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이 분열될 때 위기가 닥쳐온다.."
상태바
"국론이 분열될 때 위기가 닥쳐온다.."
  • 김평일 명예기자
  • 승인 2018.05.04 0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평일 명예기자, 임진왜란 3대 대첩지,진주성을 가다.
 

임진왜란 3대 대첩지중 하나인 진주성(晉州城).

임진왜란 3대 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말한다.

진주대첩이라고 하면 진주성이 떠오르고 진주목사 김시민장군과 논개가 떠오른다.

진주성은 지난 2013년에 ‘한국인이 꼭 가 봐야할 관광지’에서 영예의 1위로 선정이 된 지역이다.

2017년 한국관광 100선으로 3회 연속 선정된 곳이고 2012년 미국 CNN 방송에서 한국 관광지 Best 50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전략적인 요충지로 두 나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된 유적지이며 특히 호국충절의 성지로 알려진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왜군 2만명이 진주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3,800명의 군사와 성민들이 힘을 합쳐서 왜군을 크게 이겼다.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에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이름도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현재 성내에는 촉석루, 의암, 의기사,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김시민장군 전공비, 촉석정충단비, 쌍충사적비, 김시민장군동상, 영남포정사, 공북문, 진주성우물, 북장대, 포루,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고려시대 말기에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토성으로 쌓았는데 1379년(고려 우왕 5) 진주목사 김중광이 돌로 성곽을 새로 쌓았다고 한다.

1593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진주성을 무너뜨린 후 평지를 만듦으로써 진주성의 흔적을 지운 때도 있었다고 한다

1604년 진주성에 경상도 우병영이 설치되었고 1618년에는 진주성내에 촉석루 · 북장대 · 서장대 · 동장대 등을 중건했으며 그 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북장대는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서 성 밖은 물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력까지도 지휘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을 진남루(鎭南樓)라고 한다.

북장대는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은 제1차 진주성 전투(1592)와 다음해인 1593년 계사년에 일어난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순국한 7만 민, 관, 군의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1986년 12월에 착공하여 1987년 12월에 준공한 제단이다.

국난극복의 표상인 계사순의단은 제단의 크기가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다.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높이 3.5m, 가로 9.7m의 대첩비를 세웠다.

 

진주성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조형물인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이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동상이다.

김시민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크게 이긴 3대 전쟁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이다.

김시민장군 동상은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호국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수호상으로 높이 7m로 지난 2000년 1월 1일 제막됐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 시호는 충무이다.

무과에 급제를 한 후 훈련원판관, 진주판관,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진주목사로 관직을 받았다.

임진왜란 초기 김시민장군은 3,800명의 군사로 6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하였지만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김시민장군의 시호를 충무(忠武)로 내려 충무공 김시민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가 선봉에 선 일본군들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해 물러갔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전투로 육상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던 조선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했고 결과적으로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진주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촉석루(矗石樓)이다.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누각을 일컬을 때 밀양의 영남루, 삼척의 죽서루, 진주의 촉석루가 손꼽히는 누각들이다.

촉석루는 고려 고종 때 건립된 후 여러 번 고쳐지어졌는데 6.25전쟁 이전 까지만 해도 국보 제276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6.25전쟁 시 불에 타버려 현재의 건물은 전쟁 후 복원한 건물이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지휘본부로 사용되었고 평시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으며 과거시험을 치루던 장소이기도 하다.

촉석루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이다.

임진왜란 때 촉석루는 수많은 조선의 군인들과 백성들이 살해당했거나 강물에 투신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1593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이 10만여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쟁에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이 왜군에 6월 29일 함락되었다.

제2차 진주성싸움 때 싸움에 참가를 한 모든 사람들이 순의(殉義)를 하였고 이 때 논개(論介)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기도 하다.

촉석루 뒤편에 의기사가 있다.

의기사(義妓祠)는 경상남도 문화재 제7호로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論介)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論介)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해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의기사(義妓祠)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6년(1740년)에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수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논개를 논할 때 함께 거론되는 곳이 있다.

 

의암이다.

의암(義庵)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말한다.

조선 선조 26년(1593년)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명의 민, 관, 군이 순절하자 논개(論介)가 의암(義庵)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는데 논개의 의열(義烈)을 기리고자하여 이 바위를 의암(義庵)이라고 했다고 한다.

논개는 왜장을 유인할 때 10손가락에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어 왜장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성을 둘러보고 국난극복에는 너와 내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에 힘이 약하거나 국론이 분열될 때 국가적으로 위기가 닥쳐온다는 교훈을 되새기며 진주성을 떠나 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