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기잡는 법 전수..대서리 최영장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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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기잡는 법 전수..대서리 최영장군사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1.10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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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백성에 조어기술 가르쳐 생활에 변혁 가져온 최영장군 기려

 

대서리 최영장군사당

 


최영장군 사당 (제주도 지방기념물 11호)
위치 ; 추자면 대서리 산 155번지
시대 ; 고려말(사당 설치는 조선시대)
유형 ; 민속신앙

 

 

최영은 서기1316년(고려 충숙왕 3년)에 태어나 1388년 이성계 일파의 손에 암살될 때까지 고려의 명장과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그는 대호군에 임명된 1352년(공민왕3년)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장수 40여명과 군사 2000여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승상 탈탈 등을 무찔렀으며, 1358년에는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다.

또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성을 수복하였다.


공민왕은 1368년 8월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원경(元京)을 함락시키고 새 주인공이 되자 재빨리 동년 11월에 명에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도 다음해 4월 사신이 왔으므로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1369년 5월부터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원에 예속되었던 관제를 개정하여 또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1370년 5월에 명나라에서 책봉사가 왔으므로 동년 7월에 삼사좌사 강사찬을 보내어 책명새서(冊命璽書. 칙명으로 왕에 봉한다는 황제의 어새가 찍힌 문서)를 보내어 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 원에서 받았던 금인(金印)을 바쳤다.

이 때 「탐라계품서」(耽羅計稟書)를 명나라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탐라는 원래 고려의 영토인데 원이 불법으로 그들의 목마장으로 하였으니 통치권을 고려에 귀속시켜 달라.

②원이 사육하던 말은 제주 관원으로 하여금 책임져 사육시켜 양마(良馬)를 바치도록 허락해 달라.

③탐라에 있는 목호(牧胡. 목마에 종사하는 원나라 관원)들은 안무하여 양민이 되게 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명나라 마정관에게도 보탬이 되고 우리 백성들에게도 생활이 안정될 것이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명나라에서는 「탐라의 영유권은 의당 고려에 속한다. 목호가 관리하던 말은 제주 관리가 관리하라. 명에서는 마정관을 파견하지 않겠다. 그 대신 지금 있는 말 중에서 양마 2천필을 바치는 것으로 종결한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1372년 3월 예부상서 오계남과 비서감 유경원을 유지별감 겸 간선어마사로 삼아 제주로 보냈다.

오계남은 해상에 왜구가 출몰하므로 궁병 425명으로 해상 호송을 경계하도록 하고, 유경원은 제주에 들어가서 목사 이용장, 권만호 안방언 등과 함께 말을 징발하려 하자, 목호 석가을비(石加乙非) 초고도보개(肖古道甫介) 등은 이에 불응하여 유경원·이용장·안방언 등을 죽이고 상륙한 궁병 300여명도 살해하였다.

이 까닭에 오계남은 상륙도 못하고 급히 돌아가서 목호의 반란을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명나라에 전하는 한 편, 우인열을 체핵사(體 使. 변란 때 현지 실태를 조사하는 군직)로 이하생을 안무사로 삼고, 문하평리 한방언을 재차 탐라로 보내어 말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호 석질리필사(石迭理必思)·초고독불화(肖는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은 말하기를 "우리 세조 황제가 길러 놓은 말을 어찌 감히 명나라에 바치겠는가" 하면서 단지 말 300필을 내놓았다.

1374년 4월에 명에서는 말 2000필을 독촉하였으므로 공민왕은 문하찬성사 최영(崔塋)으로 하여금 제주행병도통사(濟州行兵都統使)로 삼아 목호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밀직제학 염흥방을 도병마사로 삼고, 삼사좌사 이희필을 양광도상원수, 판밀직사사 변안열을 부원수, 찬성사 목인길을 전라도상원수, 밀직 임견미를 부원수, 판숭경부사지윤을 경상도상원수, 동지밀직사사 나세를 부원수로 삼아, 각기 그 도의 군사를 영솔하게 하고 지문하사 김유를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교주도 도순문사로 삼아 병선 314척에 정예군졸 25650명을 거느리고 동년 8월 12일에 진도를 출발하였다.


최영장군의 목호토벌전말보고서에 의하면 소한도·보길도에 이르자 역풍을 만나서 8월 28일까지 머물었다가 바다로 나갔는데, 이번에는 모진 바람을 만나 배 30척이 파손되자 추자도에서 후풍하다가 8월 28일에 명월포로 상륙하였다.

최영장군은 전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을 목호에게 보내어 왕지문서(王旨文書)를 전하고 귀순하도록 하였으나, 목호들은 왕지문서를 찢어버리고 선발대로 상륙한 11명의 군인들을 죽이고 목사 이하생도 살해하고 3000명을 모아 완강히 항쟁하였다.


