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 봉성리 화전분교(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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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 봉성리 화전분교(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1.13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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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도(해발 560m)와 공초왓의 화전민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봉성리 화전분교(멸실)터
 

위치 ; 봉성리 산30-3번지 일대. 북달아진오름과 폭낭오름의 서쪽 왕이메의 북서쪽 평화로의 바로 남쪽에 해당한다.
유형 ; 학교 터
시대 ; 대한민국

봉성리_솔도옛집
봉성리_솔도화전분교터 표석앞.

 


제주도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곳곳에 화전이 일구어졌다.

화전은 육지부의 경우 ①정치적 불안기에 은신하려고 입산 ②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입산 ③무주공산에 임의로 화입하여 경작해도 관의 제재가 없었고 과세부담이 없어서 ④새로운 화전은 평지의 숙전보다 비옥하여 많은 소출을 올릴 수 있어서 성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주의 화전은 이전에 농경이 금지되었던 목장지대 안의 삼림지가 19세기경부터 화전이 허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895년 공마제도가 폐지하면서 국영목장을 방치하기보다는 화전경작을 허용함으로써 화전세를 받아들이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해안지대, 산록대 등에 거주하던 주민들과 육지에서 유입된 화전민들에 의해 삼림이 무성하여 토지소유권 행사가 소홀했던 한라산 산록대의 자연초지 또는 이보다 더 위쪽에 위치한 삼림지를 불태운 다음 화전이 조성되었다. 다만 육지부처럼 도피성 주민은 아니고 생계유지를 위한 화전이었다.


그 결과 목장토를 이용한 화전경작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화전민과 화전촌이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화전민에게 부과되었던 화전세 징수 과정에서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지면서 관리와 화전민간의 마찰이 빈발하여 마침내 1898년에는 화전민 방성칠이 주동이 되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솔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애월읍 봉성리 화전동으로 분류돼 있지만 봉성리와의 거리가 8㎞ 정도 떨어져 있어 별다른 교류 없이 살아가는 마을이다.

1948년 11월 13일 토벌대에 의해 40여 호가 소개됐다가 1955년 재건운동으로 다시 마을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이나 다름없다.

화전분교는 솔도(해발 560m)와 공초왓의 화전민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어도국민학교에 속한 분교장으로 1969년에 학구민들의 열정으로 부지와 건물을 마련하여 개교했으며 19년 동안 1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학생수가 줄어들어 1988년 문을 닫으면서 어도국민학교에 통합되었다.

현재 솔도 마을이었던 곳에는 무너져가는 옛 건물이 1채 남아 있고, 수제차를 만드는 집을 비롯하여 새로운 현대식 집이 몇 채 들어서 있다.
《작성 1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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