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넣어 마시는 한국식 커피가 왜 그토록 유행했는지는 불투명하다. 향이나 맛이 진짜 커피만 못한 인스턴트를 최대한 맛있게 마시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다방 커피를 맛있게 타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잘 알려진 ‘둘둘둘’ 공식(‘하나 반·둘·하나 반’ 등 취향에 따라 공식은 다양하다)이 있긴 했지만, 사용하는 숟가락의 크기와 물의 양에 따라 맛이 다르다. 커피와 크림, 설탕을 이상적인 비율로 배합한 커피믹스가 나오면서 이런 고민은 대체로 해결됐다.
서민이 커피를 처음 접한 것은 1900년대 초 프랑스 상인 브라이상이 나무꾼들을 대상으로 공짜 커피를 제공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브라이상은 나무를 독점하기 위해 커피를 제공했는데, 당시 이를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검은 모양새가 약초 달인 탕국과 흡사하고 맛이 씁쓸하면서 감미가 나는 것도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커피는 다방을 통해 전파됐다. 한국전쟁 직전 전국 70개이던 다방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53년 7월 150여곳, 1959년 3000곳(서울 1000곳)으로 빠르게 증가했다(출처: 「동서식품 50년사」). 68년 커피가 수입금지 품목에서 풀리면서 이때 동서식품과 미주 산업이 커피 제조 허가를 얻어냈다. 70년엔 동서식품이 미국 제너럴 푸드와 기술 제휴를 하고 ‘맥스웰 하우스 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한국 커피 산업의 시작이었다.
한국에 최초로 커피를 들여온 사람은 안토니엣 손탁이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초대 러시아 공사인 웨베르의 처형으로 웨베르가 한국에 부임할 때 따라 들어왔다. 손탁은 명성황후 시해 후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한(아관파천·1896) 고종황제를 가까이서 수발을 들면서 세를 키웠다. 고종은 신경증에 시달렸고, 주변 사람을 믿지 않아 왕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손탁의 몫이었다. 그가 식후에 주던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고종은 환궁 뒤에도 커피를 계속 즐겼다.
900년대 초부터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실험이 시작돼 ‘물에 녹는 커피(Soluble Coffee)’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맛이 없고 향도 제대로 나지 않아 인기는 없었다. 1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마시면서 대중화됐다.
커피는 세계에서 물, 차와 함께 가장 많이 마시는 인류의 3대 음료다. 이제 한국에서도 진짜 원두를 로스팅해 추출한 커피가 대중화됐지만, 90년대 이전까지 커피는 당연히 ‘타 먹는 것’, 즉 인스턴트 커피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당시 ‘둘(커피), 둘(설탕), 둘(프림)’ 공식으로 탄 커피는 집에 손님이 와야 구경할 수 있었다. 현재도 한국은 세계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다(커피믹스 기준 1인당 연간 122잔). 이런 유별난 인스턴트 커피 사랑은 초유의 발명품으로 이어진다. 바로 커피와 설탕, 프리마의 ‘꿀조합’이 봉지 하나에 담긴 커피믹스다.
여야는 이날 문화재청 등을 상대로 차분히 정책 질의를 이어가던 도중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증인 채택 문제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 국감 시작 1시간 10여분 만에 정회하고 협상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