최영장군은 전군을 독전하여 명월촌으로부터 어름비 지경과 새별오름 지경에서 목호를 격파하였다.

목호들은 연래·홍로 지경으로 후퇴하므로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추격하여 백방으로 공격하니 목호들은 견디지 못하여 범섬으로 도망하였다.

최영장군은 정용으로 하여금 쾌속선 40척으로 범섬을 포위하게 하자 목호 석질리필사(石迭理必思)·초고독불화(肖는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은 스스로 섬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으므로 그 시체를 인양하여 목을 베어 다른 무리들에게 보이자 항복하였으므로 이들을 생포하였다.

이들은 초무하여 양민이 되도록 하였다. 그 사이에 답실만(答失蠻) 등이 재차 항거하므로 이를 주살하니 나머지 무리들은 완전히 항복하였다.


최영장군은 상륙한 지 24일만에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으므로 동년 9월 22일에 명월포를 출발하였는데 화탈섬 부근까지 이르자 역풍이 불어서 명월포로 회항하였다가 다음날 다시 출항하여 추자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후풍하다가 10월 5일에 추자도를 출항하여 취도에 이르자 모진 바람을 만나 추자도로 회항하였다가 동년 10월 18일에 다시 출발하여 바람 때문에 소한도·보길도·진도 등지에서 머물다가 11월 3일에 목포 해안에 도착하였다. 싣고 간 말 중에 풍랑으로 93필이 죽었고 하륙한 말은 837필이었다.(「道議會」 제10호, 1997년 10월, 김봉옥, '목호의 난과 최영장군의 토벌' 255∼257쪽)

추자도에 최영장군사당이 설치된 것은 최영장군이 바람 자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들에게 어망편법 및 그물로 후리질하는 방법, 주낫질하는 방법 등 조어(釣魚) 기술을 가르쳐(추자중학교, 내 고장 사랑 지도 자료 10쪽)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는데 이러한 장군의 위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매년 춘추에 봉향하고 있다.

속설에 의하면 최영 장군이 목호 토벌을 위하여 제주에 오가면서 추자도에 들렀을 때 바닷고기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자 백성들이 잡을 줄 몰라서 어렵게 지내는 것을 보고, 칡덩굴 속껍질로 실을 뽑아 그물을 만들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쳤으므로 그 후부터는 고기를 수월하게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하여 기록을 살펴보면 최영장군이 추자도에 들른 것은 1374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9월 23일부터 10월 17일까지 23일간, 모두 27일간을 머물었으니 그 동안에 추자 백성들과 접촉할 기회는 충분하므로 위 속설의 신빙성은 크다 할 것이다.(「道議會」 제10호, 1997년 10월, '목호의 난과 최영장군의 토벌' 257∼258쪽)


또한 추자도는 고려말 이래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그 고통이 컸기 때문에, 고려말 왜구 토벌에 공로가 많았던 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로부터의 환란을 면해보려는 국토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워졌다고도 할 수 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2)에 '섬 북안에 사당이 있고 왕래하는 선인이 신에게 빌고 바람을 비는 곳인데 포구 이름이 당포로 된 것은 이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당이 설치된 것은 1600년대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 사당 단청 및 담장을 보수하였고,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하여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1971년 8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8년 외문을 새로 지었다.

건평이 약 5평이고 평면 3칸이며 기와로 덮인 사당 안에는 1m 높이의 비로 만들어진 위패가 서 있다. 위패에는 「朝國都統大將崔瑩將軍神位」라고 새겨져 있다.

 

사당 건물에 걸려 있는 『崔瑩大將神祠』라는 편액은 추자도 출신 海洲 元容植(1907~1957)의 작품이다.

그림과 서예에 뛰어났던 원용식은 더 배우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선진지의 예술 수업에 몸을 바쳤다.

또한 동양화의 본류를 찾기 위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奉天)에서 피를 말리는 그림 수업에 노력하였다. 그의 작품에 대한 호평이 중국 언론에서 대서특필된 바 있다.

