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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icon 며, 1793년 정조는 정
icon 2011-10-30 01: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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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1545년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88년,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사실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벌을 회피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쓰던 거북선 모형1592년 음력 4월 13일에 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선조는 이양원, 변언수, 이전 등을 한.성 수성대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어가를 타고 평양을 지나 의주로 몽양을 떠나게 된다. 이순신은 남해안 다도해상에서 조정의 파천소식을 접한다.

전라우수영군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음력 8월 말 전열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므로 객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수군 내에서도 이순신파와 원균파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진위 및 당부에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대한 논란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1593년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정면전 대신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고 조선수군도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지리한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아서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결국 정유년인 1597년(선조 30) 1~2월 명나라와 일본간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이순신은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옥중에서 조카 완 등으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서찰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전달받았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1597년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는 전사하며, 원균은 상륙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으며, 92척을 파손시켰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갑자기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노량해전 지도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류성룡은 조정에서 실각하였다.

한편, 일부에서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주장되기도 했으나,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일뿐 근거는 없다.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입은 적은 없다.

이순신은 1545년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88년,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사실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벌을 회피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쓰던 거북선 모형1592년 음력 4월 13일에 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선조는 이양원, 변언수, 이전 등을 한.성 수성대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어가를 타고 평양을 지나 의주로 몽양을 떠나게 된다. 이순신은 남해안 다도해상에서 조정의 파천소식을 접한다.

전라우수영군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음력 8월 말 전열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므로 객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수군 내에서도 이순신파와 원균파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진위 및 당부에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대한 논란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1593년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정면전 대신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고 조선수군도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지리한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아서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결국 정유년인 1597년(선조 30) 1~2월 명나라와 일본간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이순신은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옥중에서 조카 완 등으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서찰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전달받았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1597년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는 전사하며, 원균은 상륙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으며, 92척을 파손시켰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갑자기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노량해전 지도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류성룡은 조정에서 실각하였다.

한편, 일부에서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주장되기도 했으나,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일뿐 근거는 없다.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입은 적은 없다.

이순신은 1545년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88년,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사실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벌을 회피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쓰던 거북선 모형1592년 음력 4월 13일에 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선조는 이양원, 변언수, 이전 등을 한.성 수성대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어가를 타고 평양을 지나 의주로 몽양을 떠나게 된다. 이순신은 남해안 다도해상에서 조정의 파천소식을 접한다.

전라우수영군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음력 8월 말 전열을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선.불.폰.대.포.폰 O1O × 4292 × 6500 선.불.폰.착.신□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므로 객관성에는 논란
2011-10-30 01: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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