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9-2)-9.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유오백장군동(遊五百將軍洞)'(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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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9-2)-9.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유오백장군동(遊五百將軍洞)'(1577)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5.0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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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최근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한시로 읽는 제주 역사는 고려-조선시대 한시 중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제주관련 한시들을 모아 해석한 내용이다. 특히 각주내용을 따로 수록, 한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9-2>

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9.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유오백장군동(遊五百將軍洞)>(1577)

 

【참고자료】

○ ‘오백장군(五百將軍) 이야기’의 배경

가. 제왕(齊王) 전횡(田橫)의 고사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 <전담열전(田儋列傳)>편에 보면 제왕(齊王) 전횡(田橫)에 대한 사실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기원전 203년 10월, 한왕(漢王) 유방(劉邦)은 초왕(楚王) 항우(項羽)를 공격하였다. 한신(韓信)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서 조(趙), 연(燕) 두 나라를 평정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더 진군해서 제(齊)나라를 공격할 차례였다.

당시 한신이 접한 보고서에는 “한왕 유방이 유세객 역이기(酈食其)를 제(齊)나라로 보내서 제왕(齊王) 전광(田廣)으로 하여금 한나라에 귀순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이 들어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한신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의 모사(謀士) 괴통(蒯通)이 이런 내용의 계책을 한신에게 전했다.

“여러 우여곡절을 헤치며 장군께서는 명령을 받고서 제나라를 공격하러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왕이 역이기를 사신으로 제나라에 보내어 귀순을 설득했다고 하는데 그게 진실인지는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더욱이 그게 사실이라면 결과적으로 역이기란 일개 유생이 세 치 혀끝으로 제나라의 70여 성을 공략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장군께서 이제까지 수만의 정예군을 이끌고서 1년 남짓 싸우면서도 조나라의 50여 성만을 공략하는 데 그쳤는데, 어찌 일개 유생보다 그 공로가 적어야 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지금 제나라 군대가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곧장 쳐들어가 제나라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은 오롯이 장군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한신은 곰곰이 그 말을 생각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나라를 치기로 결심하고서는 곧바로 공격을 감행한다.

한편 제왕 전광은 역이기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한나라에 귀순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곧바로 역하(歷下: 산동성 歷城)의 군대를 해산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나라 장군 한신은 군사를 동진시켜 제나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갑작스레 한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사실을 접한 제왕 전광과 재상 전횡은 놀라기도 하고, 한편 분노가 들끓었다. 급히 역이기를 불러 호통을 쳤는데, 이런 사실에 대해 놀란 것은 역이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전횡은 역이기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단정하고서는 그의 변명을 들을 겨를도 없이 즉시 그를 기름이 끓는 가마솥에 잡아넣었다. 그때가 바로 기원전 203년 11월이었다. 마침내 한신은 제왕 전광의 목을 베고 제나라를 평정했다.

그때 펼쳐진 형국이란 한 치 앞도 가늠키 어려운 복잡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당시 한신이 한나라를 떠나서 초나라에 귀순하면 한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를 도와서 초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가 멸망하며, 스스로 왕이 된다면 천하가 셋으로 나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초나라와 한나라는 동시에 모두 한신이란 인물의 존재를 매우 중시했다.

바로 그때 괴통은 한신에게 새로운 계책을 제시한다. 곧 패왕의 대업을 이룰 것을 종용하면서 이런 말로써 설득한다.

“신이 듣건대, 하늘에서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천명을 어기는 것이라서 반드시 벌을 받게 되고, 시기가 성숙되었을 때 행하지 않는다면 그때를 잘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화를 입게 된다고 합니다. 장군께서는 부디 깊이 생각하셔서 좋은 기회를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서 한신은 한 참동안 곰곰이 곱씹어보다가, 문뜩 한나라 왕이 자신을 우대해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책봉한 사실을 떠올린다. 결국 그는 한왕 유방에 대한 충의와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판단해 괴통의 제안을 묵살해버렸다.

그러자 괴통은 한신의 곁을 떠나 어디론가 몸을 피해 숨어버렸고, 얼마 후에 한신은 결국 유방에게 포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한신은 괴통의 말을 옳게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며 한마디의 명언을 남겼다. 그게 바로 저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토사구팽(兎死狗烹)’, 곧 토끼 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삶아버린다는 의미의 말이다.