이 현판은 1925년 처음 귀향하여 사당에 참배하러 갔다가 남긴 휘호(揮毫)와 내부 벽화이다. 이는 초기 작품이어서 비록 수작은 아니지만 그의 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화백은 후일 서울 정릉(貞陵)에 은거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기여, 산수화, 사군자, 화조화(花鳥畵)를 그렸고, 특히 잉어를 소재로 한 그림을 잘 그려 격조 높은 그림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 제주교육박물관 소장실 안에 간직한 동양화 ‘설경(雪景)’과 ‘흑매(黑梅)’라는 두 작품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는 제주교육박물관 개관에 앞서 추자중학교를 통하여 서울 사는 해주의 딸에게 선친이 제주농업학교 3년을 졸업한 추자도 최초의 인물이란 점에서 유작(遺作)을 희사하도록 하여 입수한 작품이다.(제주일보 120927 김찬흡 글)


이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과 전면칸은 퇴칸처럼 좁게 나눈 것이다. 원뿔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렸으나 중도리,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보아지는 곡면으로 장식되고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심벽에다 외부로 돌로 쌓은 벽은 노출된 전면 외진주 밖까지 돌출시켜 기둥을 보호하게 했다.

전면에는 세살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내부 주칸에는 신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모로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 밖으로는 자연석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大祭」 혹은 「祠堂祭」라 한다. 대제는 본래 여름철에 모셨다. 여름철에 멸치 어장이 형성되고, 최영장군을 모시는 것이 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수협에서 대데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맡고 있다. 수협에서 대제를 맡으면서부터 祭日을 봄철로 옮겨 吉日을 받아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이는 주요 어업자원이 조기로 바뀌었고 그 성어기가 봄철이기 때문이다.(1999년에는 양력 4월 1일에 제를 올렸음)

「큰새미」라고 하는 샘에 3∼4일 동안 금줄을 쳐 두었다가 그곳의 물을 떠다 제사에 썼다.

개인이 정성을 들일 때에는 「젯새미」라는 샘물을 이용한다. 祭場에도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과거에는 祭主 한 사람을 정하여 祭主 집에서 沐浴齋戒하고 제반 음식을 마련하였다.

제물로는 삼치·시루떡·시금치·산나물·듬부기·녹두나물 등을 준비한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Ⅱ 64쪽)

돼지고기를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으며, 최영장군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은 어업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를 지낸다.(한라일보 2004년 3월 11일)


옛날에는 제를 지낼 때 축을 고하지 않고 했지만 이조말 본도로 유배온 선비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축문을 지어 주어서 제례시에 고하고 있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干支云云 獻宮幼學其 敢昭告于 朝國都統大將崔瑩將軍之靈 天覆地載 神明照鑑 靈驗昭昭 致誠報應 己多陰德 居民賴生 伏惟尊靈 舟缺欺土 祝願 漁農豊饒人物咸寧 謹以淸酌 次冠庶羞 欽薦于神 尙饗」

사당 왼쪽 문 앞 위에는 <崔塋將軍神祠新築記>가 걸려 있는데 종서로 되어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漂漂氣像은 與闕張으로 張(戶+月)하고 堂堂忠義은 使夷齊로 齊立이라. 以麗朝臣都統으로 節鉞摩南에  伏耽羅할새 候風斯島故로 島民이 去後益詠而立祠하고  生牛尊誠에 致祥消魔之己自數百年靈驗이은(있은?) 바  自甲午以後茅宇甲戌以來하야 風霖可年層에 棟礎山律 地하고 人往獸踏에 祠土가 不潔하고 驚惶洞詣이다가 卜地新創은 大西里區長 李起雄 및 有志人의 夙興夜深之誠而此地建營之애 庶民이 自來하야 敖不活躍薦廟有歡樂樂以謂其 曰神境淨하고 永世不忘之功을 註以記也
西紀一九三五年 乙亥 二月 二十五日
新築化主 李起雄 事 監 李奉淑 朴達只 朴炳南 金京玉 金學良 朴京云 朴在吉 朴化善 金泳澤 元泰益 築工 秋大燁 都木手 李仁兼 助木手 吳在連 記述人 金汝天 庚戌年 改築 文化財 戊午年 彫刻 秋大燁 顧問 面長 朴昇奎 理事 高亨來 化奄神 遺芳百世

 

홍북면 대인리 닭재산 정상 부근에도 최영장군 사당이 있다.

최영장군의 호를 따서 기봉사(奇峰寺)라는 현판을 붙여놓았다. 최영장군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1316년에 태어났고, 102년 후에는 똑같은 집터에서 성삼문 선생이 태어났다는 말이 전해온다.

최영장군이 태어난 고장이기에 마을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10월에 추모제)를 지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현장을 찾아서』에서는 강원도 철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두 지역의 주장 모두가 확증할만한 결정적인 기록이나 자료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http://joongho.kr/zerobbs/노중호의 홈피 김정헌 글) 그런가 하면 부산 남구 감만동에도 최영장군사당 있으며, 고양시에는 장군의 무덤이 있어서 최영장군위령굿보존회가 활동하고 있다.


《작성 041015, 보완 111213, 1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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