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마소에 물 먹이는 급수원..회천동(서회천) 연못(淵池, 봉천수 연못)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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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소에 물 먹이는 급수원..회천동(서회천) 연못(淵池, 봉천수 연못)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5.0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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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개동과 경계 가까운 곳에 이름 자체가 ‘연못’이라 불리는 매우 넓은 연못(3,716㎡)

회천동(서회천) 연못(淵池, 봉천수 연못) 터

위치 ; 회천동 1787번지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유형 :수리시설(봉천수 연못)

회천동_연못둑

 

회천동_연못터


봉개동과의 경계 가까운 곳에 이름 자체가 ‘연못’이라고 불리는 매우 넓은 연못(3,716㎡)이 있었다.

서회천은 옛부터 농업 특히 목축업이 성했다. 한 가구에 소와 말 40~50두씩 사육하는 농가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소와 말이 사육은 물이 절대 필요하여 급수장 관리를 잘 해야 하며, 마을 주위에 속칭 허구릉, 안패기, 진퍼기, 연못 등 우마급수장이 있었다.

이곳 연못도 마소에게 물을 먹이는 급수원이었다. 목장에 방목하기 위해 데려가거나 방목했던 마소를 집으로 데려가는 시기에는 이곳에서 수십마리의 마소가 물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여름이면 개구리가 워낙 많이 서식하여 동네 어린이들이 개구리 잡으러 가는 곳이었고, 개구리가 많으니 뱀도 무수히 보이는 곳이었다.

원래는 자그마한 물통이 있었는데 서회천에서 물통 북쪽으로 우마급수장을 확장할 때 인접한 토지 소유주가 땅을 서회천 마을에 기증해 주어서 큰 연못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양정기씨 증언) 큰 비가 오면 연못 북쪽 둑이 무너져서 마을 주민을 동원하여 보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연못 주변에 군부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4․3사건 이전에는 연못 주변에도 ᄀᆞ는새(서회천) 사람들 20가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이 마을은 회천 1반이라고 하였다.

이 연못은 원래 회천 지경이었으나 1970년대 봉개동 양○○ 동장 때 일부를 봉개동 구역으로 변경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연못 지경에 대한 소유권 다툼이 있었다. 원래는 ᄀᆞ는새에서 연못으로 가는 길 동쪽은 회천, 서쪽은 봉개 지경이며 연못은 회천 지경이었다.

연못은 길 동쪽에 있다. 양정기씨가 서회천 통장 시절이었는데 제주시청 재무과에서 연못이 봉개동 소유임을 확인한다는 확인서를 쓰라고 왔었다.

문복기, 고선수, 양정기, 송승엽, 문종림 등이 동서회천 주민이 모두 동원되어 노역으로 만든 연못임을 내세우며 회천 소유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봉개동 농지위원인 임○○씨의 주장으로 인하여 결국은 봉개동과 회천동이 반반씩 소유하는 것으로 되었다.

2000년 이후에 봉개동사무소 주관으로 매립하여 잔디를 심고 운동장을 조성하고 체육시설을 설치하여 봉개동연합청년회가 관리하고 있다.

북쪽 울타리에는 연못 둑이 남아 있다.
《작성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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