한편 한때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전횡(田橫)은, 제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제왕(齊王)이라 칭하고서는 봉기를 시도했으나 결국 유방에게 패배를 당했다.

초왕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제패한 유방이 한나라를 새로 건립하자, 전횡은 수하 500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에 있는 외로운 섬으로 도망쳤다. 이때 누군가가 한고조(漢高祖)에게 이런 건의를 했다.

“원래 제나라는 전횡의 형제들이 평정했습니다. 제나라의 많은 현인(賢人)들이 전횡을 따라 지금 섬에 숨어 살고 있는데 그대로 방치해 두면 언젠가는 커다란 두통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죄를 용서하고서 그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아예 죽여 버리십시오.”

한고조 유방은 유심히 생각한 끝에 전횡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전횡을 불러들이려 했다. 그렇지만 전횡은 이를 사절하고서는 편지로 이렇게 써서 보냈다.

“신은 폐하의 사신 역이기(酈食其)를 삶아 죽였습니다. 지금 그이 아우 역상(酈商)이 한나라의 현명한 장수라 하니 신은 그것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조칙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서인(庶人)이 되어 바다의 섬이나 지키며 살도록 해주십시오.”

한고조 유방은 전횡에게 다시 사신을 보내어 역상에 대한 엄숙한 조칙을 내린 상황을 상세히 설명토록 하고 다음과 같이 전하도록 했다.

“만약 전횡이 귀순한다면 그를 왕으로 봉해줄 수 있다. 아무리 낮을지라도 제후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오지 않겠다면 군사를 보내어 주살토록 할 것이다.”

전횡은 깊이 생각한 끝에 귀순하기로 마음먹고 두 문객과 함께 낙양을 향해 떠났다. 낙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전횡은 생각할수록 속이 편치 않았다. 그가 동행하던 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초에 나는 유방처럼 외로운 사람이었고 지위도 그와 평등했다. 그러나 지금 유방은 황제이고 나는 도주범이다. 지금 나에게 유방의 신민(臣民)이 되라고 함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러한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결국 그는 검을 뽑아 자결했다. 그의 부하들도 충성심이 매우 강해서 500명 모두가 동해(東海 - 곧 한국의 서해)의 작은 섬에서 집단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유방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면서 전횡이야말로 재능과 덕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치하(致賀)해마지않았다.

제(齊)나라의 왕 전횡(田橫)의 자결, 그리고 뒤이은 그의 부하들 500인의 장렬한 죽음!

결국 오백장군(五百將軍)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비롯한 셈이다.

그렇다면 후세 사가들이나 학자들은 이런 전횡의 행적을 두고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문장이나 시문으로 남아 전해지는 자료가 주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중국 측 자료를 일별하고 난 후, 아울러 조선의 경우를 되짚어보기로 한다.

<그림 (4)> 전횡(田橫)과 오백의사(五百義士) 합장묘 – 전횡도(田橫島) 소재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전횡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평하는 글을 남겼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

전횡의 절개는 참으로 고고하다. 빈객들조차 그 절의를 사모해 따라 죽으니 참으로 그는 지극히 현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열전(列傳)에 올리는 것이다.”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에서 전횡(田橫)을 두고 영웅이라고 칭했다. 후대의 사가(史家)들 역시 전횡과 여포(呂布)의 행적을 서로 논하며 비교하기도 한다. 그들에 대해 내린 인물평 또한 비슷하면서도 대체로 일치한다.

“전횡의 용감하고 장렬한 기개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비범함을 보임으로써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존경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조조(曺操)에게 생포된 여포는 목숨을 구해달라고 애걸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했다. 여포의 재능이 전횡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포는 치욕을 견디고 원수에게 귀순하려고 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한편 당(唐)대의 대문호였던 한유(韓愈)는 낙양으로 가던 도중 전횡의 무덤 앞을 지나게 되자 ‘전횡의 묘에 바치는 제문(祭田橫墓文)’을 다음과 같이 지어 바치기도 했다.

 

○ <전횡의 묘에 바치는 제문[祭田橫墓文]> 한유(韓愈)

정원 11년(795) 9월에 내가 동도 낙양으로 가던 중에 길이 전횡의 묘 아래로 나 있었다. 나는 전횡이 고상한 의로움으로 부하들을 얻을 수 있었음에 감동하여 술을 마련해 제사를 바치며 글을 지어 조상하였다.

