)펠릭스 베드로가 그 명단에 들었다.


시복은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뛰어난 덕행이나 순교로 신자들의 공경대상인 이들을 복자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복자는 성인(聖人) 이전 단계다. 오는 8월 15일 예정된 이번 시복식은 교황이 아시아청년대회 개막에 맞춰 방한해 주재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한라일보 140211)

《작성 121016, 보완 1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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