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광풍제월..아라1동 조천석(朝天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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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광풍제월..아라1동 조천석(朝天石)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0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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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뒤에 부는 화창한 바람과 달'.. 깨끗하고 맑은 마음 비유

 

아라1동 조천석(朝天石)


조천석 朝天石
위치 ; 제주시 아라동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뜰에는 산지천에서 온 〈조천석〉과 신엄리에서 온 〈돌코냉이〉가 있다.

조천석은 관모를 쓴 사람의 얼굴 모양이 새겨진 아래 몸통 부분에 〈朝天石〉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石'자는 흙에 묻혀 있다.)

팔의 형태는 새겨지지 않았고 머리와 몸통의 비율이 1:1 정도의 높이이다.

이 석상에 대한 여러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에 세워졌던 석상이다. 산지천 칠성통 입구, 광제교 밑에 있었다.

전에 명나라로 가던 배들이 모두 이곳에서 바람 자기를 기다렸으므로 이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산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들이 이 표석을 기준 삼아 배를 매었다고 한다.(제주시 옛지명 201쪽)

 

②「耽羅誌草本」에는 '山底橋 吊城內 牧使金 政 改名光霽橋 橋上有砥柱巖 刻朝天石三字'(산저교가 동성 안에 있는데 김정 목사가 광제교라 이름을 개명하고 다리 위에 있는 지주암에 조천석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라고 하였다.

'광제'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준말이다.

즉 '비가 온 뒤에 부는 화창한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지주암은 중류지주(中流砥柱)를 의미한다.

중국 하남성 섬주에서 동쪽으로 40리 되는 황하의 중류에 있었던 기둥 모양의 돌로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격류 속에서 우뚝 솟아 꿈쩍도 하지 않으므로 난세에 처하여 의연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舊건입동지 38∼39쪽, 건입동지 118∼119쪽, 194쪽)

광제교에는 지주암이 있어 비가 와서 분 물이 여기에 이르면 광란하여 용솟음친다.(蘆峯集 참조)(舊건입동지 41쪽, 건입동지 122쪽)

※이 석상에는 세 글자가 아니라 '朝天'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원래 있었던 곳(다리 아래)에 받침돌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다리 위에 세웠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 석상은 김정 목사가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③ 朝天石의 문화적 의미 ; 흔한 돌이 자연 그대로라면 그저 석물(石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돌이 어떤 인간의 내적 정신활동의 양태나 작동이 가해졌을 때, 문화적인 소산물이다.

그게 학술적이나 예술적으로 뛰어난 돌이라면 값어치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제주대학교 본관 서쪽 입구 그 옆에 조천석(朝天石)이 세워져 있다.

이 돌은 세로 1m, 가로 40㎝쯤 되는데 앞면에는‘朝天石’, 뒷면에는‘庚子春 牛山書’(경자춘 우산서)이라고 종서로 음각되었다.

많은 인재들이 이 앞을 지나며 이 돌의 문화성과 역사성에 대해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돌의 유래는 이렇다.


1959년 제주상고 교사였던 현용준씨(玄容駿)가 산지천 동안(東岸) 광제교(光濟校) 곁에 있는 경해식당에 들렀던 일이 있었다.

그 건물 아래로 내려갔더니 커다란 바위 위에‘조천석’이 동쪽을 향해 서 있지 않는가! 그는 이 돌이야말로 제주문화와 깊은 촉매 작용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현용준다운 총명한 눈빛이 있었다.

가끔 들려 살펴보니 돌 앞에 음식을 올려 기복(祈福)했던 자취를 알아내어 주변의 고로(古老)들에게 물었더니 옛날 이 산짓내가 자주 범람하여 성안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타지방에 있을 때 치수(治水)하는 방법을 알았던 어느 목민관(牧民官)이 이런 돌을 세워 정성껏 치제(致祭)도 하고 또 홍수가 염려되면 이곳에서 지우제(止雨祭)를 거행, 그 뒤부터 수재(水災)가 없어져 치정(治政)에 밝은 목사라고 일컬었다 고 전해오는 말도 듣게 되었다.

얼마 없어 대학교수로 부임한 그는 박물관장 때에 남문로터리의 골동품 상점에서 그 돌을 발견, 물었더니 칠성로의 박치순옹(朴致順) 댁에서“1000원에 구입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현 교수는 1500원을 주고 사서 1979년 7월4일 박물관의 유물대장에 등재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돌이니 대학에 잘 보존시켰다.

 ‘조천’이란 뜻은 하느님께 배알한다. 혹은 하느님께 조현(朝見)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대학으로 가서 이 돌을 살펴보고 「탐라기년」을 통해 여러 경자년의 사실을 찾아보니‘정조 4년(1780) 목사 김영수(金永綬)에 대한 기록에 수재를 막기 위해 고을 안에 간성(間城)을 쌓아 두 문을 설치, 남쪽을 소민(蘇民), 북쪽을 수복(受福)이라 했다.

간월천(看月川)에도 보(堡)를 쌓았다’고 되어 있다. 옳지! 틀림없이 치수를 잘한 목민관이라면 김영수임이 틀림없다.

또 김영수에 대해‘廉公有威 民去後思之’(청렴공정하고 위엄이 있었다. 백성들은 퇴임 후에야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평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속(俗)에 이르기를‘도제암(都帝岩)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조천석이라고도 하여 옛 성제(聖帝)가 이 돌에서 타서 올라가 하느님을 만났기에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라는 기록을 보면서 무엇인가 잡히는 듯하였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영명사 절 곁에 동맹왕의 구제궁(九梯宮)이 있고, 그 안에 기린을 기르는 굴이 있었다. 뒷 사람이 돌을 세워 기록하기를 굴 남쪽에 백은탄(白銀灘)이 있는데 조수(潮水)가 드나들어 명왈(名曰) 조천석이라 했다.

천상에 이를 알려 이승휴(李承休)가 소위 하늘에 올라가 천정(天政)에 참여하였다. 조천석에서 기린을 탔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고 한문으로 적어 놓았다.

어떻든 김영수 목사는 이를 치수에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분임이 분명하다.

대학에 있는 그 돌을 산지천 원 위치에, 큰 바위를 깔고 그 위에 세우는 것이 어떨까? 백성을 위해 일하는 목민(牧民) 정신도 일깨우고, 관광적인 효과도 배가(倍加)될 것이다. <김찬흡·제주도문화재위원> (제민일보 2003년 7월 29일)

김정(金 亻政) 목사는 영조 11년(1735, 을묘) 4월 부임하여 영조 13년(1737, 정사) 9월 재임중 화북관(禾北館)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새겼다는 ‘조천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옮겨 세워져 있는 조천석은 정조2년(1778, 무술) 12월 남도병마절도사로 재임중 제주에 도임하여 정조5년(1781, 신축) 3월에 떠난 김영수(金永綏) 겸방어사(兼防禦使)가 경자년(1780)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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