제문은 다음과 같다.(貞元 十一年九月 愈如東京 道出田橫墓下感橫義高能得士 因取酒以祭 爲文而弔之 其辭曰)

<그림 (5)> 제전횡묘문(題田橫墓文) 한유(韓愈) 작(作) 원문(原文)

 

事有曠百世(사유광백세) 사적 중에는 백 대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而相感者(이상감자) 감동적인 것이 있는데

余不自知其何心(여부자지기하심) 저 자신도 그게 무슨 심리인지 알지못합니다.

非今世之所稀(비금세지소희) 지금 세상에서 숭상하는 바가 아니건만

孰爲使余歔欷(숙위사여허희) 어찌하여 저를 흐느끼도록 만들어

而不可禁(이불가금) 참지 못하게 하십니까?

余旣博觀乎天下(여기박관호천하) 제가 이미 천하를 두루 보아 왔지만

曷有庶幾乎(갈유서기호) 그 누가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夫子之所爲(부자지소위) 대저 선생이 하신 일에.

死者不復生(사자부복생) 죽은 자는 부활하지 못하니

嗟余去此其從誰(차여거차기종수) 아, 제가 이곳 떠나면 그 누구를 좇겠습니까?

當秦氏之敗亂(당진씨지패란) 진나라가 망할 즈음에

得一士而可王(득일사이가왕) 선비 한 사람만 얻어도 왕이 될 수 있었는데

何五百人之擾擾(하오백인지요요) 어째서 그 많은 5백 인의 무리가

而不能脫夫子於劍鋩(이불능탈부자어검망) 선생을 칼날서 구하지 못했습니까?

抑所寶之非賢(억소보지비현) 혹 현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亦天命之有常(역천명지유상) 하늘의 일반적인 법칙입니까?

昔闕里之多士(석궐리지다사) 전에 공자님 고향 궐리에 선비가 그리도 많았지만

孔聖亦云其遑遑(공성역운기황황) 성인 공자님도 급하고 불안하다 했습니다.

 

한편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저명한 학자였던 주선(朱善, 1314~1385)은 <망오호도(望嗚呼島)>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남겼다.

 

○ <오호도를 바라보며[望嗚呼島]> - 주선(朱善)

 

五百田橫士(오백전횡사) 저 전횡(田橫)과 오백(五百) 의사(義士)들

中心出至誠(중심출지성) 심중의 결심,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왔네.

寧爲同日死(영위동일사) 마침내 한날한시에 모두 죽음 선택했기에

不苟一時生(불구일시생) 한시도 삶에 구차하지 않았다네.

島有嗚呼號(도유오호호) 이 섬에 아직 오호(嗚呼)의 탄식이 남아있어

人留慷慨名(인류강개명) 사람들에게 그 강개(慷慨)한 이름 남겼도다.

至今觀信史(지금관신사) 이제 와 그 당시 역사를 돌이켜 볼 양이면

遺恨幾時平(유한기시평) 남겨진 한(恨) 그 언제면 평정하게 될거나.

※ 운자(韻字) : 평성(平聲) ‘경(庚)’운 - 誠, 生, 名, 平

<그림 (6)> 중국화가 서비홍(徐悲鴻, 1895~1953)의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
*소장처 : 북경(北京) 서비홍기념관(徐悲鴻紀念館)

 

이 시의 제목에 ‘오호도(嗚呼島)’가 들어가 있다. 명(明)나라 학자의 시에 전횡도(田橫島)의 별칭으로 ‘오호도(嗚呼島)’가 있음이 우리에겐 특이한 관심거리로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연재 계속 됩니다)

 

필자소개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태생

-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독학(獨學)

외조부에게서 《천자문(千字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기초 한문 학습

 

주요 논문 및 저서

(1) 논문 : <공자(孔子)의 음악사상>, <일본에 건너간 탐라의 음악 - 도라악(度羅樂) 연구>, <한국오페라 ‘춘향전(春香傳)’에 관한 연구>, <동굴의 자연음향과 음악적 활용 가치>, <15세기 제주 유배인 홍유손(洪裕孫) 연구>, <제주 오현(五賢)의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 등

(2) 단행본 저술 : 《엔리코 카루소》(1996), 《악(樂) ‧ 관(觀) ‧ 심(深)》(2003), 《방선문(訪仙門)》(2004), 《취병담(翠屛潭)》(2006),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2008), 《우도가(牛島歌)》(2010),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2011), 《귤록(橘錄)》(2016), 《청용만고(聽舂漫稿)》(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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